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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 반 산트의 최고 걸작, <엘리펀트>
심영섭(평론가) 2004-09-15

잔혹했던 날의 초상화 <엘리펀트>

‘추악하고 화창한 날이로다.’ 비디오 게임 하듯 아이들을 사냥한 뒤 총신에 채 화약 냄새가 마르기 전, 알렉스는 이렇게 중얼거린다. 그날은 새소리와 총소리가 함께하는 날. 푸른 가을 하늘과 죽은 시체가 함께 나뒹구는 날. 그날. 그 찰나의 순간은 그러나 영원한 순간. 죽음은 끊임없이 미끄러져 영겁의 시간 속으로 유예되고 시간은 봉인되어 우리에게 순간순간 되돌아와 말을 건다. 정적. 그러나 소란거림으로 뒤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는 순간. <엘리펀트>는 13명의 죽은 아이들의 얼굴로 이루어진 일종의 점묘화이자 벗어나려 해도 자꾸자꾸 되돌아오는 시간의 원점으로 회귀하는 잔인했던 날의 초상화이다. 구스 반 산트는 시적인 우아함과 최면 같은 잔혹함으로 우리를 그 결정의 순간으로 데려다줄 것이다. 그날, 시간은 겹쳐지고 그 속에 갇혀버린 <엘리펀트>의 그 순간은 재현될 수 없는 시간이다. 재현되어서는 안 되는 시간이다. 재현하지 말아야 하는 시간이다. 재현이 필연적으로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수반한다면, 그 이데올로기야말로 이 영화에서 가장 무익한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그 시간이 어떻게 어긋나면서 운명적으로 아이들의 삶의 시간이 죽음의 시간으로 함께 합쳐졌는가 그저 표면으로 이야기한다. 복도에서 사진을 찍고 그 사진찍기를 방해하지 않으려 고개를 숙이고 뛰었던 존과 일라이와 미셸이 함께했던 그 순간이 다 다른 각도와 다 다른 마음의 풍경을 지녔던 것처럼. 그 순간을 잡기 위해 구스 반 산트는 완전히 다른 각도에서 무려 세번씩이나 셔터를 눌러내는 사진사의 고행을 기꺼이 선택한다. 그리하여 <엘리펀트>는 가장 우아한 손길로 폭력의 재현이라는 유혹을 밀어낸다. 그 정지의 순간까지, 아이들은 각자의 시간을 살았고 각자의 삶을 살았다.

관습을 깨고 그저, 아이들의 뒤를 따라가는 카메라

어떻게 보면 <엘리펀트>에서 구스 반 산트의 미학적 전략은 단 한 가지이다. 아이들의 뒤를 따라가본다. <아이다호>에서 리버 피닉스의 길을 쫓던 구스 반 산트의 카메라는 <엘리펀트>에서 다시 아이들의 뒤통수를 쫓는다. 그곳에서 학교를 중심으로 하는 관습적인 담론들은 깨지고 구스 반 산트는 아이들의 영혼이 서서히 증발되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으려 들며 그 흔적들을 뒤쫓아간다. <엘리펀트>에서는 수업장면이 단 한번 스치듯이 지나갈 뿐이다. 오히려 구스 반 산트가 신경쓰는 것은 교실이란 중심을 벗어난 모든 것. 맨 뒷자리에 앉아 있는 아이들과 저 멀리에서 들려오는 소리, 흐려진 배경이다. 그곳에서 학교 안과 밖은 모든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마음의 표지판이 된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학교 안에서는 늘 쉘로우 포커스로 찍히지만 학교 밖에만 나가면 저 멀리 있는 개미 새끼마저 드러나는 딥포커스 안에서 잡힌다. 결과적으로 모든 것이 투명하게 자신을 향해 열려 있는 것처럼 보였던 학교 밖의 아이들이 학교 문을 밀치고 들어오는 순간, 학교 안이란 그 공간에서 아이들은 세상에 자신 혼자 혹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은 자폐적인 공간 속으로 내던져진 듯 보인다. 그곳에서 복도란 교실이 아닌 끝나지 않는 터널 같은 곳이고, 식당은 도시의 광장처럼 드넓고 공허하다.

사실 끝없이 미끄러지는 트래킹 숏의 중심에는 아이들의 뒤통수만이 있는 것 같지만, 그 뒤편에 구스 반 산트는 숨은그림찾기처럼 여러 가지 해답들을 숨겨놓는다. 긴 체육복 바지를 한사코 입지 않겠다고 하는 미셸이 체육관에서 옷을 갈아입을 때, 그녀가 떠난 뒤에 남는 것은 옆친구의 미끈한 다리이다(자세히 보라. 흐린 배경을 뚫고). 마찬가지로 곧 살인을 저지를 예정인 소년 알렉스는 나치가 나오는 TV화면에 눈길을 주지만 구스 반 산트가 집중하려는 것은 나치가 아니라 TV화면의 윗부분, 흐려진 창문 뒤로 총기를 들고 오는 배달원의 모습이다. 기꺼이 십대 청소년들의 집 문 앞까지 친절하게 총을 배달해주는 사회. 그러나 <볼링 포 콜럼바인>과 달리 구스 반 산트는 그 흐린 배경 뒤에 부모도 지우고 선생도 지우고 무엇보다도 폭력의 논리를 지우개질한다. 마릴린 맨슨 때문에 아이들이 사이코 킬러가 됐다고? 그러나 당신은 토론 시간에 아이들이 하는 말을 듣지 못했는가? 동성애자가 되는 원인을 알아내면 동성애를 없앨 수 있을까?

