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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벌과 함께 오른 스산한 여행길, <비키퍼>

꿀벌들과 함께 스산한 여행길에 오른 남자, 길에서 소녀를 만나 과거와 현재를 한손에 붙잡으려 발버둥친다.

영화는 쏟아지는 비의 시선에서 시작된다. 수직에 가까운 부감이 비와 평행을 이루며 마당을 내려다본다. 의자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고 탁자 위에는 고운 꽃들이 흐트러져 있다. 파티가 열린 뒤끝의 정취다. 그 위로 벌들의 짝짓기, 좀더 정확히는 여왕벌의 짝짓기에 대한 내레이션이 비처럼 뿌려진다. 숫놈들이 떼를 지어 날고 있는 무더기 속으로 여왕벌이 다가가 하나를 선택한다는. 파티는 끝난 게 아니었다. 결혼식은 갑자기 퍼붓는 비 때문에 실내로 자리를 옮겨 계속되는 듯하다. 신부의 아버지인 스피로(마르첼로 마스트로이안니)는 사진 촬영을 재촉하는 말에 마지못해 딸의 뒤쪽에 서지만 고개를 반쯤 떨군 채 셔터 소리를 듣는다. 스피로에게서 한발 떨어져 선 아내의 표정도 못내 불안하다. 화사한 축복으로 가득 차야 할 결혼식이 싸늘하게 쏟아지는 비와 불안정하게 떨리는 인물들로 메워져 있는 게 빛나는 햇빛과 곱디고운 지중해를 가진 그리스를 자욱한 안개와 추적추적한 비, 짙은 회색의 인물로 채색한 앙겔로풀로스의 서문답다. 빠질 수 없는 또 한 가지가 여행이다. 어여쁜 신부가 떠나가고, 늙은 아내가 작별인사를 하며, 마침내 한없이 쓸쓸한 표정의 스피로가 홀로 길을 떠난다. 앙겔로풀로스의 영화가 늘 그렇듯 사연의 본론은 길을 떠나서야 조금씩 드러난다. 행선지는 알 수 없으나, 지나온 삶과 역사의 흔적을 정리하려 하거나 구원의 가능성을 탐색해보려는 목적은 늘 같다. 기억을 더듬는 여행으로 현재를 되새기려는 방식도 다름이 없다. 스피로는 딸의 결혼을 축복할 수 없을 만큼 불구가 된, 혹은 짙은 회의에 빠진 영혼을 이끌고 길을 떠난다. 그것이 치유를 위한 새로운 시작인지, 폐기를 위한 수순인지는 그와 함께 좀더 가봐야 한다.

<비키퍼>(‘꿀벌치기’라는 뜻)는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침묵 3부작 중에서 ‘사랑’을 테마로 한 작품이다. 이미 8년 전에 국내개봉됐던 <안개 속의 풍경>이 ‘신의 침묵’을, <시테라 섬으로의 여행>이 ‘역사의 침묵’을 그리며 3부작을 이루고 있다. 이 가운데 <비키퍼>는 “역사적 서사에 천착해오던 앙겔로풀로스에게 전환점이 된 작품”(<르몽드>)이라는 평가에 걸맞게 앙겔로풀로스의 영화치고는 대단히 대중적이며 예상가능한 이야기의 굴곡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녹록지는 않다. 스피로의 여왕벌이 된, 히치하이커 소녀(나디아 무루지)는 “추억아저씨, 날 봐요. 난 아무 추억도 없어요”라고 그에게 내뱉는다. 그것이 사랑에 관한 것이든 역사의 정열에 관한 것이든 서글픈 추억의 자장에 관심이 없다면, 스피로의 외로운 여행에 동참하기란 쉽지 않을 터이니. 스피로와 히치하이커 소녀의 만남과 헤어짐처럼. 더구나 풍경 그 자체가 캐릭터일 만큼 인물과 이야기 바깥에 표정과 내면을 심어놓는 앙겔로풀로스의 시심(詩心)이 이번이라고 만만할 리 없다. 물론 그의 야심은, 늘 그렇듯, 깊고 멋지다.

벌통을 잔뜩 싣고 선생에서 꿀벌치기로 돌아간 스피로의 트럭에 냉큼 올라탄 소녀를 그는 무심하게 보내려했다. 그러나 초라한 휴게소의 주크박스 앞에서 보란 듯 에너지를 발산하는 소녀에게, 군부가 강탈한 조국 그리스의 현실처럼 젊은 병사를 자신의 침실로 끌어들여 옆자리에서 끈적한 정사를 벌이는 소녀에게 사로잡히고 만다. 저항도 해본다. 먼 도시에 사는 아내를 찾아가 키스 세례를 퍼부어보지만 이들의 식은 입술은 더워지지 않는다. 옛 친구를 찾아가보지만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역사의 뒤꽁무니를 좇던” 혁명가는 죽음 직전의 환자가 됐고, 돈을 좇던 또 다른 친구는 최고급 포도주를 안겨주지만 차가운 바다에 저 혼자 뜨거워진 몸을 즐길 뿐이다. 스피로는 소녀를 안을 수밖에 없다.

