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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단점을 덮어주는 문근영의 힘, <댄서의 순정>
이다혜 2005-04-26

소녀와 여인의 경계에 선 문근영의 매력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춤은, 보너스다.

댄스스포츠와 사교춤의 구분이 아직까지 모호한 한국에서, 춤을 추는 사람들에 대한 영화는 거의 시도되지 않았던 분야다. 지난해 개봉했던 <바람의 전설>은 댄스스포츠와 사교춤에 대한 인식의 경계가 얼마나 얇은가를 보여주었다(내가 하면 예술, 남이 하면 바람). 하지만 댄스스포츠에 국가대표 여동생 문근영과 뮤지컬 배우 박건형을 접합시킴으로써 <댄서의 순정>은 댄스스포츠에 대해 사람들이 갖고 있는 느끼함의 편견을 털어내는 데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최고의 댄스스포츠 선수였던 영새(박건형)는 사랑했던 여인을 라이벌 현수(윤찬)에게 빼앗기고 경기 중에 현수 일당에게 다리를 짓밟힌 뒤 폐인처럼 살고 있다. 옌볜에서 댄스선수권대회 우승자였던 여자 선수와 새로 파트너를 해 재기를 노리려고 하는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은 채린(문근영). 열아홉살의 채린은 춤에 대해 문외한이나 마찬가지. 우여곡절 끝에 채린은 영새에게서 춤을 배우기 시작하지만, 선수권대회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의 강행군은 힘들기만 하다. 채린의 한국 체류 자격을 갖추기 위해 채린과 영새는 위장결혼을 하고, 두 사람은 춤뿐 아니라 서로에 대한 애정 역시 발전시켜간다. 영새가 잊지 못하는 전 파트너 세영이 고난이도 기술인 알레그로(발레의 공중회전에 퀵스텝을 적용시킨 기술)를 추었다는 말을 들은 채린은 연습에 매진한다. 하지만 채린의 실력이 향상되자, 영새의 라이벌인 현수가 그들 앞에 나타난다.

문근영의 힘은 어디까지일까. 로맨틱코미디와 멜로, 신파 사이에서 어정쩡한 줄타기를 하는 <댄서의 순정>이 빛을 발하는 걸 보면 문근영의 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옌볜 사투리를 그럴듯하게 구사하는 초반, “아즈바이”를 연발하며 영새를 바라보는 채린의 순진한 눈매가 구타나 가혹한 현실의 뭇매를 맞는 장면은 보기 괴롭다. 언니인 척하고 들어온데다가 춤을 못 춘다는 사실을 안 영새의 선배 상두는 채린을 술집에 넘긴다. 이때 채린이 술집에서 술을 따르고 장단을 맞추지 못해 구박당하는 장면이 삭제된 것도 현실적인 설정과 관계없이 문근영의 동화적 판타지를 살려주려는 의도다.

영화의 백미는 로맨틱코미디적 요소가 강한 중반부. 채린이 춤을 배우는 속도가 빨라지고 채린과 영새 사이의 감정도 애정쪽으로 서서히 기울면서이다. 위장결혼을 출입국관리소 직원이나 경찰에 해명할 경우를 대비해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의 상황을 상상해 지어내며 춤을 추는 장면이 바로 그것. 이때 상상 속의 코믹한 거짓말 장면과 능숙하게 스텝을 밟는 두 사람의 춤장면이 교차편집으로 이어지는데, 상상 속 관광가이드인 채린과 관광셔틀 운전사 영새의 모습은 만화적인 웃음을 안겨준다.

영화에 웃음을 불어넣는 다른 요소는 이대연과 김지영. 채린, 영새 커플의 위장결혼을 밝히겠다는 일념으로 두 사람 뒤를 쫓는 어벙한 이 투캅스는, 기이한 집요함과 실수남발로 영화 곳곳에 코미디적 요소로 자리잡고 있다. 문제는, 영화가 후반부로 가면서 멜로, 신파적 요소가 강화되자 이 두 사람을 처치할 방도가 애매해졌다는 것이다. 망원경까지 가져다놓고 스토커에 가까운 수사방식을 보이던 두 사람은 그래서 영화 후반부에 아예 종적을 감춰버린다. 이 두 사람뿐 아니라 조연들을 영화 속에 끌어들이는 방식에서도 아쉬움이 남는다. 영새의 라이벌인 현수는 누가 봐도 나쁜 평면적 악당이며, <개그콘서트>에서 댄서 김 캐릭터로 알려진 김기수는 채린과 영새 사이에 문제가 생기면 마치 해결사라도 되는 양 나타나 영새의 과거에 대해 설명을 덧붙이고 두 사람의 시선을 이어준다. 주변 인물들의 춤과 인생에 얽힌 이야기는 그래서 <댄서의 순정>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또 한 가지 아쉬운 점. <토요일 밤의 열기>로 뮤지컬계의 스타덤에 오른 박건형이 극중에서 다리 부상을 당하는 것으로 나오기 때문에 기대했던 것보다 그의 춤을 많이 볼 수 없다. 춤영화의 클라이맥스는 남녀 주인공이 고난이도의 동작을 성공시키며 춤을 추는 것인데, 그 대목이 악당의 방해로 변형되어버렸으니 안타까울 수밖에. 이로써 영화의 스포트라이트는 문근영에게 집중되는데, 다행히도 그 전략은 성공을 거둔다. 소녀에서 여인으로 가는 중간 지점에서 문근영은, 하이힐과 노출이 심한 화려한 의상, 그리고 정열적인 춤을 소화하면서도 순수함을 잃지 않는다. 반딧불이의 사랑 이야기를 하면서 관객의 분노나 짜증을 가장 덜 불러일으킬 배우가 단 한 사람 있다면 아마 문근영일 것이다.

