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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희가 만난 첸 카이거
2001-07-20

“아시아 영화 중심지 한국, 그래서 왔다”

한국영화 <몽유도원도>찍는 첸 카이거, 신작 구상과 50년 삶을 말한다

<패왕별희>의 첸카이거 감독이 지난 7월12일 내한했다. 한국영화 <몽유도원도>를 연출하기로 결정한 이후의 첫 방문이다. 장이모와 함께 중국영화를 세계에 알린 중국 5세대 감독의 선봉장 첸카이거 감독은 1992년 <패왕별희>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면서, 거장의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현재 자신의 첫 할리우드영화 <킬링 미 소프틀리>의 개봉을 앞두고 있으며, 가을에 찍을 <베이징 바이올린> 촬영이 끝난 직후인 내년 2월경에 <몽유도원도> 촬영에 들어간다. 한국의 전통설화를 다룬 작품이어서 더욱 설렌다는 첸카이거 감독을 그의 열혈팬을 자임하는 조선희 <씨네21> 전 편집장이 만났다. 편집자

조선희(이하 조) 한국에는 언제 왔나.

첸 카이거(이하 첸) 지금 방금. 도착한 지 채 2시간도 안 됐다.

조 촬영장 사진을 많이 봤는데, 스탭드랗고 배우들 사이에 있는 걸 보면, 키가 껑충하게 커서 꼭 학생들 사이에 있는 선생님 같았다. 오늘 보니까 정말 키가 큰데, 몇 센티미터인지.

첸 한국식으로는 184cm정도. 6피트 2인치이다. 근데 원래 키 큰 게 학생이고 키 작은 게 선생님 아닌가.(웃음)

조 영화감독은 몸을 혹사하는 직업이고 게다가 당신은 지구를 몇 바퀴씩 돌면서 작업하는 감독인데, 건강한가.

첸 건강하다. <몽유도원도> 끝내기 전까지는 괜찮을 것이다.(웃음)

조 다음 기착지가 한국이 될 가능성이 70%인데, 기분이 어떤가.

첸 아직 <킬링 미 소프틀리> 후반작업이 한달 정도 남아 있다. 그뒤 베이징에 가서 <베이징 바이올린> 작업을 끝내고, 그뒤에 <몽유도원도>에 착수할 거다. <몽유도원도>는 많은 장면을 한국에서 찍게 될 것이다. 예술성과 상업성을 겸비한 영화로 만들고 싶다.

<몽유도원도>로 한국의 설화세계에 접근

조 <몽유도원도> 프로젝트는 무엇에 끌렸나.

첸 이주익씨가 프로듀서라는 점.

조 그건 외교적인 발언이고(웃음) 진짜 이유를 얘기해달라.

첸 원작을 보는 순간 든 생각이 있다. 좋은 시나리오가 있어야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영국에 가면 영국에 쫓아오고, 미국에 가면 미국을 찾아온 이 사장의 끈질긴 설득도 있었지만, 최종적으로는 그 스토리와 인물에 끌렸다. <몽유도원도>는 현대적인 감성을 담아낼 수 있는 이야기다.

조 첸 감독에게 한국은 외국이다. 하지만 한국과 중국은 인간과 자연에 대한 생각, 그 철학적 기반이 상당히 비슷하다. 그래서 우리 설화나 아랑이야기도 어쩌면 낯설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첸 한국문화에 대해 두 가지 얘기를 하고 싶다. 첫째, 조선문화는 매우 아름답다. 중국인들에 비해 한국인들은 표현에 능하다. 가무를 즐기는 것도 그렇다. <몽유도원도>에도 나타나는 그러한 아름다운 감정표출을 예술적으로 화면에 담아보고 싶다. 둘째, 나는 호금전 감독을 존경하는데, 호금전은 <공산영우><산중전기>등 한국의 아름다움을 담은 영화들을 찍었다. 나는 그것들이 지금의 <와호장룡>을 있게 한 기초가 됐다고 생각한다.

조 <몽유도원도>는 고대설화라 복색이라든지 사회상에 관한 자료도 충분치 않을 텐데, 그거슬 영화적으로 표현하는 데 대한 걱정은 없는가.

