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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영화평론가 사토 다다오 [2]
글·사진 오정연 2006-10-25

영화로 세계를 사랑하는 아시아영화 전도사

사토 다다오는 일본의 아시아영화 전도사다. 140권이 넘는 그의 저서 중에는 일본 감독에 대한 책, <아메리카 영화> <유럽영화> 등 1세계 영화를 다룬 책 이외에도 <중국영화 100년> <아시아영화> 등 아시아 각국의 영화를 쉬운 화법으로 소개하는 책이 많다. 아시아 국가 여러 곳에서 많은 감독들이 그를 형님이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자신의 저서 <영화로서 세계를 사랑할 수 있는가>의 제목에 대해 그는 평생 긍정을 표해온 셈이다.

-일본 외의 아시아영화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습니까. =문화대혁명 직후, 중국 사람들에게 세계영화에 대해 이야기해줄 일본 영화인으로 중국을 방문했습니다. 중국영화에 흥미가 있었다기보다는 일본이 중국을 침략했을 무렵 만들어진, 일본에 저항하는 내용의 영화가 궁금해서 옛날 중국영화를 보여달라고 부탁했죠. 그런데 그 영화들이 단순한 선전영화가 아니라 나름의 작품성을 지녔음을 알게 됐어요. 이듬해에는 일본국제교류기금의 원조로 타이, 인도네시아 등지에 파견됐습니다. 대부분 그렇게 방문한 나라의 관계자들이 각종 관광여행을 권했지만 그보다는 당신들의 영화를 보고 싶다고 말하곤 했죠. 일본국제교류기금은 본래 일본을 외국에 소개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하는 단체였지만 나는 그들에게 아시아영화를 일본에 소개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주장하면서 동남아시아영화를 상영하는 영화제 개최를 건의했습니다. 일본인들에게는 아시아 사람들을 존경하는 마음이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진짜 문화교류를 위해서는 우선 존경이 필요하죠.

-아시아의 여러 나라 영화에 대한 선생님 나름대로의 인상이 궁금합니다. =중국영화는 일본에 대한 비판보다는 침략받을 당시 자신들이 단결하지 못한 점을 문제시하는 영화가 많습니다. 한국영화 중에서는 임권택 감독의 <족보>를 감명깊게 봤는데, 미처 몰랐던 창씨개명의 악랄한 면에 대해 알게 됐습니다. 인도네시아영화도 흥미로웠습니다. 인도네시아인들에게 일본군은 당시까지 점령군이었던 네덜란드군을 물리친 존재였기 때문에 이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는 복잡한 심경에 처한 것이죠. 일본군을 해방군처럼 맞이했지만, 일본 군대가 단지 경례 방법이 잘못됐다는 이유로 사람들의 뺨을 때리는 식의 직접적인 폭력을 행사하면서 일본군을 경멸하게 되는 과정을 영화에서 목격했습니다. 우리가 왜 아시아에서 미움을 받는지를 확실히 알았죠. (웃음) 인도영화 중에서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주류 뮤지컬영화보다는 각 지방에서 만들어진 심각한 영화를 많이 봤습니다. 아삼 지방 등은 일본 독립영화만큼 힘들게 영화를 찍어야 하는 곳이기 때문에 어쩐지 그런 영화들에 더 애착이 갔습니다.

-그 나라의 영화를 보기 위해 그 나라의 역사를 따로 공부하는 등의 과정을 거치시나요. =아무래도 역사를 알아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낍니다. 역사뿐 아니라 사상과 철학도 마찬가지고요. 잘 알지 못하는 나라의 영화를 보는 가장 큰 즐거움은 모르는 감정과 문화를 배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국영화와 사토 다다오

작고한 영화평론가 이영일과 함께 저술한 <한국영화입문>(1990)과 <한국영화와 임권택>(2000), 사토 다다오가 멀고도 가까운 이웃 나라의 영화에 대해서 쓴 책은 모두 두권이다. 그러나 25년을 헤아리는 한국영화와의 그의 우정은 저서의 개수만으로 가늠할 수 없다. 요즘도 부산국제영화제를 포함하여 적어도 1년에 한번은 한국을 방문하여 화제작은 물론 학생 실습작품까지 챙겨보는 그는 한국영화를 일본에 소개한 공로로 한국 정부로부터 문화훈장을 받기도 했다.

