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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영화를 사랑한 배우들 [5] - 정인기

스쳐지나도 기억에 남는 강렬함을 꿈꾼다

<그의 진실이 전진한다> <미성년자 관람불가>의 정인기

“이런 건 한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 쑥스러운 듯 뒤통수를 긁는 정인기의 얼굴에 난처함과 어색함이 동시에 어린다. 뒤늦게 연락이 닿은 탓에 모든 취재가 끝난 뒤 혼자 스튜디오에 서게 된 그는 의도와는 상관없이 ‘뒷북’을 쳐야 하는 입장. 이미 4명의 배우를 찍어놓은 단체 사진에 자연스럽게 붙여넣을 수 있는 모습을 연출하는 것이 이날의 첫 도전과제다. 시종일관 뻘쭘한 표정으로 걱정을 자아내던 그는 그러나 막상 촬영이 시작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천연덕스레 자유자재의 포즈를 선보인다. 만화책에서 막 오려낸 것처럼 ‘ㄱ’자 모양으로 팔과 다리를 꺾은 그가 풀쩍 뛰어오를 때마다 플래시와 폭소가 동시에 터진다.

“출연이라고 하기도 사실 민망하다.” <연애소설> <중독> <싱글즈> <주홍글씨> <주먹이 운다> <그때 그사람들> …. 한눈에도 화려한 필모그래피를 언급하자 그는 얼른 손사래를 친다. 영화 속 그가 맡았던 역할을 또렷이 기억해내기 힘들 만큼 스쳐가듯 출연했던 단역이 대부분이었던 탓이다. 하지만 독립영화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동안 너의 이야기 재밌었다. 난 그거면 됐다고 생각한다.” 기묘한 목소리의 울림이 압권이었던 <그의 진실이 전진한다>의 목사. 아들에게 모친 살해범 연기를 강요하는 <미성년자 관람불가>의 비정한 아버지. 그리고 얼마 전 미쟝센단편영화제 명예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한 <불법주차>의 뻔뻔하고 처연한 노숙자까지. 정인기는 특히 반전의 장치를 가진 작품 속에서 낯선 얼굴을 끌어내는 재주가 남달랐다. 파렴치함은 어느 순간 아픔에 자리를 내주었고, 권위는 어느 순간 위선이 됐다. 그만을 위한 단독 컷의 컨셉은 그렇게 잡혔다. 품 안에는 성경전서를, 바지 주머니에는 소주병을.

올해로 연기경력 16년째를 맞은 정인기는 다른 많은 배우들처럼 연극판에서 배우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노동운동이 상당히 힘을 발휘하던 시기였다. 민중배우가 되겠다는 꿈으로 연극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90년대 중반 ‘서태지와 아이들’을 필두로 한 대중문화가 전면에 부상하면서 연극계는 순식간에 많은 관객을 잃었다. 돌파구를 찾고 있던 그에게 우연히 연극판 선배를 통해 영화 출연 제의가 들어왔고, 그는 <구미호>의 저승사자 역으로 스크린에 첫발을 내디뎠다. “연기의 영역을 확장하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경제적인 부분도 컸다. 영화를 하면 단역으로 잠깐 출연해도 그때 당시 두달 정도 버틸 돈이 나왔으니까.” 연극과 영화 단역을 병행하며 생활하던 그가 독립영화와 연을 맺게 된 건 신재인 감독의 <그의 진실이 전진한다>에 목사로 출연하면서부터. “생각했던 이미지랑 다르다”는 감독의 말에 “내가 연극 경력이 몇년인데”라며 오기로 시작한 영화였지만, 결과적으로는 그에게 연기 인생의 전환점을 제시한 작품이 됐다. 짐짓 성직자의 위엄을 고수하던 목사에서 욕조에 사내의 머리를 처박는 냉혹한 고문관으로. 완성된 영화를 본 정인기는 화면이 비친 자신의 모습에 소름이 돋았다. 그때부터 그는 독립영화에 참여할 기회를 적극적으로 찾아나섰다. <돼지 멱따기> <세라진> <책을 읽거나 비둘기 모이주기>, 그리고 무엇보다 <미성년자 관람불가>. 피의자를 거세게 추궁하는 형사에서 아들에게 살인자의 혐의를 쓸 것을 강요하는 아버지로 변신한 정인기는 충격적인 영화의 반전을 한층 더 날카롭게 벼려냈다. 권위와 위선, 잔인함과 나약함이 한데 집약된 듯한 얼굴은 그에게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 최우수상을 안겼다. “충무로에 가면 거대한, 나를 압도하는 시스템에 눌리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반면 독립영화 작업을 할 때는 연기적으로 나를 훨씬 열어놓을 수 있다. 시스템에 구애받지 않는 창작의 자유로움을 느낀다고 할까.”

이른바 잘나가는 배우가 아니라면 으레 겪게 마련인 생활고를 그도 물론 겪었다. 극단에 갈 차비 300원이 없어 동네 한 바퀴를 돌며 빈병을 모은 적도 있고, 급히 돈이 필요해 출연료를 달라고 했다가 “돈만 밝히는 인간”으로 낙인찍힌 적도 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도배 기술을 배우러 다니기도 했지만, 그는 어느새 도배를 소재로 한 영화를 구상하고 있었다. “배우가 아니면 뭘 하고 살까, 고민을 한 적도 물론 있었다. 그런데 결국 배우 외엔 할 게 없더라. 다른 일을 한다면 난 분명 한달 만에 우울증에 빠질 거다.” 그렇다면 돈 안 되는 독립영화는? “내가 연기를 하고 있는 한 계속 해야 할 숙명적인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레옹>의 게리 올드만이 보여준 “삶에 찌들면서도 광기가 있고 동시에 나약한 인간 같기도 한” 연기에 전율을 느꼈다는 정인기는 관객의 기대를 끊임없이 배반하고 충격을 안겨줄 수 있는 강렬한 배우를 꿈꾼다. “기존에 보여주었던 모습과는 다른 새로운 무언가를 항상 보여줄 수 있는 배우, 아주 짧게 나오더라도 마음속에 깊이 박힐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다.” 그런 그의 길에 독립영화가 함께할 것임은 물론이다.

정인기 필모그래피

장편- <호로비츠를 위하여> <책을 읽거나 비둘기 모이주기> <신성일의 행방불명> <그때 그사람들> <싱글즈> <연애소설> <구미호> 등

단편- <불법주차> <미성년자 관람불가> <세라 진> <그의 진실이 전진한다> <돼지 멱따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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