하필 그는 소녀를 폐관 직전의 낡은 극장으로 데리고 간다. 흰 스크린 앞에서 소녀는 나신이 되어 스피로를 안는다. 마치 연극 무대의 한 장면처럼 격정을 나눈 이들은 그제야 서로에게서 희망을 봤을까. 아마 소녀는 스피로만큼의 나이가 되어서야 그게 희망이었다고 추억할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스피로에게는 더이상 무거운 추억이 필요없다. <비키퍼>는 분명한 결말로 끝나지만 그 매듭이 영화의 전부가 될 수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순간순간의 장면이 영화의 전부가 되는 것, 그게 앙겔로풀로스의 어김없는 매력이다.

:: 테오 앙겔로풀로스 감독의 관객과의 대화

“난 슬프고 고립된 풍경에서 일종의 빛을 발견한다.”

처음으로 내한한 테오 앙겔로풀로스 감독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그는 부산영화제에 이어 10월18일 특별전이 열리고 있는 씨네큐브를 찾아 관객과의 대화를 가졌다. 어떤 질문이든 곧바로 유장한 답변을 꺼내놓는 대가에게 박수가 끊이지 않았다.(별도로 가진 자세한 인터뷰는 96쪽 참조)

최근 장 마리 스트라우브와 다니엘 위예, 타비아니 형제의 회고전이 열렸다. 이들은 당신과 더불어 유럽의 거장으로 거론되는 것에 불만이 많던데

지리적 관점에서라면 난 그리스 감독이고 타비아니는 이탈리아 감독이라는 점에서 각 지역을 대표할 수 있다고도 하겠지만 영화적 관점에서 보면 어떤 감독이 한 지역을 대표할 수는 없다. 각자의 감독은 자기 나라나 영화 자체를 대표할 뿐이다. 영화 자체가 좋거나 나쁘거나 할 뿐 아니겠나.

대사가 점점 사라지는 것 같다.

대사뿐 아니라 배우의 시선, 음악, 색채, 장소 등의 요소들이 모두 영화의 말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한다. 암묵적인 것의 총합으로 대사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 군부독재 시절에 실제 있었던 사실에 기반해 군부독재에 대해 말하는 영화를 만든 적이 있다. 영화를 만들기 위해 대사를 마치 공기 속에서 말해지는 것으로 표현해야 했다. 실제 대사는 아무 의미도 없는 것으로 해야 했고. 당시 수백명의 학생과 관객과의 대화를 가졌는데 그 뒤에는 수십명의 경찰이 지켜보고 있었다. 어떤 학생이 한 신을 예로 들면서 ‘우리가 이해한 것을 얘기하려고 한 거죠?’라고 하기에 ‘예, 그게 제가 말하려고 했던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런 식으로 대화를 나눴는데 실제 대사 이상의 효과를 봤다.

<비키퍼>의 러브신에서 남자는 왜 옷을 전혀 벗지 않나, 여자는 올 누드인데.

세대간의 차이가 있다. 남자는 상대적으로 자기만의 시간을 가진 세대이고 여자는 절대적인 자유를 가진 세대다. 또 남자가 아직 부인을 사랑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발칸반도는 우리처럼 역사적으로 비슷한 고난의 체험을 갖고 있는데, 발칸반도의 풍경에서 어떤 걸 끄집어내고 싶었나.

그리스에는 오래된 신전과 폐허가 된 신화적 공간이 있다. 난 안개, 비 등 슬프고 고립된 풍경에서 일종의 빛을 발견한다.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자꾸 나오는 이유는.

우리 주변을 볼 때 역사나 정치와 가족간의 관계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역사를 감추는 경향이 있는데 그래서는 미래에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나의 가족은 역사 속에서 많은 고통을 겪으며 함께해왔다. 내전 당시 사촌이 아버지를 체포해간 적이 있다. 히로시마에서 만난 한 한국인이 <유랑극단>을 보고 ‘나와 나의 가족, 나의 조국에 대한 영화’라고 말했던 게 생각난다.

영화 대부분에서 어디론가 여행을 간다.

여행은 내가 세상을 알기 위해 취하는 방식이다. 집이란 곳은 자기 자신, 세상과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선호되는 곳이나 나는 어느 곳에서도 편안함을 느끼지 못한다. 차 안에서 스쳐가는 창밖의 풍경을 볼 수 있는 그때가 가장 편안하다.

원신 원컷을 고집하는 이유는.

문학에서처럼 문체의 일종이다. 여러 시도 끝에 가지게 된 나의 문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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