-임권택 감독의 <만다라>를 처음 보고 한국영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셨다고요. =1981년 마닐라영화제였습니다. 아시아영화 특집이 있었는데 당시로서 그런 프로그램은 굉장히 희귀한 것이었습니다. <만다라>는 전년도 베를린영화제에서 좋은 영화로 평가받았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에 꼭 보기 위해 벼르고 있었죠. 너무 감동을 받아서 심사위원으로 왔던 한국의 영문학 교수에게, 일본 평론가가 이 영화제에서 가장 좋게 본 영화로 <만다라>를 꼽았다는 것을 임권택 감독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할 정도였습니다. 한국영화는 그전에도 두세 작품 보긴 했지만 그다지 좋은 작품이 아니어서 별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 그 다음해 내가 속해 있던, 한국영화를 비디오로 보는 그룹에서 임권택 감독을 초대해 처음으로 그를 만났어요. 당시에 영화평론가 이영일도 알게 됐는데, 한국영화를 공부하고 싶다고 이야기했더니 영화진흥공사에 옛날 필름이 많으니 보여줄 수 있다고 하더군요. 80년대 초반에 그런 식으로 옛날 한국영화를 볼 수 있었습니다.

-서로 알고 지내는 한국 감독들도 있을 텐데요. =임권택, 유현목, 김수용, 하길종 감독, 정일성 촬영감독 등이 있습니다. 내가 한국영화에 친근감을 느끼는 가장 큰 이유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테마를 굉장히 열심히 추구한다는 점입니다. 무명 시절 영화잡지에 투고한 글 중 좋은 평판을 얻은 것이 있는데, 일본영화 속 주인공들이 얼마나 많이 우는지에 대한 것이었어요. 한편의 영화에서 이 배우는 몇번을 울었는지를 상세히 적기도 했지요. 그런데 한국의 옛날영화는 그런 일본영화보다 더 많이 울더군요. (웃음) 그전에는 일본영화 속 배우들이 너무 울어서 문제라는 입장이었는데, 그런 식으로라면 한국영화는 더욱 말이 안 되는 것이 아닌가 하여 굉장히 당황했죠. 결국은 그렇게 울 수 있다는 것은 마음이 따뜻하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글을 다시 써야 했습니다. (웃음)

-90년대 이후에 주목하는 젊은 한국 감독이 있다면. =<살인의 추억>과 <괴물>의 봉준호 감독, <박하사탕>의 이창동 감독이 계속해서 궁금합니다. <살인의 추억>은 이마무라 쇼헤이 못지않게 인간을 이해하는 깊은 폭을 지닌 작품입니다. 최근 <괴물>을 봤는데, 영화 속 가족의 모습이 상당히 흥미롭더군요. 이창동 감독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성실하게 추구한다는 점에서 좋아합니다. 그 밖에도 <8월의 크리스마스> 같은 영화를 무척 좋아하고, 반면 <올드보이>의 박찬욱 감독 영화 중에서는 그렇게 기억에 남는 영화가 없군요. 그의 영화를 스즈키 세이준이나 마스무라 야스조 등 일본영화의 계보보다는 그로테스크한 유머감각을 추구하게 된 세계영화의 경향 속에서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교단에 선 사토 다다오

사토 다다오는 엄격한 비판가보다는 인자한 교육자에 가깝다. 그가 친구인 이마무라 쇼헤이의 뒤를 이어 1996년부터 교장을 맡고 있는 일본영화학교는 황병국 감독(<나의 결혼원정기>)을 비롯해서 배우 김응수(<그때 그사람들> <타짜>) 등이 유학했고, 재일동포 이상일 감독(<69> 등)을 배출한 일본의 명문영화학교. 70대 중반을 넘긴 나이에도 직접 교단에 서는 그가 영화를 지지하는 또 다른 방법은 바로 영화제다. 그가 집행위원장으로 있는 후쿠오카국제영화제는 아시아영화만을 대상으로 하는 영화제로 숱한 한국영화를 일본에 소개하는 창구였다.

