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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스코시즈의 작품세계 [1]

마틴 스코시즈의 새 영화 <디파티드>가 개봉을 앞두고 있다. <에비에이터>를 통해 미국의 이카루스, 하워드 휴스의 흥망성쇠를 고풍스럽게 그려냈던 그가 거짓과 세속이 판치는 거리로 다시 나선 것이다. 제작 발표부터 홍콩영화 <무간도>를 스코시즈가 어떻게 리메이크할 것인지 말들이 많았다. 드디어 실체를 확인해볼 때가 온 셈이다. 우리는 <디파티드>가 영화의 화신 스코시즈가 건너는 어떤 징검다리라고 생각한다. <디파티드>를 계기로 그의 영화를 이리저리 이야기해보고, <무간도>와는 또 어떤 차이를 갖는지 짐작해보는 건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덧붙여, <디파티드>에 관한 마틴 스코시즈, 잭 니콜슨의 인터뷰를 실었고, 그가 영화사의 어디쯤에서 영감과 참조를 얻는지 흔적도 살핀다. 스코시즈가 불같은 열정으로 영화를 만드는 한, 그와 그의 영화에 관한 이야기는 계속될 것이다. 끝나지 않는 이야기, 네버 엔딩 마틴 스코시즈 스토리를 지금 시작하려고 한다.

1942년 이후 미국은 신부(a priest) 하나를 잃은 대신 영화감독 하나를 얻었다. 그가 독실한 성직자가 됐을 거라고 장담하긴 힘들어도 대단한 창작자가 됐다고 말하는 건 실언이 아니다. 그가 마틴 스코시즈다. 스코시즈가 그토록 존경해 마지않았던 선배감독 마이클 파웰은 1988년 스코시즈를 위한 짧은 글에서 “우리 모두가 거장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누가 거장이 되리라는 것은 알 수 있다”고 예언처럼 썼다. 이미 <비열한 거리> <택시 드라이버> <분노의 주먹> 같은 걸작이 나온 뒤의 찬사지만, 그 뒤로도 거기에 견줄 만한 <좋은 친구들>과 <카지노>가 나왔으니 그건 동시에 예언이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과장할 생각이 없다. 스코시즈의 신작 <디파티드>가 파웰의 찬사를 입증하는 또 한편의 작품이라고 강력히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디파티드>는 그의 다른 걸작들과 비교할 때 다소 격차가 있다. 하지만 스코시즈가 다시 현대의 거리로 나가 나락에 빠진 갱들의 세계에 천착했고, 그것이 홍콩영화 <무간도>를 리메이크라는 명목 아래 크게 탈바꿈해 탄생한 것이란 사실만으로도 이야기의 실마리는 충분히 흥미로울 것 같다. 자, 여기까지가 오프닝이다. 스코시즈가 영화 속에서 그의 인물을 기술할 때 자주 그러하듯 우리도 뒤로 돌아가 다시 시작해보자.

스코시즈 바이블 제1장 제1절 "내 전 생애는 영화고, 종교다"

스코시즈는 영화학교 1세대에 속한다. 약간의 나이차가 있지만, 조지 루카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폴 슈레이더, 스티븐 스필버그 등이 스코시즈의 영화 친구들이었고, 그 세대는 함께 ‘영화 악동들’(Movie Brats)이라고 불렸다. 영화는 좋아하지만 감독 일은 싫어하는 조지 루카스(스코시즈의 말에 따르면 그렇다)는 <스타워즈 에피소드> 시리즈로 돌아오기 전까지 연출 일선에서 오랫동안 물러나 있었다. <드라큐라>를 마지막으로 코폴라는 15년 넘게 변변치 못한 작품 몇편을 만들어내며 지금도 침묵 중이다. 취향은 같지만 연출 능력으로 치면 스코시즈보다는 한수 아래인 폴 슈레이더는 감독보다 각본가로 더 명망을 쌓아갔다. 그리고 친하기는 해도 만날 때마다 서로 생각이 다르다는 사실을 번번이 확인하게 되는 스필버그(역시 스코시즈의 말에 의하면 그렇다)는 완전히 다른 영역에서 대가가 되어갔다. 그동안 스코시즈는 브라이언 드 팔마와 함께 엎치락뒤치락 꾸준하게 유사한 길을 계속 걸었다. 하지만 젊은 시절 브라이언 드 팔마가 나의 영화는 히치콕에게서 영향받았다고 말한 것이 계기가 되어 백발이 다 된 지금도 히치콕의 흉내쟁이 소리를 듣고 있는 마당에, 그래서 히치콕의 영향 어쩌고 하는 질문만 나오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드 팔마의 경우에 비해 자기 영화를 설명하기 위해 누구누구에 대한 오마주 또는 누구누구의 영향이라며 족히 영화감독 수십명의 이름은 댔을 만한 스코시즈는 드 팔마와 같은 굴레를 얻기는커녕 그런 게 바로 스코시즈의 영화가 아니겠느냐고 사람들이 인정하게 만들어버렸다.

