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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9월11일 벌어진 살인의 해부, <플라이트93>
김혜리 2006-09-05

2001년 9월11일 벌어진 살인의 해부. 안전벨트를 매고 옷깃을 여밀 것.

1981년 예일대의 중국계 건축학도 마야 린은 논란을 뚫고 베트남 전쟁 기념물 설계공모에 당선됐다. 전사한 미군 5만7661명의 이름을 숨진 순서로 새겨넣은 야트막한 검은 벽, 그것이 마야 린의 기념비였다. <플라이트 93>이 구사하는 애도의 화법은 마야 린의 그것을 닮았다. 폴 그린그래스 감독은 엄격한 재연과 최선의 재구성이야말로 지금 영화가, 그리고 자신이 9·11 테러를 적절히 다룰 수 있는 방식이라고 판단했다. 1972년 영국군의 북아일랜드 시민 학살을 르포르타주의 문체로 재현한 감독의 전작 <블러디 선데이>(2001), 그리고 그 역동성을 응용한 첩보영화 <본 슈프리머시>(2005)를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놀랄 일도 아니다.

뉴저지발 샌프란시스코행 유나이티드 에어라인 93편(이하 UA93)은 2001년 9월11일 알 카에다 테러리스트에게 납치된 미국 민항기 4대 중 유일하게- 국회의사당으로 추정되는- 표적에 충돌하지 않은 채 추락했다. 기내 전화로 이미 3대의 비행기가 세계무역센터와 펜타곤과 충돌했다는 소식을 접한 UA93 탑승객은 필사적으로 저항했고 요동치던 비행기는 펜실베이니아에 떨어졌다. 폴 그린그래스 감독은 9월11일 지상의 항공청 및 군 관계자와 UA93의 탑승자들이 맞닥뜨린 혼돈과 경악의 한복판에 관객을 팽개친다. 크레딧도 없이 영화가 시작되면 코란을 읽고 정갈히 체모를 면도하는 젊은 테러리스트들의 숙연한 얼굴이 보인다. 터키석 빛깔 아침 하늘 아래 여행자와 승무원들은 뉴저지 뉴아크 공항으로 모여든다. 첫 출근한 책임자 벤 슬리니(벤 슬리니)의 쾌활한 지휘 아래 분주한 연방항공청에 잠시 뒤 아메리칸 에어라인 11편으로부터 “우리가 ‘비행기들’을 납치했다”는 테러리스트의 메시지가 날아든다. 녹음을 해독한 요원들의 표정은 어리둥절하다. “하이재킹…? 이게 몇년 만이야?” 그러나 옷 속에 들어온 날벌레처럼 미미한 이물감에서 출발한 비극은 일단 똬리를 풀자 급속히 숨통을 조여온다. 두 번째 비행기가 세계무역 센터에 충돌하자 연방항공청은 테러 경보를 발령한다.

9·11에 다가가는 <플라이트 93>의 접근법은 마이클 무어의 <화씨 9/11>과 대극이다. “하나의 사건을 또렷이 그리고 통렬히 주시하면 형상 속에서 그 사건보다 거대한 무엇, 시대의 DNA 같은 것이 보인다.” 폴 그린그래스 감독의 견해다. <플라이트 93>은 뚫어지게 9월11일을 쳐다본다. 영화 후반부의 시계는 실시간에 육박한다. 여전히 그린그래스는 생략의 기교를 극도로 경계한다. 그의 영화에서 거저 이루어지는 일은 거의 없으며, 행위의 과정은 낱낱이 제시된다. 일찍이 켄 로치 감독의 파트너였던 배리 애크로이드의 핸드헬드 촬영은 황망한 구경꾼의 시선처럼 출렁이면서도 긴요한 정보는 놓치지 않는다. 감독의 전작에 참여했던 세 편집기사- 과연 3인분 작업량이다- 의 솜씨는 손으로 잘게 뜯어붙인 양 거칠고도 민감하다. <플라이트 93>의 관객은 그날 거기 있던 인물들이 보았을 법한 광경만 보고 파악했을 법한 상황만 파악한다. 하지만 관객은 알고 극중인물들이 모르는 단 하나의 정보는 치명적이다. <플라이트 93>은 전반부에 UA93 기내와 지상을 오가며 고전적 교차편집을 구사한다. 그러나 아무리 긴장이 고조돼도 그들에게는 구원자가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저들은 끝내, 죽어갈 것이다. 냉정한 다큐드라마 <플라이트 93>은 그런 식으로 감정을 건드린다. 군데군데 빈 좌석이 희미한 위안이 되고 뒤늦게 달려와 탑승하는 사내의 모습에 한숨이 흐른다. 테러리스트와 승객이 알라와 여호와에게 각기 간구하는 음성이 엉킬 때 관객은 미치고 싶어진다. 떨리는 손으로 기내전화를 부여잡은 이들은 똑같은 한 마디를 지상을 향해 속삭인다. “사랑해요.”

