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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된 욕망을 자재로 구축된 미로 같은 세상, <갇힌 여인>
홍성남(평론가) 2005-12-20

1970년대 초반에 루키노 비스콘티는 자신의 마지막 영화가 될지도 모른다는 꽤 비장한 생각을 갖고서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를 스크린 위로 옮겨내려는 작업에 착수했지만 결국 결실을 맺지는 못했다. 해롤드 핀터가 동참했던 조셉 로지의 뒤이은 ‘프루스트 프로젝트’도 실현에 이르지 못하긴 마찬가지였다. (현대)영화는 알랭 레네의 예에서 보듯 프루스트로부터 신선한 자극과 심원한 배움을 드물지 않게 구해왔음에도 방대함과 심오함과 복잡함이 뒤엉킨 프루스트의 실지(實地)마저 감히 정복하진 못했다. 실제로 영화화 프로젝트에 돌입했으면서도 그것에 대해 미신에 가까운 두려움을 가졌었다는 비스콘티의 태도는 프루스트란 대작가를 곤혹스럽게 대하는 영화 자체의 전반적인 태도와 통하는 데가 있지 않나 싶다.

영화가 프루스트에 대한 그 같은 두려움 혹은 무력감을 극복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은 최근의 일인데, 그 공로는 <되찾은 시간>(1999)의 라울 루이즈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다(폴커 슐뢴도르프의 <스완의 사랑>(1983)이 시기상으로는 앞선 프루스트 영화이지만 겉만 번지르르하고 전반적으로는 밋밋한 이 코스튬 드라마에서 어떤 영화적 ‘성취’를 발견하긴 어렵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마지막 편을 빼어나게 각색한 이 영화에서 그는 프루스트의 다층적인 세계가 영화의 마술적인 힘과 조화롭게 만날 수 있음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프루스트와 영화’라는 이슈를 고려할 때 좀더 놀라워해야 할 ‘사건’은 루이즈의 선구자적인 영화가 나온 바로 다음해에 샹탈 애커만의 <갇힌 여인>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프루스트의 텍스트에 다가가는 쪽인 루이즈와 달리 그것을 영화감독이 자기쪽으로 끌고 오는 식으로 만들어졌다. 애커만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5편에 해당하는 <갇힌 여인>(La Prisonniere)에서 핵심이 된다고 생각하는 설정과 주제를 추출해내서 그것을 그녀 특유의 ‘내핍의 미학’ 안에 용해해 <갇힌 여인>(La Captive)이란 영화를 만들어냈다. 그렇게 축조된, 프루스트 영화로는 믿을 수 없게 단순해 보이면서도 주제와 형식에의 과감한 탐구를 포기하지 않는 이 영화는 프루스트를 대하는 ‘다른’ 식의 창의적인 태도가 존재할 수 있음을 입증해 보인다.

<갇힌 여인>에서 애커만이 들려주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완전히 자기에게 속하게 하려는 헛된 욕망을 가진 남자의 이야기이다. 영화는 아리안느(실비 테스튀)와 그 친구들이 해변에서 보내는 즐거운 시간을 담은 거친 입자의 홈무비를 보여주며 본격적인 시작을 알린다. 곧이어 이 필름을 보는 주인공 시몽(스타니슬라 메아르)이 소개된다. 그는 영사기를 뒤로 돌리며 필름 안에서 아리안느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지 그녀의 입 모양을 통해 알아내려 한다. 영화는 일찍부터 시몽이란 인물이 아리안느의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 면모를 기어이 ‘해석’해내려 애쓰는 자라고 규정해놓는다. 이어지는 시퀀스가 보여주듯이 그는 <현기증>(앨프리드 히치콕, 1958)의 스코티와 유사하게 욕망의 대상을 좇으며 은밀한 흥분감을 느끼는 자이기도 하지만 따지고 보면 행위의 방향에서는 스코티와는 반대쪽을 향하는 자이기도 하다. 스코티가 자기 머리 속의 아름다운 연인을 외적으로 재구성하려 안간힘을 썼다면 시몽은 연인의 내부에 있는 것들을 자기 머리 속으로 가져가려 하는 것이다. 이 집요한 해석자에게 주위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일은, 예컨대 TV에서 방영하는 오페라 실황도 창문 너머로 보이는 여자 연인들의 만남도, 우선적으로 자기가 전념하는 활동에 자극을 주거나 단서를 제공하는 것이다. 시몽에게 최고의 난제는 자신과 함께 살고 겉보기에는 자신의 통제 아래 있는 듯 보이지만 언제까지나 미스터리일 것 같은 아리안느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이다. 그런데 아무리 심원한 욕망의 대상이라 한들 ‘타자’를 투과해 도달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갇힌 여인>이 제공하는 한 가지 흥미로운 장면에서 시몽과 아리안느는 유리막이 사이에 놓인 욕실에서 모종의 관계를 갖는다. 영화 속에는 둘이 프로타주(frottage: 옷을 입은 채 성적 행위를 하는 것)를 행하며 묘한 쾌감에 이르는 장면도 있다. 이들이 암시하듯이 <갇힌 여인>은 타인을 물리적, 심리적으로 포획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에 서서 존재-인식론적 탐구를 행하는 영화다. 이와 관련해 또 다른 흥미진진한 상황은 시몽이 하얀 스카프를 두르고 외출한 아리안느를 찾아나설 때 벌어진다. 시몽이 생각하기에 하얀 스카프는 아리안느를 식별하는 중요한 실마리였지만 실제로 그것은 무용할 뿐이다. 아리안느가 아닌 다른 여자도 그것을 두를 수 있고 아리안느의 것이 그녀의 친구에게 건네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게 아리안느는 시몽의 행보와 시선에 포획되지 않고 그에게서 달아나버린다. 영화 도입부의 홈무비 안에서도, 결말부에서도, 아리안느는 저 멀리로 달아나는 여자였다. 그녀는 루이스 브뉘엘식으로 말하면 ‘욕망의 모호한 대상’이고 프루스트식으로 이야기하면 마르셀이 좇아다닌 ‘유령’인 것이다. 그래서 시몽으로 말하자면 그는 욕망을 자재로 구축된 미로 같은 세상 속에 스스로 갇힌 자가 되어버린다.

어떤 면에서 <갇힌 여인>은 달아나는 이과 헛되이 뒤쫓는 이 사이의 (물리적·인식론적) 쫓고 쫓김을 다룬 영화로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쓸데없이 화려한 시청각적 꾸밈을 허용치 않는 미니멀리즘적 스타일로 인해 무표정한 듯 보이는 이 영화는 눈과 귀를 예민하게 열어놓는 이들에게 통상적이지 않은 방식이긴 하지만 여하튼 그런 ‘추격전’에 걸맞은 긴장감을 안겨준다. 예컨대 시몽이 아리안느를 미행하는 장면에서 들리는 두 사람의 구두소리의 미묘한 차이는 압도적인 긴장감을 빚어낸다. 이때에 우리는 단순한 행위 너머로 언제 깨어질지 모르는 복잡한 심리를 보고 있는 것이고 그 인물들의 내면을 함께 걷는 것이며 어쩌면 초현실주의적이기까지 한 상태 속으로 빠져들기도 하는 것이다. 사실 <갇힌 여인>은 영화 전체가 이같은 표면과 심층의 풍요로운 갈등을 동력삼아 만들어졌고 그래서 깊은 곳으로의 매혹적인 여행으로 우리를 이끌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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