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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한 삶의 미소, <엑기>
이유란 2000-03-28

철도원이란 직업을 ‘천명’으로 여기고 자기의 전부를 걸었으나, 남은 거라곤 쓰라린 회한뿐임을 깨달은 노인의 허망한 미소. <철도원>의 감독 후루하타 야스오과 주인공 다카구라 겐은 이미 20년 전 <엑기>(驛)에서 그 쓸쓸한 삶의 미소를 예감했다. <엑기>의 미카미는 이미 그때 삶의 허방을 보았다. 그는 철로를 미끌어지는 기차가 그렇듯, 인생의 키를 쉽게 움직일 수 없음을 알았다. 마치 작정을 한 듯 모든 건 그의 기대에 어긋나 있다. 특수사격대로 발령받은 그는 순순히 조직의 명령을 따르지만 그 결과로 ‘백정경찰’이란 비난을 듣는다. 그로 인해 미카미는 회의에 빠지지만, 그의 총에 죽는 범인의 숫자는 늘어만간다. 또한 그는 인생의 마지막 종착역이라고 생각한 기리코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게 된다. 기리코와의 결합을 위해 경찰직 사퇴를 결심한 직후에 그는 기리코의 집에 숨어 있던 그녀의 첫사랑을 사살한다. 언제나 그랬듯 그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 ‘어쩔 수 없음’은 <엑기>를 허무하고 쓸쓸하게 채색한다. 반복되어 흘러나오는 신파조의 트로트처럼 영화는 슬픔에 도취되어 있다. 끝없이 내리는 눈은 미카미의 순결한 고독과 시련을 시각적으로 부풀린다. 하나, 그 슬픔이 모든 이의 가슴으로 흘러들기는 쉽지 않다. 미카미의 비극이 대단히 일본적인 맥락에서 유발된 것인데다가, 자기연민에 가득 찬 중년남성의 나르시즘과 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일본식 장인정신의 소유자이며 그의 불행 또한 거기에서 비롯된다. <엑기>가 영화의 만듦새에 비해 일본 개봉 당시 200만 대군을 동원할 수 있었던 건 미카미와 보통 일본인의 삶 사이에 공감대가 컸던 탓이다. 하지만 20년 만에 현해탄을 건너온 이 영화가 얼마나 한국 관객을 뒤흔들지는 미지수다. 마음으로 느끼지 못한다면 10년에 이르는 미카미의 인생 철로를 따라가기가 그리 녹녹지 않은 일일 것 같다. 순탄하지 않은 감독의 연출 솜씨도 우리의 동행을 방해하는 요인이다. <엑기>의 원래 상영시간은 134분이지만 무려 34분이 잘린 채로 개봉한다. 국내 개봉이 가능한 전체관람가 등급을 받기 위해 심하게 가위질을 한 것이다. 기이한 제도와 무리를 해서라도 영화를 개봉하겠다는 수입업자의 속내가 <엑기>를 이 모양으로 만든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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