영화에 대한 광대한 지식과 넘치는 열정, 그것 말고도 아카데미 무관의 전설이 그를 이상한 유명세에 올려놓았다. 너무 잘 알려진 사실이라 다시 말하는 게 싱겁긴 하지만, 스코시즈와 일한 스탭과 배우들이 하나둘씩 오스카상을 챙겨가는 동안 스코시즈가 다섯번의 감독상 후보에 올라 단 한번도 수상하지 못한 건 유명하다. 2005년, 아카데미 시상식장. 한때 스코시즈가 <예수의 마지막 유혹>을 만들면서 종교계의 집단 뭇매를 맞고 있을 때 표현의 자유를 강조하며 강력하게 그를 옹호했던 클린트 이스트우드. 그가 <밀리언 달러 베이비>로 감독상을 수상한 뒤 멋스러운 말 일색으로 오스카를 쥐고 흔들 때, 스코시즈는 객석에 앉아 이스트우드의 리액션 화면이 되어야만 했다. 그때 방송사의 카메라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마틴 스코시즈 사이를 마치 아직 보스턴 레드삭스가 우승하기 전, 뉴욕 양키스와 보스턴 레드삭스의 월드 시리즈를 중계하듯 신이 나서 다루었다. 당연히 스코시즈가 후자였다.

그러니 이건 오히려 역설의 일화로 기억할 만하다. 스코시즈는 미국의 대표적인 영화상에서 한번도 수상하지 못한 미국의 대표적인 감독이다. 그가 오스카를 수상하건 그렇지 않건 그의 영화에 동의하건 그렇지 않건 스코시즈는 영화 엔터테인먼트의 표상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의미로서 영화가 지닌 이름 즉 ‘시네마’의 역사 안에 현존하는 미국영화의 한 페이지다. 스코시즈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가 1975년에 한 말, “나는 영화를 사랑합니다. 그것이 내 삶의 전부이며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또는 <예수의 마지막 유혹>에 대해 했던 같은 말, “나는 기도자, 예배자로서 이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내 전 생애는 영화였고, 종교였습니다. 그것 말고 또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건 스코시즈 바이블의 유명한 제1장 제1절이며, 영화와 그의 관계에 대한 일설 중 가장 확고히 알려져 있는 것이다. 그런 그를 향해 일찍이 평론가 폴린 카엘은 “영화의 성자가 되려 한” 감독이라 칭했는데, 이 말은 물론 그가 다루는 영화 화두의 일부인 종교성을 지적하는 표현이지만, 종교에 귀의하듯 영화에 귀의했다는 의미도 반쯤은 담겨 있는 표현이다.

운명적 조건안에서 실패, 보류, 절멸로 귀결되는 인물들

스코시즈가 줄기차게 관심을 갖는 것은 인물의 삶과 그 삶에 주어진 운명적 조건이다. 그 조건은 대체로 실패하거나, 보류되거나, 절멸을 맞는 귀결로 인물을 이끈다. 단, 이 말은 스코시즈의 극영화 작업에 집중할 때 성립된다. 그가 만든, 어쩌면 극영화 작업보다 더 값어치 있을지 모르는 몇몇 다큐멘터리들은 감식안 높은 문화 평전가로서 혹은 예민한 역사가로서 할 수 있는 최상의 것, 예컨대 자신이 속한 이탈리안-아메리칸 문화와 그 속에서 형성된 나의 가족과 그가 영화 다음으로 사랑하는 음악과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하는 영화에 관한 관심사로 대다수 채워져 있다.

