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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일기>를 말한다 [2]
사진 오계옥 정리 김현정 2005-05-31

탐험가 얘기? 인간에 대한 얘기!

<남극일기> 촬영현장.

윤종찬 | 편집은 어땠는가. 단편영화는 내 돈 들여 찍는 거니까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제작비가 많이 들어가는 장편영화는 주변에서 말들이 많지 않나.

임필성 | 다행히 싸이더스는 그런 점에서 감독들을 덜 괴롭히는 회사다. 차승재 대표가 요구한 건 딱 하나, 두 시간 내로만 끊으라는 거였다. 가장 논란이 됐던 장면은 민재의 꿈이었다. 마지막 오로라가 나타나기 전에 민재가 쓰러지면서 꿈을 꾸는데, 사라진 대원들이 서울의 공원 비슷한 장소에 모여 있다. 출발하기 전인 듯도 하고, 이미 죽은 사람들인 듯도 하고. 개인적으로는 애착이 강했다. 민재가 처한 가장 최악의 순간에 따뜻한 서울이 나오는 거다. 충격적인 아우라가 있을 줄 알았는데, 지나치게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그 장면엔 최도형 대장이 안 나온다. 관객이 민재와 최도형에게 집중하지 못하고 갑자기 스토리를 까먹을 것 같았다. 그 장면 말고는 별 이야기가 없었다.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이상한 특징이 있어서 잘못 건드리면 무너질 것 같다고 하더라. 어디를 자르면 좋을지 얘기를 못하겠다고. (웃음)

윤종찬 | 최도형은 가장 강인해 보였지만 나중엔 가장 순수하고 여린 사람처럼 보였다. 도달불능점에 도착해서 “내가 이렇게 춥고 무서운 데서 미쳐가고 있는데 네가 나를 멈춰줘야지” 그런 대사가 나오지 않나. 언제부터 민재가 도형을 멈춰주어야 하는 사람이 된 걸까.

임필성 |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최도형은 가장 외롭고 약한 사람이 아닐까, 그래서 끝까지 집착하는 게 아닐까. 마지막 대사는 목표에 도달해 허탈해진 최도형이 잠깐 제정신으로 돌아오고, 마지막으로 진심을 말한 거라고 생각했다. 최도형이 근찬의 다리를 자르는 데도 이중적인 면이 있다. 동상에 걸리면 다리를 자르는 게 응급처치가 맞지만, 결국엔 근찬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폭력이 된다. 그의 진심과 망상이 왔다갔다하는 순간이다. 민재는 최도형을 멈추게 하는 사람이 맞다. 처음엔 도형과 민재에게 유사부자 관계처럼 친숙한 뉘앙스를 주려고 노력했다. 갑자기 닭살스런 장면이 나오니까 이상해서 편집하긴 했지만. 민재는 도형에게 아들이나 마찬가지고 그를 끝까지 믿고 싶어한다. 하지만 도형이 만든 지옥도를 보고 뒤돌아선다.

윤종찬 | 탐험대원들에게 왜 그곳에 가는지 묻는다면 할말이 없을 거다. 도달불능점에 갔다가 도로 돌아올 거 뭐하러 가느냐고. 그래서 이 영화의 관건은 누가 보느냐인 듯하다. 동의하는 사람에겐 심리적으로 흡입력이 있지만, 동의하지 않는 사람에겐 볼 만한 게 없을 거다.

임필성 | 그래서 극단적인 리뷰가 나오는 듯하고 예상한 결과이기도 하다. 사실 소재가 좋아서 유혹이 많았다. 디즈니 영화처럼 모두 다 행복해지는 영화를 하라고도 했고, 베이스캠프에 남은 여대원 유진과 민재 사이에 멜로가 싹튼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아닌 다른 감독들도 찍을 수 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 안전한 길을 택한 영화들이 대중적으로나 영화적으로 실패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지금도 굳게 믿고 있다. 그런 얘기가 아프기는 했다. 맥거핀과 죽은 아들, 남극의 공포 같은 것들이 없었다면 헷갈리지 않았을 것 같다고. 약간 친절하고 장르적으로 가려고 했던 게 더 많은 오해와 억측을 낳았나보다.

윤종찬 | 초반에 대원 한명이 실종되면서 대원들이 탐험을 포기해야 하는지를 두고 분열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위기의 국면이 너무 빨리 시작된 것 같아서 아쉬웠다.

임필성 | 재경이 실종된 다음에 설왕설래가 좀더 있었다. 영민과 성훈이 재경을 찾아다니면서 그가 왜 사라졌는지 대립하기도 했고, 도형이 민재에게 아문센과 스콧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부분도 있었다. 유기적인 완충지대라고 생각했는데, 편집 과정에서 그 부분이 제일 먼저 날아갔다. 사실 진짜 탐험대에는 대원 하나가 사라진 건 큰 문제가 아니다. 일반 관객의 시선에서 큰일일 뿐인데, 고민과 설명으로 가지를 쳐주면, 손해가 더 많을 것 같았다. 나도 아쉬움은 남지만 장편영화를 처음 하면서 겪어야만 하는 과정이었던 듯하다.

