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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넘어서는 기적의 순간, <아무도 모른다>

정확한 거리두기가 성취한 영화미학 <아무도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는 1988년 일본에서 발생했던 ‘나시 스가모의 버림받은 4남매 사건’을 실화적 모태로 하는 영화이다. 한 엄마와 각기 다른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4명의 아이들, 출생신고가 되어 있지 않아 공식적으로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아이들. 그나마 어렵게 마련한 전셋집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큰아이를 제외한 나머지 세 아이는 말 그대로 그곳에 없는 아이들이 되어야 한다. 어느 날 엄마는 새로운 사랑을 위해 그 아이들을 떠나버리고, 아이들은 끝내 비극적 사고가 일어나기 전까지 6개월 동안 아무도 모르는 그들만의 삶을 살아낸다. 그곳에 있지만 그곳에 없었던 아이들의 유령 같은 삶. 이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실화는, 한동안 일본 열도를 떠들썩하게 했다고 한다. 아마도 그 떠들썩함 속에는, 버려진 아이들에 대한 연민, 아이를 버린 무책임한 어미에 대한 분노, 결국 그 어미와 함께 아이들을 방치한 공범이 되어버린 사회-어른들 자신의 부채의식, 이 모든 감정들이 뒤섞여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던 대도시의 익명적 삶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 또는 반성이 있었을 법도 하다.

그러나 그 사건 이후 15년 만에 세상에 나온 영화 <아무도 모른다>는 이 모든 소란에서 한 걸음 비켜서 있다. <아무도 모른다>는 그 아이들의 삶이 생각만큼 온기없는 유령 같은 삶은 아니었음을 보여줄 만큼 충분히 사실적이지만, 또한 아이들에 대한 연민과 공감이 그 어미에 대한 섣부른 도덕적 분노와 단죄로 변질되게 하지 않을 만큼은 충분히 허구적이기도 하다.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결코 이 영화가 ‘재현 드라마’가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 사건을 모태로 하고는 있지만, 세부적인 디테일은 1년간 배우인 아이들과 함께 발견하고 창조해낸 것임을 힘주어 말한다. 사실, 그 단호함은 현실과 영화에 대한 감독 자신의 조심스럽고 근본적인 윤리적 질문의 다른 표현이기도 할 것이다. 대상에 대한 연민은, 특히 그것이 폭발적이고 집단적인 것일 때, 쉽사리 그 대상을 영원히 타자화시킬 위험에 빠진다. 터무니없는 일로 인한 충격과 분노는, 특히 그것이 폭발적이고 집단적인 것일 때, 도덕적 단죄라는 폭력이 되어 자신이 담지하고 있는 윤리적 힘을 소진시켜버린다. 문제는 연민과 분노라는 감정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쉽사리 출구를 찾아 스스로를 해소하려고 하는 그 완강한 관성 또는 자동운동 속에 있다. 그것을 막는 또는 그 힘에 저항하는 유일한 길은, 그것을 끊임없는 삶에 대한 탐색과 윤리적 질문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실제로 수행하는 일은 생각만큼 쉬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외줄타기와도 같이, 고도의 균형감각과 끊임없는 긴장을 요구하는 일이다. 영화 <아무도 모른다>가 많은 ‘버려진 아이들’에 대한 영화와 구별된다면, 그래서 우리에게 새로운 감동을 준다면, 그것은 이 영화가 바로 그 쉽지 않은 일을 해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큐와 픽션, 선과 악 사이의 아슬아슬한 균형잡기

영화 <아무도 모른다>에는 시종일관 미묘한 긴장이 흐른다. 그것은 카메라와 대상 사이에 존재하는 팽팽한 공간적인 거리 감각이 낳는 긴장이기도 하고, 촬영과 편집 사이에 존재하는 이질적인 시간적 리듬의 공존에서 비롯되는 긴장이기도 하다. 카메라는 대상을 향해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지만, 끝내 그 인력에 함몰되지 않는다. 카메라는 무한한 인내심으로 대상의 진실이 드러나기를 기다리지만, 일단 포착된 대상의 진실은 과잉에 이르기 이전에 냉정하게 편집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카메라와 편집 리듬에는, 대상을 향한 자연스러운 인력과 대상으로부터의 의식적인 척력 사이에 존재하는 팽팽한 물리적 긴장이 실려 있다. 그 물리적 긴장은 감독 자신의 윤리적 질문의 필연적인 결과일 것이다. <아무도 모른다>는 두 가지 의미에서 다수화된 ‘이분법’에 질문하고 도전하는 영화이고, 그 이분법의 경계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고 있는 영화이다. 영화는 순수한 아이들과 오염된 어른들이라는 선악의 이분법을 넘어서고자 하고, 그것을 위해서 사실과 허구, 다큐와 픽션 사이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한 균형을 잡고 있다.