필연의 선택 1.33:1 - 드러내기 보다 지워내기 위한 장치

그러한 면에서 <엘리펀트>의 화면비율이 1.33:1이라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다. 필연의 선택이다. 1950년대까지 업계 표준화면으로 쓰였고 지금은 고작 TV 화면비율로 폐기처분된 1.33:1. 차 앞좌석에서 뒷좌석조차 제대로 잡지 못하는 그 협소한 화면비율은 무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고안된 장치가 아니라 거꾸로 무언가를 지워내고 무언가를 보여주지 않기 위해 고안된 장치이기 때문이다. 정말로 영화의 제목처럼 구스 반 산트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 식으로 현실의 가장 작은 얼룩들을 가지고 영화 전체를 만들어나간다. 예를 들면 우리는 사진을 인화하는 일라이의 정성스런 손놀림을 볼 뿐이지만, 그 손은 그의 영혼과 곧바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친구들에게 왕따당한 뒤 식당에서 머리를 감싸쥐는 알렉스의 얼굴을 볼 뿐이지만, 그 순간 클로즈업되는 소음은 그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임을 들을 수 있다. 불쌍한 알렉스. 그리하여 당연히 알렉스가 교실에 있었을 때, 이 장면만은 학교 안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른 아이들과 정반대로 딥포커스 카메라에 잡힌다. 자신들의 세상에 감싸인 아이들과 달리 알렉스는 그러한 완충 공간이 없는 것이다. 그는 주변 사람들 하나하나를 다 의식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리하여 그 긴 터널 같은 학교란 공간에서 유의미한 대면관계란 마음 여린 존이 개와 어울릴 때나 네이던이 끈적끈적한 계집아이들의 시선을 받을 때뿐이다. 아이들은 오직 그 짧은 대면관계 때만 슬로모션으로 뒤 돌아본다. 그외에 남는 것은 소음과 적막. 텅 빈 공간들. 몸매와 쇼핑 외에는 아무것도 안중에 없는 소녀들은 텅 빈 화장실에서 먹은 것을 게워내고 아버지가 술주정뱅이인 소년은 텅 빈 교실에서 혼자 운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소녀는 텅 빈 체육관에 혼자 내버려져 있다. 그리하여 알렉스와 에릭의 전쟁놀이는 이 지점에서 컴퓨터 오락과 궤를 달리한다. 두 소년이 죽인 것은 자신을 왕따시킨 재수없는 아이들의 과거였지만, 거꾸로 그들이 죽인 것은 자신처럼 외롭고 혼자 훌쩍이는 아이들의 미래였다. 지금은 한곳에 모여 있지만 다 달라질 수도 있었던 미래.

우리는 그들을 잊지 않을 수 있다

의심할 바 없이 <엘리펀트>는 칸이 간만에 제대로 선택한 구스 반 산트의 최고 걸작이다. 칸은 타르코프스키의 <향수> 대신 거대한 이과수 폭포 외에는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았던 <미션> 같은 머저리 작품에 대상을 주기도 하지만, 아주 가끔은 올바른 선택을 하기도 한다. 내가 말하려는 건 윤리적인 측면이 아니라 미학적인 측면에서도 <엘리펀트>는 시적이며 동시에 잔혹한 진실을 배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영화가 유럽 작가주의를 따라했다는 오해는 정말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카메라가 막 사랑에 빠진 네이던의 뒤를 쫓을 때 카메라는 영화에서 가장 긴 롱테이크로 그의 뒤를 쫓아간다. 베토벤의 <월광>을 뒤로 하고서 그 긴 테이크를 함께 따라갈 때만 비로소 우리는 네이던이 그토록 도달하기 원했던 지점이 바로 사랑하는 여자 곁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영화는 이들 사랑하는 두 연인이 알렉스의 총구 앞에서 바들바들 떠는 그 시간에 정지되며 끝난다. 그 뒷모습을 통해서야만, 비로소 우리는 그때 그날 컬럼바인에서 죽어간 아이들을 TV 속의 정지된 사진 한장에 갇힌 이미지로 접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미지를 뚫고 그들의 심장소리에 우리의 심장소리를 겹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 사회의 폭력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낄 때 구스 반 산트는 적어도 우리가 그들을 오래 지켜볼 순 있다고 잊지 않을 수 있다고 부드럽게 일깨워준다.

그리하여 하늘. 아이들의 목소리와 바람소리가 함께 휩쓸려간 하늘. 그 푸른 하늘에는 이윽고 정적만이 감돈다. 그것은 있으면서 동시에 없는 세계. 사실 아무도 본 적 없는 거대한 코끼리는 알렉스의 방에 스케치된 채로 얌전히 네모의 흰 종이 안에 붙박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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