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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회 칸영화제 중간 결산 [3] - 거장들의 신작 ②

라스 폰 트리에의 미국 연작 두번째 <만달레이>

<만달레이>

다르덴 형제가 언제 끝날지 모르는 구제 연작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라면, 라스 폰 트리에는 말 그대로 미국 삼부작 중 두 번째 연작을 완성해서 이번 칸에 왔다. 이미 그 첫 번째 작품 <도그빌>로 미학적 급진성을 인정받았고, 황금종려상도 탄 뒤이기 때문에 그의 두 번째 작품 <만달레이>가 또 어떤 영화가 될 것이냐는 예측이 난무했다. 결과적으로는 라스 폰 트리에 자신이 말한 바에서 크게 벗어나질 않는다. “내가 구상한 인물과 사건이 미국이라는 공간을 빌리고 있는 것뿐이다. 내가 갖고 있는 미국에 대한 느낌 그리고 지식에 대한 영화라고 이해하면 된다.” 그러나 전편보다 훨씬 더 정치적인 색을 명확히 하고 있다는 점이 3부로 넘어가는 어떤 매개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여전히 영화적인 모든 미장센들은 배제되어 있다. 또는 ‘벌거벗은 미장센’만이 있다. <도그빌>처럼 연극 무대와 같은 한정된 실내에 1편보다 조금 더 구조물 몇개가 들어서 있을 뿐이고, 그것을 인물들은 만달레이 농장이라고 부른다. 1933년 도그빌을 떠난 그레이스와 그녀의 아버지는 미국 남부 앨라배마의 외진 농장 ‘만달레이’를 잠시 지나게 된다. 우연히 흑인 여자의 간청에 이끌려 만달레이 농장에 들어선 그레이스는 노예제도가 폐지된 지 70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노예생활을 하고 있는 흑인들의 커뮤니티를 목격하게 된다. 그리고는 그들을 민주적으로 교화해 독립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아버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만달레이 농장에 남기로 결심한다. 여기까지의 줄거리는 이 작은 농장에서 민주주의의 여신이 되는 그레이스를 보여줄 것도 같다. 그러나 미국 삼부작 중 두 번째까지를 볼 때 라스 폰 트리에가 의미를 양산하는 역학은 상황의 ‘역전’방식이다. 만달레이에 남겠다는 그녀의 이 결정을 영화는 결국 우습고 오만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영화가 끝난 뒤 나온 박수는 그 역전에 대한 호응이다. <도그빌>에서 니콜 키드먼이 했던 그레이스 역할을 브라이스 댈러스 하워드가 연기한다. 그리고 <만달레이>에서 미국이란 오만한 그레이스의 초상 그 자체이기도 하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논쟁적 서부극 <어떤 폭력의 역사>

<어떤 폭력의 역사>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어떤 폭력의 역사>를 상영하는 극장 안 풍경처럼 볼 만했던 것은 없다. “정말 재미없다”고 소리치는 관객과 시도 때도 없이 크게 웃어대는 사람과 그게 웃기냐고 조용히 하라는 사람이 영화 중 설전을 벌이고, 영화가 끝난 뒤에는 박수와 야유가 동시에 터져나왔다. 왜 그랬을까? 여기에는 우선 영화의 스토리가 필요하다. 미국 어느 마을 밀부룩에서 작은 음식점을 경영하는 톰 스탤. 흉악한 악당들이 이 식당을 찾아 그를 조이라고 부르면서 시비를 건다. 갑자기 벌어진 총격전에서 톰 스탤은 두 악당을 멋지게 처치한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톰 스탤은 영웅이 된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또 벌어진다. 또 다른 악당이 찾아와 그를 조이라고 부르며 결투를 신청한다. 이번에도 톰 스탤(조이)은 그들을 물리친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은가? 데이비드 크로넨버그는 놀랍게도 <어떤 폭력의 역사>를 교묘한 후기 ‘서부극’의 변형적 구조로 만들었다. 이번에 그의 원더랜드는 바로 서부극의 무의식 안에 있다.

평범한 일반인이 장르적 총잡이로 변해가는 것, ‘즉 A가 B로 변한다’는 크로넨버그의 변환 법칙은 여전히 이 안에 있지만, 은둔자로 살아가는 총잡이, 그를 찾아와 결투를 요청하는 악당들, 멈추지 않고 계속되는 폭력의 역사, 바로 ‘용서받지 못한 자’들의 역사를 데이비드 크로넨버그는 뼈대만 놓고 간단명료하게 만들어버린다. 일부러 인물들과 상황을 우스꽝스럽게 가져다놓기도 한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자는 끊임없이 이게 과연 크로넨버그의 영화가 맞는가라고 그의 이름값과 대질심문을 벌여야 한다. 그 와중에 웃는 자와 재미없다고 욕하는 자와 왜 감독의 자리이동을 이해하지 못하냐고 호통치는 자들이 생긴다. <리베라시옹>이 한 “첫 번째 놀라운 점. 속임수인 단순함, 속임수인 명쾌함”이라는 표현은 <어떤 폭력의 역사>의 간결하지만 놀랄 만큼 두터운 층위를 파악한 것이다. 이런 질문을 하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다. “어떤 폭력의 역사인가?” “왜 크로넨버그는 서부극을 만든 것인가?” 놀랍게도 이 영화는 미국의 역사에 대한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식 논평인 것이다. 크로넨버그는 미국의 전통적 장르의 인물과 구조로 미국을 논평한다. 이로써 미국에 대한 영화를 만든 건 라스 폰 트리에만이 아니다. 그 깊이로 칠 때 <어떤 폭력의 역사>는 라스 폰 트리에의 삼부작을 덜떨어진 것으로 보이게 할 만큼 훌륭하다.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정말 믿기 힘든 일이다.

