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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젊은 날의 꿈과 죽음과 사랑, <마법사들>

죽은 사람들이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추억을 나눌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진 사람들의 죽음은 살아 있는 사람들을 아프게 만든다. 그가 남기고 간 짧은 기억들이 아쉽고, 그 먼 길을 혼자 보낼 수밖에 없었던 산 자들의 무관심이 죄책감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가 버리고 간 무정한 세상을 꿋꿋하게 살아내야 한다. 송일곤의 <마법사들>은 불안한 젊은 날의 꿈과 거기에 얽힌 죽음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남녀 혼성 밴드였던 ‘마법사들’의 멤버들은 기타리스트였던 지은(이승비)을 추모하기 위해 3년 만에 재회한다. 그동안 드러머였던 재성(정웅인)은 강원도 숲속 카페의 주인이 되어 있고, 베이시스트였던 명수(정현성)는 음악과 사랑에 실패하고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계획하고 있다. 그들은 재성의 카페 ‘마법사’에서 옛 기억을 더듬으며, 더이상 노래하지 않게 된 밴드의 보컬 하영(강경헌)이 오기를 기다린다. 재성과 명수가 대화하는 동안 지은의 영혼은 나비처럼 그들 사이를 팔랑거리며 돌아다니고, 카페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마법 같은 공간이 된다. 그러는 동안 카페 ‘마법사’에는 예기치 않았던 손님(김학선), 전직 스노보드 선수였다가 입산한,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이제는 화두를 풀고 하산하는 스님이 찾아온다. 그는 산장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지은의 추모식과 마법사 밴드의 새로운 출발을 함께하게 된다.

영화는 배우의 연기를 통해 이야기를 전달한다는 공통점 때문에 종종 연극과 비견되곤 한다. 영화를 연극과 구별해주는 가장 큰 특징은 카메라라는 매체를 사용한다는 것인데, 이를 통해 영화는 연극이 가진 시간적, 공간적 제약을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이상 서사는 무대라는 한정된 공간과 현재성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송일곤 감독은 96분의 상영시간을 ‘원테이크 원컷’으로 견뎌내기로 마음먹으면서, 연극적인 요소를 강하게 부각시킨다. 카메라는 공연장의 관객의 눈처럼, 쉬지 않고 배우들의 동선을 좇는다. 그렇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자유롭게 과거와 현재를 넘나든다. 그것은 간단한 의상의 전환과 카페의 1층(현재)과 2층(과거)이라는 공간을 시간적으로 분할함으로써 가능해진다. 관객은 작품이 전제하고 있는 모종의 시간 감각을 자연스럽게 암묵적으로 동의하게 된다.

송일곤은 영화란 ‘빛과 사운드을 이용해 시간을 조각하는 작업’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현재 속에 과거를 어떻게 병치할 것인가는 그의 작품에서 중요한 문제이다. 전작 <꽃섬>에서 그는 세 여자의 여정을 쫓아가며 그들의 현재 속에 과거를 녹여내는 실험을 했었고, <거미숲>에서는 생사를 넘나드는 인물의 기억 속에서 과거의 상처와 현재의 욕망이 혼재되어 있는 상태를 보여주었다. <마법사들>에서 감독은 자신의 문제의식을 극단으로 밀고 나가 영화라는 매체의 형식적 실험을 감행한다. 재성이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 지은이 살아 있던 과거로 돌아가는 장면은 조명을 교묘하게 이용해 화이트 아웃되면서 분절을 이룬다. 영화 전반에 흐르는 후고 디아즈의 탱고 선율은 과거로 돌아가는 여행의 지표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원테이크로 인한 과도한 카메라의 동선 때문에 분산될 수 있는 감정선을 하나로 모아주는 역할을 한다.

주인공들이 밴드의 멤버라는 설정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영화에서 음악은 중요한 모티브다. 재성과 명수가 과거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은 그들이 고등학교 시절 녹음했던 음악 테이프이며, 네명의 주인공들에게 아프지만 아름다운 과거를 공유할 수 있게 해준 것도 마법사 밴드의 음악이었다. 그리고 3년 뒤 상처를 딛고 새로운 현재를 시작하기 위해 명수, 재성 그리고 하영이 다시 선택한 것도 음악이다. 낯선 손님이 그들과 쉽게 동화될 수 있었고 그들의 미래를 위한 최초의 목격자 역할을 할 수 있는 것도 그가 그리 유명하지 않았던 마법사 밴드의 음악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을 떠나 저세상으로 간 지은의 영혼을 불러오는 것도 그들이 다시 부르는 노래를 통해서이다. 이 영화에서 음악은 기억이고, 사랑이며 미래이다. 음악을 통해 영혼을 치유하고, 사랑의 기억을 되살리는 것은 <꽃섬>과 <>에서도 이미 등장했던 모티브이기도 하다.

<마법사들>에서 또 하나의 주인공 역할을 하는 것은 카페 ‘마법사’를 둘러싼 숲이다. 지은이 ‘실비아’라는 이름을 붙여준 이 숲은 재성에게 과거로 가는 통로이자 지은과의 추억이 여전히 살아 있는 곳이다. 지은의 죽음으로 재성은 숲속 카페에 은신하면서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가게 되고, 명수와 하영은 음악을 포기하게 된다. 하지만 명수가 지은의 죽음을 추모하며 만든 새 노래 <실비아>를 통해 이 숲은 과거에 매어 있는 공간이 아니라, 미래를 꿈꿀 수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지은의 죽음으로 가득했던 ‘실비아’가 잊혀진 영혼들이 방황하는 ‘거미숲’의 다른 이름이었다면, 이제 ‘마법사들’의 노래가 울려퍼지는 ‘실비아’는 살아 있는 사람들을 위한 생명력있는 공간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마법사들>은 원래 <디지털 삼인삼색 2005>에 실린 30분 남짓 되는 옴니버스 연작을 장편으로 확장한 것이다. 단편이 지은의 자살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다소 어두운 분위기였다면 장편에서는 밴드의 멤버들이 그녀의 죽음을 극복하고 새로운 현재를 찾아가려는 시작에 방점이 찍혀 있다. 스님의 에피소드가 신선한 재미를 주기를 하지만 영화 전반에 서사 자체의 새로움이나 재미를 찾아내기는 쉽지 않다. 그렇지만 한국영화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매체를 통한 영화적 실험이 96분을 흥미롭게 채워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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