-한국의 젊은 영화인들은 윗세대 영화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일본은 그에 비하면 좀 낫지 않을까요.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오즈 야스지로처럼 세계적으로 유명한 감독이야 교양 차원에서도 모를 수 없겠지만, 미조구치 겐지만 돼도 별 관심을 가지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미조구치는 오즈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그는 여성의 비극을 굉장히 잘 그린 감독이고, 한국에도 있었을 법한 전통적인 여성의 비극을 비교해서 본다면 더욱 흥미로울 것입니다. 롱테이크를 비롯해서 화려한 무빙 등 테크닉적인 면에서도 나무랄 데가 없습니다.

-일본영화학교 일이나 후쿠오카영화제를 부인과 함께 진행하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평생을 함께한 동지인 셈인데, 어떻게 만나셨나요. =내가 공장에서 일할 때 아내는 사무원이었습니다. 공장을 그만두고 평론가로 일하면서 7년 동안 계속해서 프러포즈를 했지요. 그녀도 영화를 무척 좋아해서 한 영화의 좋고 나쁜 점에 대해 자주 얘기를 나누지만 의견이 극단적으로 갈리는 일은 거의 없더군요.

-1996년 일본영화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셨습니다. 제작만을 가르치는 영화학교 교장으로 평론가가 부임한 것이 특별하게 여겨집니다. =실제로 현장에서 만드는 과정에서 대해서는 가르칠 것이 없지만, 학생들이 만든 실습영화는 한편도 빠짐없이 보고 있습니다. 그런 관심과 진심어린 조언들이 학생들에게 큰 도움이 될 거라고 믿습니다. 사실 현직 감독들이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경우, 자신이 속한 세계에 들어오지 않는 학생의 작품은 무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모든 영화는 서로 다른 작품이기 때문에 나름의 좋은 점을 발견하고 이를 지적하려고 노력합니다. 모든 작품을 공평하게 취급하고 그 안의 좋은 점이 있음을 알려줍니다.

-영화에 대한 담론이나 정보를 흔하게 만들어낼 수 있게 된 요즘,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의 권위는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평론의 역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돈을 많이 들인 대작 상업영화는 광고비를 많이 투입하고, 그런 영화들과 작은 영화가 시장에서 당당하게 대결하는 일은 점점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독립영화나 저예산영화를 관객에게 소개하는 일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최근 일본에서는 <개미병대>라는 독립다큐멘터리가 평론가들의 적극적인 소개로 굉장히 유명해지기도 했습니다.

한국 감독들이 말하는 사토 다다오

듬직한 선배, 반가운 친구, 고마운 선생님. 소중한 사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 사토 다다오와의 인연을 맺은 한국 감독들에게 그에 대해 물었다. <천년학>의 중간편집 와중에 임권택 감독이 어렵게 시간을 내주었고, 김수용 감독은 사토 다다오를 한국과 직접적 연결한 기억을 뿌듯하게 회고했으며, 일본영화학교에서 유학한 황병국 감독은 졸업 후에 받은 더 큰 가르침을 전했다.

“겸손과 부지런함, 생활 자체가 모범적이다” -임권택 감독

80년대 초반. 일본 평론가들 앞에서 내 작품 몇 개를 비디오로 틀고 함께 보는 자리에서 사토 선생을 처음 만났다. 일본 평론가를 만나는 것 자체가 처음이었는데 그 양반이 <만다라>에 대해서 평도 쓰시고, 그 밖에 내 영화를 여러 사람에게 알려 주셨다길래 정말 고마웠다. 감독으로서 그런 영향력있는 평론가로부터 엄청난 성원을 받는다는 건 뜻깊은 일이고. 사실 내 영화는 가장 한국적인 정서를 지닌 영화들이어서 외국 평론가들이 잘못 이해할 수도 있는데 그는 항상 정곡을 짚어내고 심지어는 내 영화에서 개선해야될 점까지도 짚어내더라. 내가 후쿠오카 영화제를 매년 가고, 서울이나 해외영화제에서도 기회만 되면 사토 부부를 만나다보니 아마 그 양반은 한국과 외국을 막론하고 내가 가장 자주 만나는 평론가 중 한 사람일꺼다. 내가 일어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 둘 다 영어도 서툴러서 늘 통역이 필요하지만 오래 만나오다보니까 간단한 말은 통하기도 한다. 그리고 부인이 내 일어수준을 잘 알고 계시니 항상 내가 이해하기 좋은 쉬운 단어로만 대화하시고.(웃음) 한국인들은 일본인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게 사실이고, 나도 그분과의 사이에서 불편한 점이 생길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늘 유심히 봐도 전혀 흠을 찾아볼 수가 없다. 겸손하고, 부지런해서 생활 자체가 모범스럽다.