첸 <몽유도원도>는 고대물이지만 현대인의 감각에 맞는 이야기다. 현대인이 보고도 즐거울 수 있는 영화를 만들 작정이다. 그래서 고증에는 그다지 연연하지 않는다.

조 <해자왕><황토지><현 위의 인생>같은 초기 작품들에는 상당히 신비주의적이고 초월적인 화면들이 있다. <해자왕>이나 <황토지>는 리얼리즘에 입각한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래서 설화적인 표현에 익숙할 것 같은데.

첸 나는 이 영화를 국제성 있는 작품으로 만들려고 한다. 따라서 내게는 <몽유도원도>를 얼마나 신비주의적인 영화로 만드느냐보다 세계의 관객에게 얼마나 많은 감동을 줄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동양에는 동양의 미학이 있고 서양에는 서양의 미학이 있고 그 사이에는 거리가 상당히 있지만, 세계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최근 <타임><뉴스위크>와 인터뷰했는데 그때 기자가 아시아영화의 중심이 한국으로 옮아오고 있다는 말을 하더라.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그래서 이렇게 공부도 할 겸 한국에 와 있다.(웃음) 진담이다.

조 한국쪽 스탭들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거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니까.

첸 한국영화를 최근 많이 봤는데, 직업적으로 영화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한국영화는 최근 형식적인 면에 있어서도 상당한 발전을 한 듯하다. 다이내믹하게 변화하는 영화사회를 보는 것은 나로서는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조 어떤 한국영화를 보았는지.

첸 <태양은 없다> 같은 영화는 상당히 재미있게 봤다. 이정재와 정우성, 두 청년은 연기를 아주 잘하는 것 같다. 나는 지금 영국에 있지만, 중국에 있는 친구들이 한국영화를 보고 상당히 감동받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려준다.

할리우드 시스템에서 영화찍기

조 <킬링 미 소프틀리>는 MGM영화다. 그동안 외국자본으로 영화를 많이 찍었지만, 처음으로 할리우드 시스템 안에서 영화를 찍은 것이다. 그 경험이 앞으로의 작업에 어떤 영향을 줄까.

첸 아시아인이 한명도 없는 데서 영화를 찍기는 처음이다. 상당히 좋은 경험이었다. 중국에서는 감독이 태양처럼 모든 일의 중심에 있다. 영국에서도 물론 그렇지만, 아시아사람이 서양이야기를 찍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스탭이나 촬영기사의 도움을 많이 얻어가면서 중심을 찾아 영화를 찍었다. 그렇지만 익숙지 않은 부분도 있었다. 예산이 큰 영화이다보니 스케줄이 상당히 엄격하게 관리되었다. 일종의 공업적 생산 시스템 속에서 감독도 시간적인 컨트롤을 받는 거다. 특히 겨울의 런던에서 촬영할 때, 짧은 일조시간 안에 영화를 찍는 건 상당히 어려웠다. 게다가 거기는 모두 조합원들이라서, 그 와중에도 1시가 되면 꼬박꼬박 점심을 먹여야 했다. (웃음)

조 <현 위의 인생>부터 외국자본으로 찍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90년대 들어 작품세계가 많이 달라졌는데, 외국자본으로 영화를 찍으며 자신의 필모그래피에서 얻은 것과 잃은 것이 있다면.

첸 그건 영토싸움과 같은 거다. 초기작 몇편은 순수하게 만들어 사람들에게서 감동을 끌어내는 작품이었다. 그런 작품들을 어느 정도 했다고 생각했을 때, 아 내가 여기까진 할 수 있구나, 그러고선 또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그렇게 영토를 넓혀나간 거다, 끊임없이 품격을 변화시키고 영화의 색깔에 변화를 주면서 해나가는 것이 용기있는 태도이고 의미있는 일이다. <킬링 미 소프틀리>는 내가 영국사람들을 데리고 영화를 찍을 수 있다는 걸 증명해준 경우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 영화를 잘 찍었다고 생각한다. (웃음) 앞으로 찍을 <베이징 바이올린>은 여태까지와 달리 요즘 베이징사람들 이야기이고 보통사람들 사이의 일과 사랑을 다룬다. 감독의 내면이 엿보이는 이런 작품을 만들면, 어떤 이는 첸카이거 초기작 냄새가 난다고 할 것이고, 또 어떤 이는 전혀 새로운 작품이라고도 할 것이다. 영화감독의 행로는 어린아이가 성인이 되는 것과 비슷하다. 한번 성인이 되고 나면, 다시 아이로 돌아갈 수 없다. (웃음)

