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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은하의 애버뉴C] 19th street / 완전범죄를 꿈꾸며 에스컬레이터에 오르다
글·사진 백은하( <매거진t> 편집장) 2005-03-26

하루 종일 멀티플렉스에서 놀기

사람들은 저마다 아주 사소한, 그러나 강렬한 욕망들이 있다. 내 가장 친한 친구의 꿈은 ‘천방지축 말괄량이 삐삐처럼 영화를 볼 때, 버스를 탈 때 앞자리에 다리를 턱 하니 올리는 것’이라고 한다. 그게 뭐라고. 쌀이 나오는 것도, 베이글이 나오는 것도 아닐 텐데. 그런데 사실 우리는 그런 부질없는 것들을 욕망한다. 특히 내게 금지된 사소한 어떤 것들을. 영화관람에 대한 나의 사소한(!) 희망이라면, 일단 표 한 장만 끊으면 멀티플렉스 내에서 상영 중인 모든 영화를 내 맘대로, 보고 싶은 대로 다 보는 것이었다. 매표소에서 뭘 볼까 고민하지 않고 ‘오늘의 표’만 구입하면 끝나는 그런 표. 능력 되시는 분들은 양껏 보시고, 소화기관이 약하신 분들은 한 편만 보는 그런 뷔페같은 관람시스템에 대한 갈망.

처음 이 곳 멀티플렉스에서 영화를 보았을 때는 상영 중간에 부스럭 부스럭 들어오는 사람들이 관람시간에 늦은 관객들인 줄만 알았다. 그러니 하루 이틀, 극장 출입이 잦아지면서 발견한 것은 바로 그들이 바로 전에 끝난 다른 영화를 보고 들어선 ‘공짜관객’들이라는 사실이었다. 한국처럼 각 관마다 철저한 매표 시스템으로 관리되는 곳에서는, 나처럼 간이 콩알만한 사람은 한번도 시도 해볼 생각도 안 했던 일. 그들은 바로 ‘멀티플렉스에서 하루 종일 놀기’를 실행 중이었던 무리였다. 이곳은 일단 표만 끊고 들어 오고 나면 관객들이 어디로 가는지, 뭘 하는지 도통 직원들이 신경을 안 쓰기 때문에, 게다가 이 거대한 사회에서 ‘노바디(nobody)’ 인 나 같은 사람들은 금방 지나가다 봐도 다시 보면 ‘누구세요?’ 할 정도다.

요즘엔 한국의 관람료도 많이 비싸졌지만, 그래도 각종 할인카드면 그나마 싼 가격으로 영화를 볼 수 있는데 여기는 대부분이 10달러 넘는 돈을 지불해야 영화 한 편을 본다. (그나마 일본보다는 싼 편이다) 게다가 평일 낮 텅텅 빈 극장을, 앞 좌석에 발을 올리든, 극장 안에서 트위스트를 추든 아무도 모를 그런 한산한 극장을 몇 번 목격하고 나면 서서히 이 범죄행위에 대한 죄책감이란 스르륵 사라지고 만다. 게다가 날씨가 추워서 젠장,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날이라면, 혹은 비가 와서 마음이 꿀꿀한 차에 도대체 뭘 해야 이 기분이 풀릴지 모르는 날이라면, 이 놀이는 따라갈 테마파크를 찾아 볼 수 없는 가장 저렴한 최적의 선택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한 두 번 범죄의 꿀맛을 보면 점점 수법이 대범하고 치밀해져서 일단 인터넷으로 극장의 하루 스케줄을 체크한 후 꼼꼼히 관람순서까지 정하는 수준에 이른다.

이를테면 “11시, 일단 우디 알렌 신작 <멜린다 그리고 멜린다>로 상큼하게 시작하자. 그리고 바로 옆에서 하고 있는 브루스 윌리스가 친딸하고 같이 출연한다는 <호스티지> 관에 들어 갔다가 별로 다 싶으면 2시에 시작하는 <링2> 상영관으로 잠입하자. 음, 이제 머리가 아플 테니까 준비해간 도시락을 까먹고 기분 좋게 머리를 식힐 겸 애니메이션 <로봇>이나 봐야겠다? 음 마지막은 무슨 영화로 끝내야 잘 봤다고 소문이 날까? 준비 완료. 하루 종일 죽쳐도 갈증 없을 물 한 병과 샌드위치도 잘 챙겼겠다. 자! 호흡을 가다듬고 출발!’

매표소 앞. 저 아저씨는 한동안 저렇게 우뚝 서서 도대체 무슨 영화를 봐야 하는 것일까, 너무 오랫동안 고민하고 있었다. 사실 저기 저 자리에 똑같은 마음으로 한 두 번 서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동병상련, 측은지심. 마음 같아서는 슬며시 다가가 “아저씨, 근심을 묻어두고 다 함께 차차… 아니 묻지마 멀티플렉스 관광길에 함께 오르실래요?”라고 여쭙고 싶었지만 자고로 이런 사소한 범죄일수록 신뢰할 사람이 아니면 공모는 위험 한 법. 결국 오늘도 ‘완전 범죄’를 꿈꾸며 홀로 에스컬레이터에 오른다.

극장 내에서도 순발력 있는 선택이 필요하다. ‘강약 중간약’같은 리듬이 필요하달까. 가령 기대했던 <브리짓 존스2>를 보고 허탈한 기분이 들 때면 <파인딩 네버랜드>쯤 은 봐줘야 되는 법이고, <클로저>의 복잡한 연애사에 숨이 가빠온다면 ‘토니 소프라노스 아저씨’ 제임스 겐돌피니와 ‘인터치’같은 연예잡지에서 말고는 더 이상 실감나는 연기를 보여주지 않는 벤 에플렉이 어떻게 ‘크리스마스에서 생존하는가’ 하는 허허실실한 영화를 1시간이 넘게 보아야 자고로 소화가 되기 마련이다. <아무도 모른다>를 보고 세상에 대한 무력함에 우울한 기분을 떨칠 수 없다면 근육질 쾌남아 빈 디젤이 네 아이의 보모가 된 첩보원을 연기하는, ‘투 썸즈 다운’ 성 영화도 봐주는 것이 정신건강상 좋은 것이다.

그러나 이런 덤으로 먹는 포식이 늘 좋기만 한 건 아니다. 사실 지난 겨울 웨스 앤더슨의 <라이프 아쿠아틱>과 <밀리언 달러 베이비>를 동시에 보았던 날에는 그 좋은 영화의 감동을 온전히 하나씩 누리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그 디테일들을 하나하나 꺼내고 천천히 되새김질 하는 시간을 가지지 못한 것을 자책하며 공짜에 눈먼 스스로의 머리를 뜯었다.

나는 가끔 말도 안 되는 농담들을 가슴 깊숙한 곳에서는 진짜처럼 믿어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그 중에 공짜 좋아하면 대머리가 된다는 말이 요즘 좀 무섭다. 하루 종일 10.5불로 가능한 멀티플렉스 여행을 끝내고 극장 문을 나서는 날이면, 어쩐지 모발약을 사느라 내 남은 인생을 낭비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호환마마보다 더 무섭게 엄습해오곤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