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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먼지 속에서도 빛을 뿜는 검의 신화, <칠검>
김현정 2005-09-27

검객에게 검은 신체와 에너지의 연장과도 같다. 내부에서 뻗어나온 기는 손끝을 거쳐 검으로 이어지며 직선을 완성하고, 그 선은 다른 검과 맞부딪치기 위해 대기를 가르는 곡선을 그린다. 영혼과 금속이 일체가 되어 빚어내는 검광(劍光). 서극이 18반의 무기 중에서도 굳이 검을 택한 건 그 때문이 아닐까 싶다. 서극은 양우생의 <칠검하천산>을 각색하면서, 천산에서 내려온 검객들이 아닌, 일곱 자루의 검에게 더 많은 애정을 주었고, 사막의 먼지 속에서도 빛을 뿜는 검의 신화를 완성했다.

이 영화의 원작 <칠검하천산>은 김용과 함께 무협소설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양우생의 초기대표작이다. 양우생은 <백발마녀전>과 <칠검하천산>의 인물들을 엮어 느슨한 시리즈를 만들었지만, 영화 <칠검>은 그 관계를 무시하고 서부영화와도 같은 짧은 드라마만을 남겨두었다. 아직은 복명(復明)운동의 기운이 남아 있는 청조 초기, 황제는 무예수련을 금하는 ‘금무령’을 전국에 포고한다. 한때 관직에 몸담았던 풍화연성은 군대를 이끌고 무예를 익힌 자들을 살해하여 현상금을 받고 사는 악한이다. 풍화연성의 동료였지만 지금은 죄를 씻고자 하는 부청주(유가량)는 그가 반청(反淸)집단 천지회의 근거지인 무장을 덮칠 계획이라는 사실을 알고, 마을의 젊은 남녀 지방과 원영(양채니)과 함께 고수들이 은거하고 있는 천산으로 향한다. 천산의 고수 회명은 제자인 초소남(견자단)과 양운총(여명), 목랑, 신용자를 내려보내 마을을 구하게 한다.

<칠검>은 이토록 간결한 드라마에도 불구하고 앞뒤가 맞지 않고 비약이 심하다. 천지회에 반감을 품은 양운총의 사연은 무성의하게 내처지고, 초소남과 고려 여인 녹주(김소연)의 느닷없는 사랑은 지루하게 영화의 발목을 붙들 뿐이다. 그러나 엉망진창 이야기를 들고 분투하는 평범한 감독들과 달리, 서극은 드라마를 만드는 데 실패했다기보다 아예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느낌을 준다. 이제 그에게 대사와 상황과 이야기는 액션을 만들기 위한 구실이고, 비장한 협객의 한마디를 넣기 위한 배경이 되어버렸다. 혹은 원영이 나귀를 타고 피리를 불며 산그늘 희미한 햇빛 속에서 나타나는 화폭처럼, 그려보고 싶었던 동양화를 둘러싼 변명이거나. 그리하여 <칠검>은 오직 검을 보고 그 소리를 듣는 영화가 되었다. 유룡검이 울고 천폭검이 흘러내리고 청간검이 태고의 빛을 반사하는 순간만은, 인간사는 잠시 검의 다툼에 자리를 내어주고, 한 발자국 물러선다.

서극은 풍화연성의 군대가 무인들을 살육하는 첫 장면에서 이미 측면시야를 가린 말처럼 앞만 보고 내달리기 시작한다. 허공 속에 거대한 신화의 세계를 띄워놓았던 <촉산전>의 서극은, 이번에는 땅에 발붙인 사실적인 무협영화를 만들었다고 말했지만, 온갖 방법으로 사람을 죽이기 위해 잠시 그 전제를 무시한다. 풍화연성의 군대는 중국 무협의 복식과 무장에 연연하지 않는다. 고스족처럼 분장하고 차려입은 병사들은 검과 창으로 사지를 끊고 목을 치지만, 믹서기의 칼날을 닮은 방패겸 공격무기로 살을 갈아내고, 산 사람의 머리를 프로펠러처럼 빨아들이는 기괴한 무기도 사용한다. 그것들의 공통점이라고는 오직 하나, 죽이되, 잔인하게 죽인다는 사실이다. 잿가루 색으로 뒤덮인 화면도 먼지 위에 뿌려진 핏줄기와 붉은 깃발을 두드러지게 받쳐주면서 비현실적인 악몽의 경지로 도약한다.