무엇보다 스코시즈의 다큐멘터리에는 그를 설명할 때 자주 따라붙는 폭력의 인장이 없다. 폭력이 출몰하는 것은 그의 극영화다. 그러나 그를 화려하게 수식하고 있을 뿐, 폭력 역시 그의 극영화를 말하는 데 주어가 되지 못한다. <분노의 주먹>의 격투신, <좋은 친구들>의 살인신, <갱스 오브 뉴욕>의 첫 전투신 등이 떠오르지만 거기에서 방점은 폭력의 재현이 아니다. <갱스 오브 뉴욕>의 첫 전투신에서 숨을 벅차게 하는 순간은 그다지 흥미롭지 않게 찍힌 전투신이 아니라 사도가 문을 박차자 카메라가 문 밖을 향해, 거리를 향해 정신없이 달려나가는 바로 그 순간이다. 그 카메라는 “존 포드는 웨스턴을 만들었어. 나는 거리영화(Street Movie)를 만드는 거야”라고 언젠가 스코시즈가 조 페치에게 한 말을 떠올리게 한다. 또는 <좋은 친구들>의 소년 헨리가 거리의 마피아들을 부러움 섞인 눈빛으로 바라볼 때 그의 시선을 대신해 창을 넘어 거리로 나아가던 카메라의 방향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구원은 교회가 아니라 거리에서 얻어진다”고 <비열한 거리>의 찰리(하비 카이틀)는 읊조린 바 있다.

<갱스 오브 뉴욕>에서 후반부 같은 장소 같은 상황으로 돌아와 인물들은 싸우지만, 그들이 갑자기 하얀 포화의 재를 뒤집어쓰고 당황해하는 그 순간 우리에게 전해지는 사실은 그들의 싸움판이 얼마나 시대의 조건에 어긋날 만큼 착오적인 것인가 하는 것이다(이를테면 총과 포가 난무하는 거대한 싸움의 시기에 철재 무기를 들고 부모의 원수를 갚아 한 구역을 차지하겠다는 이 시대착오적인 복수담 내지는 실패담이 이 영화의 아이러니한 대미이자, 착란적 주인공을 향해 스코시즈가 던지는 비정한 시선이다). 혹은 <분노의 주먹>의 제이크 라모타가 링 위에서 더 많이 맞기 위해 최선을 다해 버티는 그때 분수 같은 붉은 선혈과 뼈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충격을 주긴 하지만, 문드러지는 제이크 라모타의 얼굴을 통해 관객이 읽도록 스코시즈가 요구하는 것은 자기 파멸의 대가를 받아들기 위해 피학적 안간힘을 쓰고 또 쓰는 어처구니없는 이 순교의 자세다. 반면에, <좋은 친구들>의 지미(조 페치)나 <카지노>의 니키(역시 조 페치)가 별안간 총에 맞아 죽거나 야구방망이로 두들겨 맞아 생매장당할 때 그는 보스가 지령한 삶의 신분을 어겼다는 이유로 처벌받는 것이다.

그들은 시대이건, 신이건, 보스이건, 그들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 안에서 착각을 일으키거나, 반동적으로 순응하거나, 도주하려다 실패하는 인물들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그 행동을 추동시키는 것의 이름은 무엇인가. 스코시즈는 강박과 망상으로 뒤엉킨 자들에 애착을 갖는다.

구원을 받지 못하는 자와 끝을 향하는 자의 강박과 망상

강박과 망상에 대한 스코시즈적 수행은 크게 두 갈래다. 첫 째는 헤매면서 구원을 얻으려다 결국 실패하는 자다. <비열한 거리>에서 찰리는 자신이 성자인 양 행동하지만 마피아 삼촌의 잡일이나 거들며 술집에서 젊음을 낭비하며 사는 청년이 종교적 책임감에 싸여 교회의 촛불에 손을 지지는 고행을 거듭한다는 건 이상하거나 놀라운 일이다. <택시 드라이버>에서 트래비스는 더 이상하거나 위험한 자다. 불면증으로 뉴욕의 밤거리를 해매던 그는 어느 순간 자신이 정의로운 사도라 생각하며 순결한 어린 창녀 아이리스(조디 포스터)를 구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러운 범죄의 왕국에서 아이리스를 구제하는 혹은 악덕 포주(하비 카이틀이 이 역할을 맡았다)를 처단하는 신의 의용군이라고 스스로를 여긴다. 수십년 뒤 등장한 <비상근무>의 프랭크(니콜라스 케이지)는 트래비스를 닮은 좀더 합법적인 구제자지만, 그 역시 책임감으로 고통스러운 환각에 시달리는 인물이다.

