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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10년 사건과 실화 [2]
박은영 2005-05-03

Episode 1. “보은아, 나 죽고 싶어”

1995년 4월, 창간하자마자 개편 들어간 사연

1995년 4월24일, <한겨레>를 떠나 ‘야인’으로 지내던 최보은씨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보은아, 나 죽고 싶어.” 친구이자 동료인 <씨네21> 조선희 편집장이었다. 축배라도 들고 있을 줄 알았던 조 편집장의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죽어버릴 사람 같았다. 임진각에 있던 최보은씨는 만삭의 몸으로 한겨레신문사 앞까지 단숨에 달려왔다. 신문사 앞 갈빗집에 들어서자, 조 편집장은 넋나간 사람 모양 널브러져 있었다. 권근술 <한겨레> 사장이 그녀를 위로하고 있었고, 뒤늦게 합류한 최보은씨는 “창간호가 나온 것만으로도 업적”이라며 치어리더처럼 뛰어다녔지만, 납덩이 같은 분위기를 띄울 수는 없었다.

그날 아침, <씨네21> 창간호가 나왔더랬다. 기대 이하였다. 조선희 편집장은 “낯뜨거울 정도로 후지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다. <사이트 앤드 사운드>의 전문성과 <엔터테인먼트 위클리>의 오락성을 겸비한 영상 주간지를 표방했건만, 결과물은 근처에도 못 미친 느낌이었다. 믿고 의지하던 <한겨레> 선배 김선주씨도 솔직하게 한마디 던졌다. “무슨 동인회지 같네. 이게 뭐냐?” 밖에서도 “별로 볼 게 없다”는 얘기들이 들려왔다. 1994년 겨울부터 5개월 남짓, 창간을 위해 달려온 지난 시간이 조 편집장의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한겨레>에서 무슨 딴따라 잡지냐, 너네 때문에 <한겨레> 망한다고 떠들던 입들과 흘겨대던 눈들. 영화 주간지는 유럽에도 없는데, 한국에서 되겠냐던 토니 레인즈의 걱정어린 전망, 정성일 평론가의 <키노> 창간이라는 날벼락에 망연했던 기억, 그를 만나 둘 중 하나는 포기해야 하지 않겠냐고 설득하려던 헛된 시도. 약속이라도 한 듯 창간 무렵 줄줄이 시집, 장가 가느라 절반이 비어버렸던 창간 준비팀. “끔찍한 과정을 지나오며, 신경쇠약 직전에 이르렀던” 조선희 편집장은 머릿속에서 펑∼ 하는 폭발음을 들었다. 우려와 달리 창간호는 매진을 기록했지만, 편집진은 창간하자마자 개편을 준비해야 했다.

Episode 2. “뭔가 센 기획이 필요합니다”

1995년 10월, 항의가 빗발쳤던 에로비디오 기획

“뭔가 센 기획이 필요합니다. 남미영화는 지금, 이런 기획은 힘이 없어요.” 김영진 기자의 바리톤 음성이 회의실에 울려퍼지고 있었다. 근엄한 인상의 그가 제안한 아이템은 놀랍게도 에로영화의 현주소에 관한 것이었다. 그가 감지하기로 <젖소부인 바람났네>는 앞으로 ‘큰일’을 낼 작품이었다. 엄연히 존재하는 영상문화의 한 부분을 공론화하자는 취지였지만, 신문사 소속으로, 창간 반년도 안 된 영화잡지가 ‘저급 문화’로만 치부되던 에로영화의 열풍 속으로 뛰어들기란 쉽지 않았다. 엎느냐 가느냐의 기로에 섰던 월요일 밤, 한지일 한시네마타운 대표가 전화를 했다. 속초의 한 콘도에서 촬영하고 있고, 취재하러 와도 좋다는 전갈이었다.

밤에 차를 몰아 도착한 현장에서는 두편의 영화가 동시에 촬영되고 있었다. 스탭들은 갑자기 들이닥친 취재진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당연한 일이었다. 식사시간에 독대한 감독도 밥에 물을 말아 삼키고는 황급히 자리를 떴다. 머쓱해진 김영진 기자는 방에서 자고 있던 여배우를 깨워 인터뷰를 하기로 했다. 부모님은 아시나요? 어라, 이게 아닌데…. 이때 옆방에서 다른 촬영이 시작됐는지,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가보니 촬영은 끝나가고 있었고, 사진기자는 얼굴이 벌게진 채로 땀을 흘리고 있었다.

에로영화 촬영현장과 대여 열풍을 소개한 ‘숨어서 보는 영상, 에로비디오’는 23호(1995년 10월)의 커버스토리가 됐다. 반응은 엇갈렸다. “책이 잘못 배달됐나 했다. 대단한 결단이었겠다. <씨네21>이니 더욱 하기 힘들었을 텐데.” “중학생 딸에게 영화가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주려고 정기구독했는데, 너무 충격적이고 실망스러웠다. <씨네21>의 등급은 어느 선인가, 미성년자 관람불가였나.” <씨네21> 최초로 ‘격렬한 찬반논쟁’을 불러왔던 이 기획은 이후 포르노 전용관 설립 제시 등의 후속기획으로 이어졌다. 판매를 의식한 건 아니었지만, 판매율 상승에 도움이 되진 않았다.