“말보다는 글로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김수용 감독

“요즘은 내가 영화제작 현장에서 멀어지면서 만난 지 좀 되어 오지만, 처음에 사토 다다오를 한국영화와 직접적으로 연결해준 게 바로 나였다. 1970년대 후반 제2회 마닐라영화제에 <만추>가 초청돼서 방문했다가 사토 다다오를 처음 만났다. 김혜자씨가 그 영화로 여우주연상을 받았는데, 나만 해도 사토 다다오의 책을 많이 읽은 세대라서 만나서 인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눴다. 한국영화 연구가가 없냐고 묻기에 몇달 뒤 도쿄에서 만나서 이영일씨가 쓴 <한국영화개론>을 전해줬다. 그 책으로 공부를 한 모양이더라. 그 뒤로 서울과 도쿄에서 기회가 될 때마다 만났는데 1986년에 검열·삭제에 항의하는 성명서를 발표하는 계기가 됐던 영화 <허튼소리>는 그이가 서울에서 부인과 함께 극장에서 완본을 감상하기도 했다. 80년대에 김기영 감독의 <하녀>와 내 영화 <하녀>에 대해 도쿄에서 1주일간 열린 행사를 손수 주최하면서 내 영화가 한국영화 중에서도 감성적이라는 이야기를 했던 것도 기억이 난다. 90년대 초에 대한민국 예술원 세미나에서 그이가 강연할 때는 1시간30분 동안 내가 직접 동시통역을 하기도 했다. 내가 1929년생이니까 동년배인데 늘 정장을 입고 굉장한 신중파여서, 말수도 별로 없다. 아무래도 말보다는 글로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교실 바닥에 누워 설명을 할 정도로 열정적이셨다” -황병국 감독

“얼마 전에 후쿠오카영화제에 <나의 결혼원정기>가 초청돼서 선생님을 만났는데 집행위원장을 올해로 그만두신다더라. 그 자리에서 그 말을 들은 거의 모든 아시아 감독들이 다 울었다. 1학년 때 ‘세계영화의 역사’라는 수업시간이 기억난다. 오즈 야스지로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언제나 자기 시선에 맞춰서 앵글을 잡다보니 카메라맨은 거의 누워서 촬영할 수밖에 없다며, 양복 차림으로 교실 바닥에 진짜 누워서 설명을 할 정도로 열정적이셨다. 학생들에게도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시지만 성격은 무뚝뚝한 한국 남자 같아서 학생들 자랑도 별로 하는 법이 없다. 그분보다는 말수가 많으신 편인 사모님께서 <나의 결혼원정기>가 부산영화제 폐막작으로 선정됐다는 소식에 선생님께서 기뻐하셨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시더라. <나의 결혼원정기>를 보시더니 ‘학생 때 졸업영화와 똑같은 영화를 찍었다’면서 ‘다른 한국의 명작영화보다 더 잘 찍은 영화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이 시기에 나와야 할 좋은 영화’라고 평해주셨다. 다음 영화도 이전까지의 것과 비슷해서 고민이라는 내 말에 ‘잘할 수 있는 게 있는데 왜 다른 걸 하려고 하냐’며 독려해주셨다. ‘요즘 한국영화는 굉장히 다이내믹하지만 오래도록 감독을 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 상황인데 제발 쉰살 넘어까지 영화를 찍기 바란다’는 말을 들을 땐 거의 눈물이 날 지경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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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역 권유선, 이윤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