나쁘게 말하자면 이 모든 건 그저 멋이다. 지나치게 장중한 가와이 겐지의 음악은 그칠 줄을 모르고, 속도를 늦춘 카메라는 절단된 육신을 낱낱이 비추고, 한명이 수십명을 대적하는 동안 그 나머지 수십명은 뭐하고 있나 싶다. 7 대 300이라는 황당무계한 비례식을 이루기 위해 이야기의 연쇄와 논리적 아귀는 아쉬움도 느낄 새 없이 휘발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건 멋을 위한 멋은 아니다. <칠검>은 드라마를 위한 시간은 무신경하게 낭비할지언정 액션을 위한 동작은 일초식도 낭비하지 않기 때문이다. 베고 받아치고, 찌르고 막고, 뛰어오르고 착지 지점을 차단하는 일련의 과정은, 공격에 따르는 방어와 그 방어를 무화하는 공격이므로, 버릴 데가 없다. 짧은 고리 수십개가 순식간에 뻗어나오는 사슬처럼, 하나만 빼더라도 전체가 붕괴한다.

부청주가 이끄는 칠검이 무장을 습격한 풍화연성의 군대를 제압하는 첫 번째 대형 전투신은 전광석화란 이런 거구나 싶은 순간들로 채워진다. 중국 시와 노래에 애착을 가진 양우생의 풍류가 사라진 것은 아쉬우나, 검과 육체의 움직임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서극은, 금세 눈길을 빨아들인다. 쿵쿵, 쿵쿵, 쿵쿵. 좁은 공간에 인물을 몰아넣고 빠르게 끊어치는 서극의 액션을 보다보면 검날의 속도처럼 심장 고동이 빨라지고 가슴이 두근거린다. 칠검이 풍화연성의 성을 기습하는 대낮의 공격과 마지막 결전도 마찬가지다. 한 자루의 검이 공격자와 방어자의 입장을 뒤집는 순간 빼앗긴 다섯 자루의 검은 잠깐 허공을 날아 마땅히 검을 가져야할 자의 손으로 자석처럼 흘러들어간다. 그 시각적인 쾌락은 쿨하고 싶어서 비웃어왔던 권선징악의 이치와 한번에 달라붙어 오랫동안 잊고 있던 재미를 일깨운다. 순수한 무협의 즐거움을, 나쁜 자를 처단하는 쾌감을, 묻어두었던 촌스러운 기쁨을.

무형의 에너지와 상상을 사랑하는 서극은 그한편에서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협객을 그리워하는 듯도 하다. 죄의식이나 자기방어에 기대고 있는 세 사람과 달리 천산에서 내려온 네명의 검객은 마을을 지키는 일에 목숨을 내걸 필요가 없는 이들이다. 나머지 세 사람 또한 고작 며칠을 함께 보낸 초소남의 위기를 나 몰라라 해도 괜찮다. 그러나 부청주는 칼날의 산에 던져져도 불지옥에 떨어져도 칠검은 함께 죽고 함께 산다는 구식 경구를 읊어대며 일행과 함께 적의 성으로 달려간다. 유치하고 촌스럽다 해도 마땅히 지켜져야 하는 원칙. 진정한 무공의 경지에 다다르자면 마음이 순정해야만 한다고 한다. 무(武)의 기예의 극치를 꿈꾸는 서극의 영화에서 협(俠)의 정신을 느끼는 건 그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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