아무도 모르는 아이들이 만든 유사 가족 생활담

<아무도 모른다>는 아이들의 그 6개월을 고난과 참상으로 재현하려 하기보다는, 그 6개월을 살아낼 수 있었던 아이들의 삶의 의지와 생의 감각을 포착하고 그것과 하나가 되려고 한다. 아이들을 트렁크에 넣어 옮겨야만 하는 삶의 절박함은, 유키(시미지 모모코)의 천진난만한 질문(“여기는 몇층이야?”)과 시게루(기무라 히헤이)의 천진난만한 미소로 스릴 넘치는 비밀 작전, 즉 유희가 된다. 비밀 작전의 무사한 성공을 자축하는 저녁식사 자리에서 아이들보다 더 아이 같은 철없는 엄마가 제시하는 터무니없는 의무의 법칙은, 아이들의 웃음과 함께 게임의 규칙이 된다. 무엇보다 아이들은 엄마가 사라진 뒤에도 막연한 기다림 속에서 삶을 낭비하지 않는다. 엄마보다 더 어른스러운 아이였던 장남 아키라(야기라 유야)는 이미 아빠이고, 이사한 집에서 제일 먼저 세탁기가 놓인 곳을 확인하는 장녀 교코(기타우라 아유)는 이미 엄마이며, 시게루와 유키는 아빠 엄마의 사정을 충분히 헤아려 보채거나 칭얼대지 않는 착한 아이들이다. 이 자발적인 유사 가족은, 위기의 순간을 삶의 영역을 확장하는 계기로 만드는 놀라운 생명력을 보여준다.

생활비(식비)의 고갈을 새로운 연대(먹을 것을 챙겨주는 편의점 직원)의 기회로 삼고, 단수로 인한 고통을 공원으로의 진출 기회로 삼는다. 엄마와 함께 금지의 규칙은 사라졌다. 공원과 거리로 자신들의 삶의 영역을 확장한 아이들은, 그곳에서 새로운 친구(사키-간 하나에)를 사귀고, 그곳에서 발견한 새로운 생명의 싹에 감응하며, 그것을 데려다가 소중하게 키운다. 시게루는 자판기와 공중전화에서 동전을 모으는 생활의 지혜를 터득한다. 그리고 그 6개월 동안 아이들은, 자신들이 키우는 화분 속의 식물처럼, 실제로 자라난다. 13살이 된 아키라는 변성기가 시작되고, 5살이 된 유키는 이제 예전의 작은 트렁크에는 들어가지 않을 만큼 그렇게 자랐다. 물론 그 생명력과 성장력은 축복이라기보다는 비극이다.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버린 아키라의 고집(아키라는 이미 성을 바꾸어버린 엄마에게 더이상 도움을 호소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들을 뿔뿔이 흩어놓을 것이 분명한 사회에도 도움을 청할 생각이 없다)은 우리를 안타깝게 한다. 너무나 빨리 자라버린 유키의 싸늘해진 몸은 한순간 우리의 머리를 텅 비게 만드는 충격이 된다. 유키의 죽음을 확인한 뒤 거리로 나간 아키라의 눈에 세상은 더이상 현실감을 갖지 않는 공허가 되고, 그 초현실적 공허감은 우리의 오감을 얼어붙게 한다. 아키라의 발걸음은 자동반사적으로 그를 경찰서 앞으로 이끌지만, 그는 끝내 돌아선다. 유키에게 모노레일을 타고 가서 비행기를 보여주겠다고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그 순간 아키라는 아이와 어른의 경계를 훌쩍 넘어서 있으며, 그리하여 세상의 상식을 향하여 무기력하지만 끈질긴 질문을 던진다.

아이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에 대한 탐색

어쩌면 이 영화가 그 제목을 통해 말하려 했던 것은, 아이들의 존재와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아무도 몰랐던’ 어른-사회의 무책임에 대한 반성의 촉구 같은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정작 아무도 몰랐던 것 그리고 지금까지도 아무도 잘 모르고 있는 것은, 그 아이들이 보여준 놀라운 삶에의 의지와 삶의 감각(감독은 그것을 “삶의 리얼리티를 느낄 수 있는 육체적인 기억”이라고 표현한다)일 것이라고, 영화는 말한다. 영화는 그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가 아니라, 그들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느꼈었는가를 질문하고 탐색한다. 마치 <말아톤>이 초원이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도덕적 다그침이 아니라, 초원이가 바라보는 세상과 삶의 감각이 무엇인가를 포착함으로써 새로워질 수 있었던 것처럼, 그렇게 <아무도 모른다>는 새로운 영화가 된다. 그것은 영화가 영화를 넘어서는 놀라운 기적의 순간들이다.

그때 영화는 사실과 허구, 다큐와 픽션의 경계를 넘어선 화법으로, 쉽게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재단해낼 수 없는 삶의 진실에 이야기한다. 도덕적 폭력이 되지 않아야 할, 그저 끊임없는 새로운 윤리적 질문의 출발점이기만 해야 할 연민과 분노만을 낮고 조용히, 그러나 끈질기게 환기시킨다. 고레에다 감독의 전작 <원더풀 라이프>(1999)에는, 또 하나의 아이-소녀가 등장한다. 기억하고 싶은 삶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으로 습관적으로 디즈니랜드를 떠올렸던 소녀는, 그것이 이미 많은 아이들의 것이었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것이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일 수 없음을 느낀다. 그 소녀가 대신 찾아낸 가장 행복했던 기억은 “무릎에 누이고 귀를 파주던 엄마의 살냄새”였다. 상식적이고 자동화된 우리의 반응에 대한 새로운 윤리적 질문은 이렇듯 늘 새로운 삶의 감각과 함께 비로소 작동한다. <아무도 모른다>는 그 새로운 윤리적 질문, 새로운 삶의 감각으로 충만해 있는, 아름답고 새로운 영화이다. 다음과 같은 고레에다 감독의 진심어린 연출의 변은, 그 새로움을 찾는 모든 감독들이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자 다짐일 것이다. “소년의 옆에서 어깨를 다독여주고자 했다. 안아주는 건 안 된다… 나도 카메라도 거리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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