Episode 3. “차라리 펜을 꺾겠다”

1996년 2월, 영화평론가 이정하 절필 선언

이현승 감독은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었다. 이정하 평론가의 <런어웨이> 영화평 말미에 덧붙여진 문구 때문이었다. “그런데 왜 영화감독은 자살하지 않는 것일까. 저렇게 가객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비록 당사자는 아니었지만, 동료 감독으로서 자살 운운한 대목을 참아넘기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는 <씨네21> 표지에 사과 문구를 넣거나, 평자를 교체하라고 요구하다가, 반론을 통해 자신의 뜻을 전하기로 했다. 그는 “이것이 영화평론인가, 아니면 자신이 잘 아는 이웃을 처치해야 하는 고뇌에 찬 보안관을 다룬 시나리오인가”라고 성토하며, “영화평에서 주체인 영화가 사라졌다”는 요지의 비판을 보내왔다.

다시 이정하 평론가에게서 연락이 왔다. 투지에 찬 재반론을 예상했건만, 그는 “영화평론을 그만두겠다”는 이별의 편지를 보내왔다. 그는 이현승 감독의 공격은 동업자(평론가) 일반이 아니라, 특정 평론가, 즉 자신을 겨냥해야 했다면서, “문제가 된 글과 표현에 대해선 변명도 해명도 하고 싶지 않다. 이해도 오해도 바라지 않는다”는 언급으로, 다소 지친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러잖아도 영화평론을 그만둘 계획이었다는 그는 이 일로 “껍데기를 벗었다”며, 독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떠나갔다.

처음 이정하씨의 기고문을 받아든 조선희 편집장은 “<씨네21>에 안 쓰겠다는 뜻으로만 알았지, 영화평을 그만두겠다는 건지는 몰랐다”고 회상한다. “당시엔 평론과 창작의 관계에 대한 논쟁을 촉발할 수 있겠다 생각해서, 문제를 접수하고 공식화하려는 노력을 했던 건데, 지금 돌아보면 상업적 센세이셔널리즘이었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네요.” 이정하 평론가와 친분이 깊었던 김영진 기자는 수년 뒤에 목수가 된 그를 만났다고 했다. “수염을 많이 길렀더라고요. 신문지에 둘둘 싼 시집을 받았는데, 산 타령, 물 타령, 속세를 등진 사람의 노래였어요. 숙련공이 돼서 어디 유명한 절을 지었다고도 들었어요.”

Episode 4. “양은이파, 조직 재건!”

1996년 8월, 표지 모델 조양은 구속 수감

1996년 8월25일 사회면을 장식한 뉴스에 <씨네21> 기자들은 아연해졌다. 열흘 전쯤 표지 모델로 세웠던 인물이 ‘사기 및 폭력 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됐다는 ‘비보’ 때문이었다. 자전영화 <보스>를 통해 영화배우로 거듭난(줄 알았던) 조양은을 촬영 중에 한번, 개봉 뒤에 한번, 그것도 커버스토리로 소개했던 기자들은 난감해졌다. 하지만 되돌리거나 수습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맨 인 블랙>의 기억 소거 플래시가 있다면, 독자들에게 한방 쏴주었을 테지만.

당시 <보스>는 극장가에서 기대 이상으로 선전하고 있었다. 메인 상영관인 단성사에는 “형님이 출연한 영화인데 꼭 봐야 한다”는 ‘어깨’들의 단체 관람이 이어졌고, 지방 팬사인회에는 소녀들이 몰려들어 ‘오빠’를 연호했다. <보스>에 열광한 건 대체로 남성 관객이었는데, 특히 조양은의 액션이 ‘실감난다’는 입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실제로 그는 액션을 비롯한 연기에 대한 자신감을 강하게 내비치곤 했다. “대개의 영화들이 건달 세계를 사실적으로 그리지 않고 있다고 느꼈고 이왕 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 거라면 가장 사실적일 수 있게 직접 연기를 하기로 했다.” 그는 자신의 좌우명이 “남에게 아픔을 주는 삶이 되지 말자”라고 밝혔지만, 얼마 뒤에 증기탕 임대 알선조로 1억여원을 받아 가로챈 것을 비롯, 망치로 영화사 직원의 머리를 때린 혐의 등을 받아 구속됐다. “새사람이 된 것처럼 신앙 간증을 하는가 하면, 영화에 출연해 스스로 영웅인 것처럼 행세해 사회적으로 용납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는 서울지검 관계자의 말을 빌리면, 조양은의 재구속 배경에는 ‘괘씸죄’가 적용됐던 것으로도 보인다. <씨네21>과의 마지막 인터뷰 제목이 ‘양은이파, 조직 재건!’이었던 건 기막힌 우연이었다.