최고의 인기작 짐 자무시의 <망가진 꽃들>

<망가진 꽃들>

짐 자무시의 <망가진 꽃들>은 제목의 품위와는 상관없이 영화제 기간 동안 가장 활짝 핀 인기작이었다. 이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정말 하늘의 별따기거나, 다른 영화를 모두 포기하고 한 극장 앞에서만 말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했다. 그렇게 힘들게 영화를 보고나니 왜 사람들의 호기심이 발동했는지 궁금해졌는데, 아마도 그 첫 번째 이유는 짐 자무시의 이름이 아니라 빌 머레이를 위시한 틸다 스윈튼, 샤론 스톤 등의 배우들 이름 때문이었을 것이다. 빌 머레이는 짐 자무시 영화 스타일에 제격이다. 그는 꼼짝하지 않으면서도 표정을 지어내고 관객을 웃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배우인데, 시종일관 멀뚱하게 서 있는 그의 몸은 오랜만에 돌아온 짐 자무시의 미니멀한 스타일과 그렇게 어울릴 수가 없다.

빌 머레이가 연기한 이 사람의 이름은 던이다. 여자친구는 그를 두고 떠나간다. 그런데 그 순간 있는지도 몰랐던 10대 아들이 자신을 찾으려고 한다는 과거 어느 여자친구의 편지가 온다. 그러나 이름이 없다. 삶의 전환점이 될 기회라는 옆집 친구의 말을 따라 던은 과거의 여자들을 찾아, 아들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 이것은 자신의 과거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고 현재를 다시 새기는 여행이다. ‘여행’이라는 말은 짐 자무시 영화의 원류와도 같은 것이다. <천국보다 낯선>에서 여자친구를 찾아 떠날 때, <미스테리 트레인>에서 엘비스를 찾아 떠날 때 그들은 각자를 되돌아본다.

짐 자무시는 <고스트 독>처럼 과잉할 때 나쁜 작품을 만드는데, <망가진 꽃들>은 그 반대로 별다른 미학적 야심없이 만들었거나, 그걸 충분히 감출 수 있을 만큼 흡수력이 있다. 다른 어떤 장치적 미사여구도 집어넣지 않고, 네댓번의 만남과 그 대화들만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를 채운다. 유머와 교훈이 공존하니 영화제 관객의 사랑을 독차지할 만도 하다. 구스 반 산트가 자신의 새 방식을 찾아내는 시기에 거의 동시대 미국 감독 짐 자무시도 자신의 원류를 기억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라스트 데이즈> <망가진 꽃들> <히든> 현지 언론의 평

“<라스트 데이즈>는 사춘기의 끝을 다룬 대단한 영화!”

이번 영화제에서 데일리 별점의 일인자는 5월18일 현재 미카엘 하네케의 <히든>이다. <히든>은 11개 국가 각 별점위원들을 대동하고 있는 데일리 <스크린 인터내셔널>에서 3.3점으로 1위를 차지하고 있고, 또 다른 프랑스 데일리 <필름 프랑세즈>가 8개 주요 프랑스 언론사를 대상으로 조사하고 있는 별점에서도 역시 1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뒤로 구스 반 산트의 <라스트 데이즈>와 짐 자무시의 <망가진 꽃들>이 포진하고 있다. 그렇다면 영화제 기간 내내 특별 지면을 구성하고 있는 프랑스 유력 일간지 <르몽드>와 <리베라시옹>의 이 세 영화에 대한 평가는 어떨까? 그들의 평을 들어본다.

<히든>

<르몽드> 5월17일치 “미카엘 하네케의 특기 중 하나는 관객이 자기 방식으로 읽어낼 수 있는 선택의 여지를 남기는 이야기들을 내놓는 것이다. <히든>의 이야기 역시도 많은 숨겨진 부분을 내포하고 있으며 여러 가지 가능한 해석의 장을 열어놓는다. <히든>은 액자구조의 영화로, 그 속에서 하네케는 이미지의 조작(또는 이미지를 이용한 협박)에 관해 생각할 거리를 주면서, 두 카메라 사이에 붙잡힌 남자를 보여준다.”

<리베라시옹> 5월15일치 “미카엘 하네케는 이론적인 시네아스트이고 그는 어떤 주장을 담은 영화를 만든다. 하지만, 그 주장은 차갑게 통제된 영화의 표면으로 떠올라 불편할 정도로 명확하게 드러나거나(<퍼니 게임>), 아니면 관객을 질문과 함께 내버려둔 채 주장은 영화 밑바닥의 창도 문도 없는 감옥에 감금되어버린다.”

<라스트 데이즈>

<르몽드> 5월14일치 “2003년 황금종려상 작품(<엘리펀트>)이 정점에서 몸서리칠 만한 불협화음을 이루는 폴리포니(다성부 음악)의 형태를 취하는 반면, <라스트 데이즈>는 장례식장의 단조로운 멜로디라는 극단적인 단순함의 톤을 채용한다.”

<리베라시옹> 5월13일치 29∼30면 “<라스트 데이즈>는 그 명멸의 순간에 놓인 사춘기에 관한 대단한 영화이다. 그 순간은 괴물들과 신들로 가득한 우스꽝스러운 나이를 떠나 순응과 관습의 기나긴 여정에 첫발을 내딛는 (사춘기의) 마지막 나날들이다.”

<망가진 꽃들>

<르몽드> 5월19일치 “<망가진 꽃들>은 같은 남자가 서로 다른 여자들의 삶에 침입하는 이야기이다. 여기에 유머와 씁쓸함 사이에 놓인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것들의 나타남이 뒤따른다. 짐 자무시의 가장 큰 재능은 무엇보다도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라는 점을 상기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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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장태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