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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다른 시각적 호사를 누릴 기회! <노이 알비노이>

피오르드 해안과 아이슬란드의 설경, 색다른 시각적 호사를 누릴 기회!

아침마다 현관문 앞에 키 높이만큼 쌓인 눈을 삽으로 퍼내고, 창문틀을 에워싼 눈더미를 양동이에 담아 싱크대에 버리는 아이슬란드의 작은 마을이 바로 17살 소년 노이가 살고 있는 곳이다. 그곳은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하얀 눈으로 뒤덮이지 않은 데가 없는 피오르드 해안의 작고 조용한 설국이다. 선천성 색소결핍증인 노이는, 수학시험을 보는 날 선생님에게 연필을 빌려 이름만 달랑 적어내고, 슬롯머신을 조작해서 빼낸 동전으로 매일 맥주를 사서 마시고, 학교를 빼먹는 대신 친구에게 수업을 녹음해오라고 시키는 문제아다. 이렇듯 학교에서는 말썽꾸러기인 노이지만, 그에게는 일반인의 시각 혹은 제도권의 시각으로는 볼 수 없는 신비한 구석이 있다. 정신과 의사로부터 천재라는 진단을 받는 노이, 마루 밑 자신만의 비밀 아지트에 숨어 음악을 듣는 노이에 대해서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2003년 로테르담영화제를 비롯한 다수의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노이 알비노이>는 다구르 카리 감독의 첫 장편 데뷔작이다. 덴마크 국립영화학교를 졸업한 다구르 카리 감독은 이미 졸업 작품으로 전세계 영화제에서 수상한 화려한 경력을 갖고 있는 주목받는 1973년생 신인이다. 감독은 영화학교를 다닐 때부터 노이라는 캐릭터를 구상하여 차곡차곡 스크립트해두었다고 한다. 이렇게 오래 두고 생각한 인물이기에 영화 속 노이는 결코 흔하지 않은 특이한 인물형임에도 불구하고 어색하지 않고 생생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노이 알비노이>라는 영화는 제목처럼 노이라는 인물이 중요한 영화이다. 여러 등장인물의 스토리가 얽히고설켜 만들어내는 사건이 중요한 영화가 있는가 하면, 이처럼 개성 강한 인물 묘사가 중요한 영화가 있다. 후자의 경우, 영화의 관건은 얼마나 독특한 캐릭터를 창조하는지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노이 역을 맡은 토마스 레마키스는 외모가 주는 인상만으로도 노이라는 캐릭터를 훌륭히 소화해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창백할 정도로 흰 피부와 대머리의 토마스 레마키스가 길고 가는 팔다리를 휘저으며 흰 눈 위를 달리는 모습은 보는 이에게 기묘한 정서를 환기시킨다.

지각과 결석을 밥먹듯 하고 어쩌다 출석한 날은 책상에 엎드려 자던 노이는 결국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아버지가 주선해준 성당 묘지관리 일을 맡는다. 신부님의 지시로 꽁꽁 언 땅을 녹여 묏자리를 파던 어느 날, 노이는 삽을 팽개치고 마을로 달려간다. 할머니에게서 생일선물로 받은 만화경 속 하와이를 동경하던 노이는 여자친구 아이리스와 탈출하기로 결심한다. 자금 마련을 위해 어설픈 은행 강도 노릇을 해보지만 실패하자 예금을 찾아 양복을 사입고 자동차를 훔친다. 하지만 아이리스는 함께 떠나자는 노이의 느닷없는 제안에 어리벙벙하고 뜨악한 표정을 지을 뿐이다. 자신의 기대와 달리 아이리스가 반응이 없자, 실망한 노이는 혼자 차를 몰고 해안가로 달려가고 경찰이 그를 뒤쫓는다. 도망칠 곳이 없는 노이는 자신의 비밀 아지트로 숨고 곧이어 예상치 못한 비극의 순간이 찾아온다.

성장영화에서 주인공이 자라나는 공간적 배경은 중요하다. 지리적 특성과 기후는 성장기 청소년의 예민한 신체와 정신을 감싸고 깊숙이 스며든다. <폭풍의 언덕>을 생각하면 비바람 몰아치는 황량한 언덕을 가로지르는 히드클리프가 가장 먼저 떠오르듯이, 인물은 특정 대지와 공기 안에 존재한다. 그렇기에 <개 같은 내 인생>이나 <정복자 펠레>와 같은 북유럽의 성장영화를 기억할 때, 긴 겨울과 척박한 땅이 주는 이미지를 먼저 연상하게 된다. <노이 알비노이>에는 아이슬란드의 피오르드 해안 마을을 원경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여러 차례 나온다. 아시아의 동쪽 끝에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진정 이국적인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정경일 수밖에 없고 그만큼 인상적이다. 우리에게 노이의 고향이 먼 이국이라면, 노이에겐 만화경 속 하와이가 어딘가 멀리 존재하는 이상향 같은 곳이다. 야자수가 늘어선 하얀 백사장은 노이가 동경하는 세계이자, 노이의 환상이 빚어낸 세계이다.

<노이 알비노이>에 캐스팅된 배우들은 몇명을 제외하고는 실제 그 지역에 살고 있는 비전문 배우들이라고 한다. 감독은 “피오르드의 한 레스토랑에 딱 하루만 앉아 있으면 그들을 모두 다 만날 수 있다”라고 말한다. 아이리스 역의 안스도터는 레스토랑에서 일하다 감독에게 캐스팅되었고, 담임선생님 역을 맡은 배우는 노이 역의 토마스 레마키스의 실제 아버지이다. 이 마을 출신이거나 주민들이기에 그들이 연기하는 삶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영화에서 자연 풍경은 영화를 위해 선택된 것이 아니라, 그곳의 자연을 위해 영화가 만들어진 느낌을 주고 있다. 먼 곳에서 도착한 우편엽서에나 나올 법한 이런 공간을 마음에 품었다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감독은 행복할 것이다. 다재다능한 감독은 각본뿐 아니라 음악까지 담당하여 직접 노래도 부르고 있다. 낯선 인물과 공간적 배경이 묘하게도 시선을 잡아끄는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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