박영훈 감독은 <301·302> <산부인과> 등의 작품에서 조감독으로 있었고, 2002년 개봉한 이병헌, 이미연 주연의 <중독>으로 데뷔했다. 그가 <중독>에서 사랑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해 묻느라 캐릭터의 생생함을 충분히 살리지 못했다면, <댄서의 순정>에서는 이야기의 구조보다 캐릭터에, 특히 문근영에 너무 치우쳐 있다. 하지만 <댄서의 순정>의 가장 큰 힘이 문근영이라는 그의 판단도 이해못할 바는 아니다. 사랑에 대한 판타지를 가진 여성 관객이나, 문근영의 미소만으로 힘을 얻는 남성 관객이나 <댄서의 순정>에서 즐거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춤바람 난 영화들

<더티 댄싱> & <댄싱 히어로>

<더티 댄싱>

<댄싱 히어로>

남자는 한때 전설적인 댄서였다. 여자는 춤을 출 줄 모른다. 그 두 사람이 함께 춤을 춰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남자는 여자에게 춤을 가르치기 시작하는데, 여자의 춤이 능숙해질 무렵, 남자는 사랑을 배우게 된다. 두 사람은 고난이도의 춤을 멋지게 소화하고, 대회에서 우승을 거두며, 사랑을 성취한다. <더티 댄싱> <댄싱 히어로>는 <댄서의 순정>과 비슷한 골격의 이야기들이다. 결정적 대목에서 <댄서의 순정>은 앞서 말한 두 영화와 약간 다른 길을 가지만, 춤을 소재로 남녀의 로맨스를 엮어 화려하고 가슴 짠한 피날레를 이끌어내는 것은 비슷하다.

<더티 댄싱>은 무명이었던 패트릭 스웨이지와 제니퍼 그레이를 단숨에 스타덤에 올려놓은 영화. 60년대 초반 청춘 남녀들의 ‘휴양지에서 생긴 일’을 그린 이 영화는 끈적한 춤동작만으로 세계적인 인기를 모은 것은 아니었다. 60년대의 음악이 빼곡하게 들어찬 <더티 댄싱>에는 성장통을 겪는 소녀의 이야기가 녹아 있다. <로미오와 줄리엣> <물랑루즈>를 만든 바즈 루어만 감독의 데뷔작 <댄싱 히어로>는 댄스영화를 좋아하는 팬들 사이에선 잘 알려져 있는 숨은 걸작. 호주에서 92년에 만들어진 이 영화는 바즈 루어만의 할리우드 입성이 있게 한 영화다. 루어만의 할리우드영화들에 비교하면 조악해 보이는 구석이 있긴 하지만, 유머와 로맨스를 조합해 드라마를 만드는 루어만의 원숙한 솜씨가 돋보인다.

<더티 댄싱>이나 <댄싱 히어로>의 흥미로운 공통점 한 가지. 두 영화 모두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을 그린다. <더티 댄싱>에서 젊은 세대가 추는 ‘더티’한 춤은 부모 세대가 추는 점잖고 금욕적인 춤(과 삶)에 대한 반항이다(배경이 된 60년대의 시대적 상황과도 맞아떨어지는 부분이다). <댄싱 히어로>의 남자주인공 스캇은 기존 댄스협회의 엄격한 규율을 깨는 혁신적인 춤을 선보였기 때문에 징계를 받지만 춤으로 정면승부를 펼쳐 승리를 거둔다. 매혹적인 춤과 음악을 마음껏 섭취하게 해주면서도 극적 긴장감을 잘 이끌어가는 이러한 장점은 <댄서의 순정>이 놓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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