브라이언 드 팔마가 강박의 세계에 빠진 인물을 정신분석학자가 흥미로워할 만한 연구 대상으로 몰고 갈 때, 스코시즈는 수호자 내지는 성자로서 고민을 하며 거리를 헤매는 그들의 병적 (초)인간애에 흥미를 갖는다. 물론 거기에는 스코시즈 개인의 진실한 종교적 신심이 반영된 것이 사실이지만, 어쨌거나 그들은 끊임없이 도시의 거리를 떠돈다. 거리는 교회 바깥에 있고, 그들은 거리에 있다. 그들은 망상으로 기도를 하고, 착각으로 결심을 다지며, 환각으로 거리를 해매며, 착오로 싸움을 건다. 거리는 지옥인데, 지옥에서 그들은 구원을 읊조린다. 스코시즈는 그들을 지옥으로 들어가 영영 돌아올 길을 못 찾은 자의 형상으로 그려낸다.

여기에 한 가지 유형의 수행을 덧붙인다면 상황은 더 복잡해진다. 두 번째 유형은 끝까지 더 끝까지 가보고 싶은 자들이다. 가령 ‘무엇이 되고 싶다’는 것과 ‘무엇을 이루고 싶다’는 것, 그것은 스코시즈의 인물들이 공통적으로 나누어 갖는 중요한 강박이자 망상 덩어리다. 욕망이라기보다는 강박의 실현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어울릴 법한 병적 집념. <택시 드라이버>에서 트래비스는 신의 대리인이 되고 싶다. <코미디의 왕>에서 루퍼트(로버트 드 니로)는 무명의 이름을 버리고 코미디의 제왕이 되고 싶다. 하워드 휴스(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가장 성대한 영화를 만들고 싶고, 가장 큰 비행기를 만드는 역사를 이루고 싶다. 그들은 무엇인가 되고 싶고, 이루고 싶다.

<택시 드라이버>

<좋은 친구들>

스코시즈가 전기영화의 달인이라는 사실을 여기 덧붙여야만 할 것이다. 최근으로 올수록 스코시즈는 전기영화에 좀더 깊은 관심을 갖는데, 사실상 전기영화가 스코시즈의 방점이라기보다 되고 싶고 이루고 싶은 자의 병적 집착에 대한 이야기를 가장 넉넉하게 풀어낼 수 있는 것이 전기영화이기 때문에 스코시즈는 그걸 선택한다고 보는 것이 더 맞다. 전기영화의 형식을 취할 때 무언가 되고자 하는 인물들의 열망은 더 부각되는데, 그때 그 ‘무엇’은 말 그대로 빈칸이지만, 종종 둘 중 하나의 중요한 선택지를 갖는다. ‘갱과 초인’이다. <좋은 친구들>에서 무엇은 갱이다. 소년은 갱이 되고 싶다. 혹은 <에비에이터>의 하워드 휴스처럼 무엇은 초인이다. 하워드 휴스는 초인이 되고 싶다. 하지만 스코시즈는 그 인물들을 전기적으로 다루되 출생에서 사망까지를 그리지 않는다. 그들은 되고 싶어하고, 그 가까이 간다. 때때로 크게 실패한다. 그뿐이다. 그 나머지를 말하는 건 자기의 관심과 일이 아니라고 스코시즈는 생각한다.