윤종찬 | 우리는 대원 하나가 안 보이면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일반인은 알 수 없는 심리인데, 실제 산악인들은 이 영화에 어떻게 반응했나.

임필성 | 탐험 슈퍼바이저로 참여한 탐험가 박영석 대장과 아직 영화 이야기는 못했다. 하지만 시나리오 단계에선 이보다 심한 상황도 얼마든지 있다는 말을 들었다. 박 대장은 탐험대가 서로를 뜯어먹는 지경까지 가는 게 어떻겠느냐는 과격한 얘기까지 했다. 그래서 그렇게 하면… 글쎄요… 이렇게 무마했는데. (웃음) 박 대장은 이건 탐험가 얘기라기보다 인간에 대한 얘기인 것 같다고 했다. 탐험가들은 훨씬 강하다. 대원 한명이 희생돼도 그 자리에서 슬퍼하고 말지 서로 싸우지는 않는다. 박 대장이 산악 그랜드슬램을 달성하기까지 희생된 대원이 10명 가까이 된다. 박 대장은 지금도 슬퍼하지만 마음이 약해져서 포기하진 않았다. 부끄럽게 되돌아오는 것보다 무리가 가더라도 끝까지 해낸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윤종찬 | 배경이 남극일 뿐이지 로드무비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여섯명이 A지점에서 B지점까지 옮겨가는 로드무비로 봐도 괜찮지 않을까.

임필성 | 처음 이 영화를 생각했을 때 무대가 바다 한가운데건 화성이건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남극을 택한 건 지구에 있는데도 외계의 공간처럼 느껴지는 매력 때문이었다. 지금도 남극 대륙의 70, 80% 아래에 뭐가 있는지 모른다고 한다. 발견된 건 100년, 200년 전인데 1천년 전 지도에도 있고. 그래서 인간의 욕망을 얘기하는 데 좋지 않을까 싶었다. 흰색이 주는 느낌도 좋았다. 정신병원 벽이 흰색이지 않나. 흰색이 주는 권태로움이랄까 답답함을 실험해보고 싶었다.

"도형은 남극 자체가 될 수밖에 없는 사람"

윤종찬 감독

윤종찬 | <남극일기>는 사이즈가 크지만 사람에게 관심이 있다. 엄청난 풍경을 담아도 알맹이는 없는 영화가 있는데 사람의 심리와 관계에 중심을 두는 게 좋았다. 플래시백이나 환영, 유령인지 무언지 모를 존재들이 나오긴 하지만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지 않나. 감독 자신의 논리를 뛰어넘는 영화도 있으니까. 내 취향이 인간관계에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감독으로 냉정하게 보더라도, 신인답지 않은 주제가 눈에 띄는 영화였다. 민재와 도형의 라인도 냉정하게 구축하던데, 어떤 관계로 설정했던 건가.

임필성 | 민재와 도형은 원형적인 관계라고 생각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버지를 죽이는 아들 있지 않나. 영화에선 간접적으로만 표현하지만 도형은 민재를 자기 아들 같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남극일기를 찾았을 때도 아들 같은 민재에게 선물로 주지만, 그것은 또한 저주의 문건이기도 하다. 마지막에 싸우는 장면은 러브신으로 보였으면 좋겠다.

윤종찬 | 개인적으로는 그 장면이 백미였다. 감독이 절제해왔던 감정을 놔주는 대목이고, 슬프기도 했다. 때리는 민재나 맞는 도형의 표정이 모두 슬펐다.

임필성 | 나와 송강호가 편집실에서 영화를 보며 가장 슬프다고 생각했던 장면이다. 찍을 때도 액션신으로 보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서 굉장한 감정이 폭발하는 스펙터클의 느낌을 주고 싶었다. 원형적이고 신화적인 캐릭터이기도 하고. 관객이 헷갈릴까봐 포기했는데, 도형이 깨끗한 옷을 입고 수염을 깎고 상처없는 얼굴로 도달불능점에 나타나면 어떨까 고민했다. 그러면 도형은 그대로 남극이 되고 신화가 된 것 같은 느낌으로 남을 것 같았다.

윤종찬 | 민재와 도형이 싸우는 장면이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고, 나머지는 그 감정을 추스르는 거다. 도형은 한번도 죽은 아들 이야기를 하지 않지만, 자식이 죽었는데 슬프지 않은 부모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도형이 민재가 살아남을 수 있도록 배터리를 주고 가는 장면은 죽은 자식에게 생명을 주는 듯한 느낌도 났다.

임필성 | 비슷하게 해석해주니까 기분이 좋다. 민재가 쥐고 있는 빨간 불빛은 심장이 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희망의 등대처럼 보이기도 한다. 도형은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지만 민재에게 마지막 희망과 자신의 모든 메시지를 전달해주고 가는 거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폭풍 속으로>와 비슷하다. 패트릭 스웨이즈가 바닷속으로 사라지는 것처럼, 도형은 남극 자체가 될 수밖에 없는 사람이지 않을까.