Tip01. 독자들한테 혼났던 외래어 제호

독자 대상의 공모에서 영화와 영화관을 뜻하는 ‘씨네’와 21세기를 뜻하는 ‘21’을 합성한 ‘씨네21’이 제호로 결정됐다. 당시 접수된 1만2103건 중에는 영상21, 시네마한겨레, 한겨레시네마, 한겨레영상, 영상저널, 빛그림, 보임 등이 가장 많았다. 결선에 오른 제호는 영상21, 씨네21, 시네마한겨레, 필름21, 이미지21, 시네마21, 시네컴 등 7건이었고, 한겨레신문사 자체 투표에서 영상21, 시네마한겨레, 씨네21로 압축됐다. 영상과 시네마는 유사제호가 특허청에 출원됐기 때문에, 씨네21로 결정을 보았다. 제호 발표 뒤 한겨레신문사에는 항의 전화가 쇄도했다. 외래어를 사용한 제호는 “한겨레답지 않다”는 질책이었다. 씨네를 고딕체로, 21을 흘림체로 조합한 제호는 종종 ‘씨네리’로 잘못 읽히곤 한다. 기자들은 “거기 씨네리죠? 위치가 어디죠?”라는 퀵서비스 전화를 받는 데 익숙해져 있다.

Episode 5. “누가 은하를 쓰러뜨렸나”

1997년 7월, 오은하 기자 과로 끝에 탈진

<제5원소> 개봉 무렵 방한한 뤽 베송의 기자회견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수입사가 9분가량 필름을 잘라내 상영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이 발단이었다. 행사를 진행하던 삼성영상사업단 관계자는 “그 질문은 받을 수 없다. 기자회견을 마치겠다”며 통역을 거부했고, 반발하며 술렁이던 기자단에서 직접 영어로 질문을 던지자, 뤽 베송은 “몰랐다. 알려줘서 고맙다”며 회견장을 떠났다. 그는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잘린 부분을 확인하러 극장으로 나섰다. 박찬욱 감독과의 대담을 주선하고 면을 비워놓았던 <씨네21>도 바빠졌다. 조선희 편집장은 영어와 프랑스어에 능통한 오은하 기자에게 특명을 내렸다. 뤽 베송을 따라잡아라!

마침 그주 특집을 마감한 오은하 기자는 바로 명보극장으로 달려갔다. 자기 모국어를 구사하는데다, 극장까지 달려온 기자가 고마웠던지, 뤽 베송은 “끝나고 이야기하자”고 약속해주었다. 영화를 보고 나온 그를 만나는 건 쉽지 않았다. 수행하던 배급사쪽 누군가는 기자를 계단에서 밀기까지 했다. “정확하게 13분이 잘려나갔다. 정말 수치스럽다. 세계 어느 나라를 찾아봐도 이런 경우는 없다. 어떻게 상업적인 이유 때문에 자기들 맘대로 내 영화를 잘라낼 수 있나? 강력하게 따져봐야겠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온 오은하 기자에겐 미션 하나가 더 떨어졌다. 다음날 출국하는 뤽 베송을 공항까지 마저 따라잡으라는 거였다. 그러나 이 취재는 성사되지 못했다. 오은하 기자가 마감 와중에 탈진해 쓰러졌기 때문이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쓰러진 그는 병원으로 실려갔고, 몇주 뒤에 회사로부터 포상을 받았다. 뤽 베송 관련 특종상은 아니었고, 같은 주의 여성감독 특집에 관한 노력상(!)이었다. 그 무렵 <한겨레> 노조 일보에는 ‘누가 은하를 쓰러뜨렸나’라는 제하의 기고문이 실리기도 했다.

Tip02. 표지 모델 관련 기록

최다 등장 - 송강호 13회, 이병헌 12회, 안성기·김혜수·정우성 11회, 최민식·설경구·전도연·이정재 10회, 장동건·차승원 9회

최고령 - <낮은 목소리2>의 김복동(77)·박두리(75)·심미자(74)·김순덕(72) 할머니, <죽어도 좋아>의 박치규(73)·이순예(71) 부부

최연소 - <꽃잎>의 이정현(16), <어린 신부>의 문근영(17)(해외: <해리 포터와 비밀의 방>의 대니얼 래드클리프 13살)

최다 모델 - <춘향뎐>의 스탭 캐스트 전원(60명), <실미도>의 배우 31인

비영화인 - 이현세, 김수정, 서태지와 아이들, 여성문화예술기획 4인방(영화를 계기로, 윤도현, 젝스키스, <나쁜 영화> 아이들)

비인간 - <뮬란> 등 디즈니 애니 캐릭터, <신세기 에반게리온> 등 일본 애니 캐릭터, <오돌또기> 등 국산 애니 캐릭터, <누들누드> 캐릭터, <또또와 유령친구들>의 또또(그 밖에 백남준 비디오 아트, 파워50 일러스트 등 그래픽 표지 다수)

황당 표지 - <바람의 파이터>의 비, <송어>의 이혜영(제작사 사정상 다른 배우로 교체되었다)

파격 표지 - <나쁜 영화> 개봉시 장선우 감독의 <래리 플린트> 포스터 패러디, <기막힌 사내들> 양택조, 최종원 콤비의 노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