거대 폭력 조직의 꼭두각시 혹은 초인을 자처하는 실패자

갱이 되고자 함은 스코시즈가 보기에 허접한 끝을 이미 담지하는 인생이다. <좋은 친구들>이라는 역설적인 제목 아래 갱이 되고 싶어 끝내 꿈을 이뤘던 헨리 힐(레이 리오타)의 마지막 삶은 법정에서 증인이 되어 보스들을 배신하고 증인보호프로그램에 갇혀 평생을 숨어사는 것이다. <카지노>에서 라스베이거스 환락의 성공 끝까지 갔던 지미 콘웨이(로버트 드 니로)는 다시 곤두박질쳐 겨우 죽음만 면한 채 그냥 제자리로 돌아온다. 갱을 다룰 때 스코시즈는 코폴라처럼 다루지 않는다. 비극이되 신화적 위용으로 휩싸인 인물들로 다루지 않는다는 뜻이다.

초인이 되고자 함은 일찍이 “구약성서적 인물”인 트래비스가 모더니즘적 상징인 자동차를 타고 지옥 같은 뉴욕의 밤거리를 돌아다닐 때 배태되어 있던 것이다. 그를 대신할 만한 아주 극명한 한 가지 현실 속 일화가 있다. 레이건을 총으로 쏴 암살을 시도했던 존 힌클리 주니어라는 남자가 말하기를 <택시 드라이버>를 열다섯번이나 보고 나서, 영화 속 아이리스 역할을 맡은 조디 포스터에게 매혹당해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해 한 짓이라고 털어놨다. 사실이건 헛소리이건 간에 그는 (아마도 트래비스처럼 비극적) 초인이 되고 싶었을 텐데, 그러기 위해서는 당시에 가장 강한 상징적 인물을 제거해야 한다고 판단했던 것일 테고, 그게 레이건이어야 한다고 그 정신(?)에도 생각한 것이다. 이건 스코시즈 인물들이 미국사회에 역반영한 명백한 현실의 우화다.

스코시즈적인 의미에서 갱과 초인이 하나로 만나는 영화가 있는데, 그건 <예수의 마지막 유혹>이다. 초인 이야기 중 가장 뿌리 깊은 것이 독생자 예수의 희생사인데, 스코시즈는 그걸 <비열한 거리>의 갱인 찰리가 종교에 대해 숭고한 고뇌를 하듯, 같은 수위로 예수가 인간적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 물러나는 이야기로 뒤바꿔버렸다. 영화에서 예수는 사탄에 속아 십자가형 직전에 내려와 늙을 때까지 산다. 물론 다시 돌아가 “다 이루었도다”라고 말하면서 원래의 몫을 해낸다. 종교계는 숭고한 결단 대신 인간적 번민의 장을 부각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원작(이 책은 세계 곳곳에서 금서였다)과 그걸 원작으로 한 이 영화에 분노했다. 하지만 스코시즈는 이렇게 말한다. “이 영화를 만들 때의 내 감정은 만일 성당이 없다면, 그래서 하느님과 직접 대면한다면 하는 것이었다”고. 거리는 교회 바깥에 있고, 그들은 거리에서 구원을 찾는다. 그게 스코시즈식 신앙심이다.

스코시즈 인물들의 삶은 신적인 힘 혹은 그에 맞먹는 외압의 장력 아래 꾸준하게 놓여 있다. <예수의 마지막 유혹>처럼 그 인물의 삶이 지극히 전형적 종교성일 때 그것은 구원과 타락과 심판에 대한 해석의 모델이 되기 때문에 논란이 일어난다. 그러나 한편으론 종교와 상관없는 자들의 삶의 조건을 다룬다고 하더라도 스코시즈의 인물들은 종교만큼이나 거대한 외압 내지는 외상의 우산 아래 산다. 예컨대 마피아 보스 아래 있는 중간 하수인(<카지노> <좋은 친구들> <비열한 거리>)은 거대한 폭력조직의 외압에 움직이는 꼭두각시들이고, 말 그대로 외상 안에 놓여 있는 초인적 꿈의 배태자들(“검역”이라는 언어의 외상에 갇힌 <에비에이터>의 하워드 휴스, “나는 신의 외로운 인간”이라고 믿는 <택시 드라이버>의 트래비스)은 초인을 자처하는 보류자 혹은 실패자들이다.

종교적이건 그렇지 않건 스코시즈가 생각하는 인물과 그들의 삶의 조건은 대체로 실패하거나, 보류되거나, 절멸을 맞는다. <디파티드>도 그런 점에서 보면 명백히 스코시즈적 영화의 한축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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