“<황토지>의 열정은 잊지 않는다”

조 한국에도 첸카이거 감독 팬이 많고, <황토지>나 <해자왕>은 시네마테끄의 인기 레퍼토리였다. 그때부터 첸 감독을 좋아했던 사람들은 그야말로 `황토주의자들`이어서, <풍월>이나 심지어 <패왕별희>까지도, 양심적 지식인의 훼절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다. 나는 그게 이미 성인이 된 사람을 어린아이로 되돌리려는 수작이라고는 생각하지만, 그래도 당신이 전공에서 너무 멀리 나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첸 어린아이로 돌아가는 방법이 하나 있긴 하다. 과거에 어떤 영화를 찍었는지 잊어버리는 거다. 나는 전작들을 완전히 잊고 새 작품을 하려고 노력한다, 쉽진 않지만. 자기의 필모그래피를 등에 없고 새로이 메가폰을 잡는다는 것은, 스스로에게 압력을 가하는 것이거나 스스로를 교만하게 만드는 일이다. 물론, <황토지> 찍던 때를 나는 아직도 그리워한다. <황토지>는 중국산 카메라를 가지고, 30명의 사람으로, 자동차는 3대를 쓰면서, 7만달러를 써서 만든 영화다. 영화지식도 별로 없이 열정만 가지고 찍었었다. 그때의 열정만큼은 늘 간직하려 한다. 그레 바로 어린애로 돌아갈 수 있는 비결이다.

조 92년인가, 첸 감독이 뽑은 `좋아하는 영화 베스트 10`에 스코시즈나 코폴라 영화들과 함께 10번에 <황토지>가 들어 있었다. 실수인지... (웃음)

첸 실수 아니다. (웃음)

조 (웃음) 상당히 뻔뻔하다.

첸 역시 어린아이와 어른의 비유를 하자면, 어린아이는 아무리 저항을 해도 어른이 되지 않을 수 없다. <황토지>는 나에게 첫사랑과 같은 작품이다.

조 데뷔작은 그래서 특별한 것 아닐까. 어떤 사람에게 딱 한마디만 말할 기회를 주겠다고 했을 때, 그 사람이 하게 될 정직한 말 한마디가 데뷔작일 거다. 이런 비유도 가능할 것 같다. 어떤 사람이 고문당하기 전에 “이전에 내가 한 말만 진실이고 앞으로 내가 하는 말은 믿지 말라”고 하는 것. 영화감독에게 고문이라는 건 명성이라든가 권력이라든가 거대예산이라든가 영화의 규모라든가 영화기술 이런 것의 유혹일 텐데.

첸 일리있다. 하지만 나는 `How to Survive Success`, 즉 어떻게 성공에도 살아남는가를 늘 생각한다. 그런 인식이 내게는 있다. 영화에는 물론 돈이 많이 들어가지만, 그걸 신경쓰면 좋은 영화를 만들지 못한다. 내가 견지하는 건, 내가 좋아하는 건 하고 좋아하지 않는 건 절대로 안한다는 거다.

조 영화는 엔터테이먼트이고 비즈니스이기도 하지만, 작가 개인의 예술 창작행위이기도하다. 당신에게 영화만들기란 어떤 것인가.