폴 그린그래스는 유족을 포함한 100여명의 관계자 인터뷰와 정부의 9·11 조사위원회 보고서를 시나리오의 징검돌로 삼고 추체험으로 그 사이를 메웠다. 벤 슬리니 미 연방항공청 전국 매니저, 북동 지역 방공사령부 제임스 폭스 중령을 비롯한 관계자가 직접 자신을 연기했고, UA93에 탄 사망자들은 전·현직 승무원과 널리 알려지지 않은 배우들이 연기했다. 생존한 증인이 없는 기내 상황의 재구성을 위해 그린그래스는 마이크 리 감독식의 연기연출을 시도했다. 배우들은 촬영 전 2주 동안 한데 모여 91분의 비행을 통째로 상상하고 재연했다. 해석을 목표하지 않았으나 <플라이트 93>은 사태와 관련해 몇 가지 논점을 분명히 한다. 첫째 미군이 UA93편을 격추했다는 가설을 부인한다. 군과 정부는 그런 조치가 불가능할 만큼 연락이 느리고 비효율적으로 대처했다. 둘째, UA93의 승객은 추락으로 빚어질 추가 희생을 막기 위해 테러리스트에게 저항한 영웅이 아니었다. 부시 대통령과 일부 언론은 그들을 “시민 용사”로 포장했지만, 식기와 소화기를 무기로 테러리스트에 맞선 그들의 행위는 가장 자연스러운 자기 보존의 몸부림일 따름이었다. 폴 그린그래스 감독은 승객 중 누구도 이름을 부각시키지 않는다. 역습 개시의 위대한 신호로 회자된 대사 “자, 갑시다!”(Let’s Roll!)에도 특별한 강세를 두지 않는다. 도리어 상대적으로 주의를 끄는 쪽은 네명의 테러리스트들이다. 그들은 자신조차 겨우 납득시킬 만큼 연약해 보인다.

<플라이트 93>에는 태생적 구멍이 있다. 극히 생생한 매너로 재구성된 추측들은 ‘사실’ 사이사이에 배치돼 교묘히 뒤섞인다. 탑승자가 가족에게 마지막 전화를 걸 때 상대방 대사를 들려주지 않을 만큼 영화는 엄격하지만 기실 상상의 산물은 우리가 듣고 보는 장면이다. <플라이트 93>은 오도된 신념이 어떻게 테러를 일으켰는지, 워싱턴과 알 카에다가 쌓은 사연이 무엇인지, 이어진 미국의 전쟁이 얼마의 피를 흘렸는지 설명하려들지 않는다. 9·11의 명백한 인과관계와 역사적 심판을 기대하는 관객에게 <플라이트 93>은 불만스러울 터다. 그러나 세계무역센터가 토해낸 만장(挽章)처럼 시커먼 연기는 아직 우리의 시야에서 걷히지 않았다. <플라이트 93>은 흐린 시계(視界)에서 성취한 괜찮은 이륙이다. 9·11 사태를 상기하기 위해 도대체 영화가 필요하냐는 물음은 별개 논제다. <플라이트 93>의 정해진 결말을 어떤 식으로든 ‘기다리는’ 동안 관객은 분열적인 죄책감을 맛본다. 그 끈적끈적한 가책은 우리가 이 모순덩어리 세계의 일원이기에 치러야 하는 피 같은 세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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