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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조로운 공포, <크립>
장미 2006-06-13

파티장을 빠져나온 케이트(프란카 포텐테)는 택시를 잡을 수 없어 지하철역으로 걸음을 옮긴다. 간신히 표를 구해 플랫폼으로 들어가니 마지막 열차가 6분 뒤에 도착한다는 메시지가 전광판에 뜬다. 벤치에 앉아 잠시 선잠 속으로 빠져든 케이트. 정신을 차려보니 플랫홈에 홀로 남아 있다. 부리나케 입구쪽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입구는 셔터가 내려진 상태. “누구 없냐”는 외침에 답하는 이도 없다. 다시 플랫폼으로 내려가니 놓친 줄로만 알았던 마지막 지하철이 들어온다. 악몽과 같은 밤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각본과 연출을 겸한 크리스토퍼 스미스 감독은 ‘지하철에서 아름다운 여자가 겪는 극도의 공포’라는 아이디어로 이 영화를 시작했다고 한다. <크립>이 주는 공포의 핵심은 폐쇄적인 지하철 역사 안에서 벌어지는 한 여자와 괴한 사이의 추격전이다. 케이트에게 플랫폼과 긴 터널은 언제 어디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낯선 공간이지만, 괴한은 이 공간을 훤히 꿰뚫고 있다. 도망자가 부처님 손바닥 안에서 맴도는 듯한 긴장과 공포를 전하기 충분한 설정인데, 아쉽게도 <크립>은 보는 동안 단조로운 인상을 피하기 어렵다. 인물들이 돌고 도는 공간은 어디가 어딘지 좀처럼 구분하기 어렵고, 괴한의 등장으로 극대화돼야 할 공포의 순간들이 감칠맛을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크립>은 2차대전 때 방공호로 쓰인 역사가 있을 만큼 오래된 영국의 지하철역에서 촬영됐다. 세트가 흉내낼 수 없는 음습한 실제 공간을 충분히 활용하지는 못했지만, 이 영화에서 주연배우 프란카 포텐테의 연기만큼은 성실하다. <롤라 런> <본 아이덴티티>로 얼굴을 알린 그녀는 시종 괴한에 쫓기며 소리지르는 불행한 여자 역을 맡아 예의 스크린에서의 주장기인 ‘달리기’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크립>이라는 제목의 영어명은 creep. 이는 명사형일 때 ‘섬뜩해지는 느낌’ 혹은 ‘전율’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크립>은 전율을 느낄 만큼 무서운 영화는 아니다. 희생자들을 처참히 난도질하는 고어장면을 제외하면 관객의 깜짝 비명을 자아내는 재주는 부족한 편이다. 여주인공을 위협하는 괴한의 과거를 드러내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지만 설명이 친절하지 않다는 점도 마음에 걸린다. <크립>이 전해주는 공포는 어느 날 당신이 지하철역에 홀로 남아 이 영화를 되새겼을 때 잠깐 등 뒤가 서늘해질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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