첸 상당히 중요한 질문이다. 나는 그 질문을 매일 스스로에게 한다. 감독이라는 게 많은 사람에게 영화를 보이고 싶어하는 존재인데, 어떤 관객은 <황토지>를 좋아하고 또 어떤 관객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니, 사실 감독은 자유로운 직업이 아니다. 요리사오도 같다. 요리사는 모든 사람들이 맛있다고 하는 음식을 만들기도 하지만, 특별한 친구가 왔을 때, 그만을 위해 특별한 요리를 만들기도 하지 않나. 어떨 땐 나 스스로가 내 작품의 관중이기도 하다. 관객으로서 나는 오락영화를 보면 재미있고 진지한 영화에서는 감동을 받는다.

영화창작의 본질에 대해

조 기본적으로 관객, 즉 수용자에게 상당히 신경을 쓴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지식인 작가로서의 자의식은 졸업햇다고 할 수 있나.

첸 지식인이라는 얘기, 재미있다. 얘기하자면 길지만. 나는 베이징에서 자랐고, 가정환경은 엄했고, 그러다가 문화대혁명이 일어난 시절을 겪었다. 그런 게 모두 지금 나의 성향을 이룬 게 아닌가 한다. 질문에 답하자면 나는, 생활을 좀더 낙관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조 소설이든 영화든 마찬가지인데, 이야기를 들어 잇는 창작품은 보상이나 구원일 수 있다. 장 그르니에는 글쓰기가 강박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라고 했고, 카뮈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기 우해서 창작을 한다고 했다. 당신도 그런 식이 아닐까. 50년대 이후 중국사회를 헤쳐오면서 나름대로 활로를 찾아낸 것이라고 보는데.

첸 그 얘기를 하니 갑자기 엄숙해진다. (웃음) 나는 베이징전영학원 다닐 때 외국영화들을 많이 봤다. 유럽, 일본, 그리고 옛소련의 영화들. 아버님이 영화감독이었지만 사실 영화에 대한 이해는 깊지 못했다. 그 당시 내가 봤던 영화의 감독들은 자신들의 눈에 비친 세상을 그렸고, 나는 그들의 눈을 통해 보여진 세상을 보았다. 마찬가지로, 나 스스로 내 감정과 사고를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게 영화창작의 본질이 아닌가 한다. 중국은 5천년 역사를 갖고 있는데, 왜 그렇게 불합리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늘 일어나는 것일까. 거기에 대한 대답은, 우리가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거다. 한때 나는 천진하게도 영화를 가지고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인성이라는 것은 변할 수가 없는 거구나, 하는 결론을 얻었다. 나의 일은 인성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나타내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표현을 하면 할수록 자기해방도 커진다. 지금 질문에 말려들었는데, (웃음) 엔터테인먼트로서의 영화를 만들 줄 알기도 하지만, 실은 나도 `그쪽` 감독이다. (웃음)

조 (<나의 홍위병 시절-어느 영화감독의 청춘>(한국판,1991년)이란 책을 보이며) 혹시 이 책, 본 적 있나.

첸 (통역자가 책 제목을 읽어주자) 91년에 내가 쓴 거 맞다. 하지만 한국 판이 나온 것은 몰랐다. 인세도 받은 적이 없고. (웃음) 이 책은 일본에 갔을 때 고단샤가 제안해서 쓰게 됐다. 재미있게도 중국에서는 바로 2개월 전에 이 책의 초판이 나왔다.

조 아, 그런가. 아닌 게 아니라 당시 이 책을 보면서, 중국에서 이 정도 표현이 가능한 건가 의구심을 가졌었다. 사실 나는 첸 감독의 영화를 보기 전에 이 책을 봤고, 많이 울었다. 한 영화감독의 수기로 읽기보다는, 한때 중국혁명을 신봉했던 세대로서 문화혁명에 대해 막연한 환상을 갖고 있었는데 그 부분을 냉정하게 잘라내준 책이었다고 기억한다.

