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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이 독자에게] 군대는 선, 국적 포기는 악?

<혈의 누>

유년기 기억 가운데 아주 끔찍했던 장면이 있다. 시시때때로 나오는 반공드라마에서 인민재판을 하는 모습이었다. 반공 청소년으로 커가는 데 밑거름이 된 그 장면을 보며 몸서리친 이유는 순전히 죽창이 몸을 뚫는 잔인한 이미지 때문이었다. 인민재판 자체가 끔찍한 것이란 건 나중에야 알았다. 오늘날 흔히 이지메라 부르는 이것은 집단이 개인을 통제하는 데 탁월한 효과를 발휘하는 방법이다. 꼭 죽창을 쓰지 않아도 이지메를 당한 자의 영혼은 피눈물을 흘린다.

뒤늦게 <혈의 누>를 보면서 가물가물했던 인민재판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감독의 말로 확인한 바는 없으나 김대승 감독 또한 인민재판의 끔찍한 이미지에서 <혈의 누>를 만들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첫 번째 희생자의 몸이 나무에 꽂혀 있는 장면이나 모든 마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사지가 찢겨나가는 장면은 한국전쟁의 상처를 상기시키기에 충분했다. 나는 그런 점에서 이 영화의 잔인함이 흥행을 고려한 결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과거에 대한 반성은 그런 잔혹함에 치를 떨 때 비로소 시작된다. <혈의 누>는 미스터리물로서 견고한 편은 아니지만 자신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는 잘 알고 있는 영화다. 나는 <혈의 누>에 대한 공감의 이면에 한국의 현대사가 낳은 집단무의식이 있을 것이라 짐작한다.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만들어 처형하는 데 대한 암묵적 동의와 그로 인한 죄의식, 그것은 한국 현대사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유하는 마음의 상처다. 아마 그중 시간적으로 가장 가깝고 영향력 면에서 가장 강력한 것은 80년 광주일 것이다. <혈의 누>에는 그렇게 되풀이되는 역사적 과오에 대한 분노가 있다.

요즘 새 국적법 때문에 온 나라가 떠들썩하다. 마치 군대를 갔느냐 안 갔느냐가 세상의 선악을 판별하는 유일한 기준이 된 분위기다. 군대 안 가겠다고 국적을 포기한 사람은 부모 이름까지 공개하자는 한 정치인의 발언이 지지를 얻는 걸 보면서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졌다. 이런 자가 대통령이 되면 온 나라를 인민재판 분위기로 몰고갈 거란 두려움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이번엔 군대문제가 타깃이지만 이런 식의 여론몰이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할아버지가 친일파였다고, 대학 다닐 때 친북세력이었다고 함께 돌을 던지자고 선동할 때 “그게 지금 무슨 상관인데”라는 말을 귀담아들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군대문제는 출신성분 문제와 다르다고 항변할지 모르겠다. 그럼 이렇게 물어보자. 당신에게 국적을 선택할 자유가 주어진다면 군대에 가는 걸 감수하고라도 택할 만큼 대한민국은 그렇게 매력적인 나라인가? 한국 국적을 버리는 자들에게 다 함께 돌을 던지자는 분위기가 솔직히 나는 무섭다. 과연 지금 상황은 인민재판과 얼마나 다른 것일까. 돌을 던지지 말자고 나섰다간 나까지 돌 맞을 것 같은 기분이다.

나는 군대와 국적을 저울질하는 건 온전히 개인의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쪽을 택하든 사회가 들고 일어나 비난할 일이 아니라는 얘기다. 물론 병역의무를 피하려고 이중국적으로 얌체짓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안다. 새로운 국적법은 그런 짓을 못하게 만드는 조치라 박수를 받았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주객이 전도됐다. 이중국적자에게 둘 중 하나를 택하는 선택의 자유가 있는 것처럼 말해놓고, 한국 국적을 택하지 않은 자는 용서치 않겠다고 협박을 하는 꼴이니 말이다. 이중국적을 가진 사람은 무조건 군대에 가게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겠다는 지금 분위기야말로 이중국적자들이 한국 국적을 쓰레기통에 던지고 싶게 만드는 또다른 이유가 아닐까. 문득 지금 우리가 만든 희생양 가운데 제2의 황우석 박사나 제2의 박찬호가 나오면 어떤 반응이 나올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