윤종찬 | 단편 <소년기>를 보진 못하고 말로만 들었는데, 못생긴 아들이 잘생긴 아들하고 차별당하다가 아버지를 죽이는 영화라고 하더라. 이번엔 반대지만 그런 주제에 관심이 있는 듯하다.

임필성 | 아버지가 아니라 할아버지를 죽이고 첫 몽정을 하면서 끝난다. 그 영화를 만들고 나서 사람들이 개인적인 경험이 섞였는지 많이 묻기에, 내가 할아버지를 죽였을 리는 없지만(웃음), 오래 생각해봤다. 나는 본능적으로 기존의 질서나 가치를 견디지 못하는 것 같다.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언제나 꼴찌였고 정신지체아들과 같이 공부했고 적응을 못했다. 재수할 때는 아버지가 도저히 안 되겠다면서 정신병원에 끌고간 적도 있고. 그래선지 <소년기>는 호불호가 극도로 갈리는 영화였다. 어느 영화제에선 상을 탔는데, 또 다른 영화제에선 본선 통과도 못했다. 그런 과정을 겪으며 나란 사람이 누구나 좋아할 만한 사람은 아닌가보다 했다. 지금도 기존의 영화언어를 본능적으로 싫어한다. 왜 대화신은 다 똑같이 찍어야 하는 건가, 세상에 문법이란 게 어디 있는가. 내가 영화를 전공하지 않고 야메로 배워서 그런 걸 수도 있겠지만. (웃음)

윤종찬 | 내가 <남극일기>에서 발견하는 건 엇박자에서 나오는 슬픔이었다. 죽음의 공포라든가 대원들의 균열은 흉악하고 끔찍하고 상상하기 힘들지만, 한발만 앵글을 넓히면 그 자체로 슬픈 이야기다. 인간이 그렇게 변할 수 있다는 건 슬픈 일이다. 아버지를 죽이고, 동료를 죽이고, 스스로 미쳐가고.

"누구나 내면엔 살의를 가지고 있다"

임필성 | CF감독인 채은석이 <남극일기> 예고편을 만들었는데 도형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초등학교 시절부터 40대 초반까지 모습이 생각나서 슬펐다고 했다. 봉준호 감독도 슬픈 영화라고 했고. 선배와 동료 감독들이 그런 감정을 알아줘서 기쁘다.

윤종찬 | 상황만 다를 뿐이지 우리 모두 그렇게 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막말로 고스톱 치다가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게 현실이다. 우리는 살인자를 손가락질하지만, 내면엔 누구나 살의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탐험대원들과 우리가 그리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임필성 | 유영철 살인사건 기사를 뉴질랜드에서 읽었다. 무섭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그저 미친놈으로 생각하면 마음이 편할 텐데 그 사람도 인간이더라고. 상처받은 인간이 누군가를 그렇게 난자했을 때 그의 내면은 얼마나 황폐했을까. <남극일기>를 준비하면서 <모빌>이라는 디지털 단편영화를 찍었는데, 실제사건이 모델이었다. 일류대에 다니던 막내아들이 부모를 토막살해해서 지하철역에 한 토막씩 버리고 다닌 사건이었다. 그 사람이 또 영화광이더라고. 영부인이 되고 싶었던 어머니가 육사 출신인 아버지와 결혼했는데 아버지는 대령까지밖에 못했다. 그래서 애들을 강박하고 교회에 미친 거였다. 그 동네가 내가 살던 동네와 멀지 않았다. 아마 그 사람은 살기 힘든 사회의 반영이 심하게 된 경우였지 싶다. 그 영화를 장편으로 만들어보자고 싸이더스에 건의했는데 기겁하면서 <남극일기>나 하라고 했다. (웃음) 우리는 각박하고 무시무시한 시대를 살고 있는 것 같다.

윤종찬 | 보통 사람들은 뉴스나 신문을 보고 한마디 하고 지나가면 끝이지만,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들은 더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관점을 뒤집어 보여줄 수 있는 게 감독의 기능일 테고.

임필성 | 그런데 <청연>은 후반작업 중인가.

윤종찬 | 편집을 하고 있고 요즘은 조금 한가한 편이다. 나도 임필성 감독과 마찬가지로 몇년을 못 쉬고 온 셈이다. 쉬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다.

임필성 | 예전에 김대승 감독의 <혈의 누>와 윤종찬 감독의 <청연>이 아직도 촬영 중이라는 데 희망을 갖곤 했다. (웃음) 첫 번째 영화가 규모가 너무 커서 힘이 들었다. 남양주 종합촬영소 세트 촬영을 하면서 눈밭 대신 소금을 뿌리는데, 소금을 어찌나 많이 썼던지 김장철 소금 공급에 영향을 줄 정도였으니까. (웃음) 어느 기사를 보니까 김대승 감독이 스탭들에게 당장 힘들어도 결과에서 보람을 느끼지 못하면 무의미한 작업이 아니겠느냐고 독려했다더라. 나도 같은 말로 스탭들을 설득했고 그 덕분에 여기까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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