첸 완전히 이해하겠다. 중국이라는 나라는 너무 크고, 이해 못할 일이 많이 일어난다. 예를 들어 나는 아내(배우 첸홍)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데, 문화대혁명 때 내 경험을 얘기해도 아내는 못 미든ㄴ다. 하지만 문화혁명 때의 일을 모든 게 잘못됐다고 부정할 수는 없다. 그 당시 사람들은 모두 몽상을 햇는데 그 몽상이 우리의 영도자에 의해 이용을 당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평탄한 삶을 살지 않은 셈인데, 문화혁명 시절을 겪은 뒤 나중에 내가 20대를 맞이해서 중국에 개혁개방 바람이 불었으니, 사회가 완전히 다른 각도로 나가기 전에 그런 경험을 했다는 것이 나한테는 좋은 경험이었다. 거기에는 희극성도 들어 있다.

조 당신은 대단히 성능 좋은 여과장치를 갖고 있는 듯하다. <황토지>를 보고 그 안의 균형감각에 굉장히 놀랐다.

첸 우선, 난 생각이 많은 사람이다. 그리고 중국문화에는 어떤 역량이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바둑기사 이창호를 예를 들면, 그의 별명은 석불이라고 한다. 50장의 사진을 찍었는데, 나중에 보니 다 똑같았다더라. 나 역시 중국역사에 대해, 문화혁명에 대해 그런 자세를 갖고 있다. 문화혁명 이후 많은 사람들이 다른 이들에게 죄를 물었다. 나는 이 책에서 나 스스로에 대한 고발을 하고자 했다. 상당히 많은 잘못이 있었고, 나도 그 일부였다는 것이다.

조 지금은 중국 정부로부터 총애를 받고 있는 시즌인가.

첸 (웃음) 아무도 나를 총애하지 않는다. 총애를 필요로 하지 않는 시기에 이미 들어섰고. 동양문화의 특징이 아버지 노릇을 하는 건데, 나는 이미 아버지 세대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 큰아들이 4살인데 내가 아버지라는 느낌이 안 든다. 나는 내가 그 아이의 형 같다. (웃음)“이제는 관용이 나의 방법”

조 그동안 중국 정부와 끊임없는 애증관계였는데, 그런 정부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용서하는지.

첸 중국이라는 나라는 너무 크기 때문에 어느 순간에 급회전을 하지 못한다. 옳지 않은 시스템을 나도 아주 싫어하지만, 중국은 그런 것을 갑자기 바꿀 수 없는 나라다. 그래서 나는 긴 세월을 두고 그것을 지켜보고 있다. 그 말은 결국, 내가 감정적이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조 중국인으로 태어난다는 건 행복일까 불행일까. 20세기에 중국도 대다한 격동의 시기였지만 원래부터 중국 역사는 변화무쌍했다. 민족과 민족의 투쟁의 역사이고 200~300년된 왕조들이 흥망성쇠하는 역사였다. 그래서 중국인은 늘 정치적으로 시련을 겪고 정신적으로 수양을 하는 그런 운명 아닌가 싶다.

첸 아마 나약했다면 불행의 시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걸 스스로 결정할 수 없듯이. 남은 일은 그 운명 속에서 어떤 경험을 하며 그것을 겪어나가는가 하는 것이다. 나는 행운아이다. 경험하기 힘든 많은 일들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유감스러운 과거는 하나도 없었다. 있다면 한창 젊었을 때 여자친구가 없었던 것 정도? (웃음)

조 중국에는 시나리오 사전검열이 아직 있는데, 그것 때문에 못 찍은 영화는 없나.

첸 물론 있다. 문화대혁명에 관한 영화를 찍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도 어려운 일이다. 책에도 나와 있듯, 나는 농촌으로 하방됐었다. 십대에 내가 보고 겪은 이야기를 영화화하고 싶다.

조 첸 감독도 이제 50이다. 나이 50이 되어 바라보면 무엇이 보이는지.

첸 지천명이다. 세상을 보는 눈이 상당히 관용적으로 된다. 젊었을 때는 항상 내가 옳고 남이 틀린 것 같았는데 말이다. 이제는 관용이 나의 방법이다. 대담 조선희/전 <씨네21> 편집장정리 최수임 기자 sooeem@hani.co.kr 사진 이혜정 기자 hyejung@hani.co.kr디자인 한정연 han7329@hani.co.kr

▶ 조선희가 만난 첸 카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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