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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주의의 균열과 공포, <더 로드>

끝없이 반복되는 도로의 악몽 위에 가족주의의 악몽이 겹쳐지다.

한눈에도 화목해 보이지 않는 한 가족이 좁은 차를 타고 여행을 시작했다. 행복한 크리스마스 이브. 가족들의 투덜거림과 가식적인 웃음으로 가득 찬 이 자동차 여행은 처음부터 무언가 불길함을 안고 있다. 익숙한 고속도로 대신 낯설고 어두운 지름길을 택할 때부터 공포의 기운이 조금씩 감지된다. 시간은 7시30분에 멈춰 섰고 길은 가도가도 끝이 없다. 가족들은 때마침 길 위에 나타난 하얀 옷의 여자와 아기를 태워준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불행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가족들 사이의 비밀이 하나둘 밝혀지고 그들은 차례로 시체가 된다.

실제로 1918년 네브래스카 주, ‘마르콧’이라는 나선형 구조의 도로가 개통된 다음날, 임신부 한명이 죽은 사건이 있었다. 그뒤, 이 도로에서는 평균보다 월등히 높은 교통사고 사망률이 나타나고 있는데, 1997년 크리스마스 이브에도 한 가족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사건이 일어났다. 영화는 이 기이한 도로의 사건을 모티브로 하여 평범해 보이는 가족 내부의 불협화음과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듯한 어두운 도로를 맞물리며 공포를 자아낸다. 죽음의 정체는 결코 드러나지 않고 오직 죽음의 기운만이 도로 위를 꽉 채우는 순간, 시간도 공간도 영원히 정지해버린 듯한 순간, 공포는 갑자기 출몰한다기보다는 천천히 숨통을 조인다. 게다가 명확한 해답을 주지 않는 결말은 반전까지는 아니지만, 꿈과 현실 사이에서 나름의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기며 영화 전체의 공포를 다시금 추론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야기의 모호함이 곧 영화적 완성도 혹은 신선함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더 로드>는 저예산영화답게, 화려한 기술이나 출연진보다는 흥미로운 소재에 승부수를 두지만, 그 소재를 끌고 나아가는 과정은 단순하다. 공포가 무르익을수록 가족 구성원 각각의 비리가 폭로되는 설정과 가족주의의 균열과 공포가 연결되는 양상, 그리고 그것이 처참한 시체로 귀결되는 상황은 이제는 더이상 날카로운 통찰력이라고 볼 수 없다. 봇물처럼 터져나오는 인물들의 갑작스런 고백, 공포에 대한 그들의 피상적이고도 직설적인 반응은 가족주의의 어두운 이면에 대한 영화의 진부한 시각을 전달할 뿐이다. 그리하여 이 영화는 가족주의에 대한 적당한 비판과 적당한 공포의 전략, 그리고 ‘저예산’이라는 무기로 B급영화의 미덕 주위에서 심심하게 배회하고 만다. 2003년 부천영화제 상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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