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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일·허문영·김소영의 2006년 한국영화 결산 좌담 [2]

서사구조의 변화와 프로페셔널리즘, <왕의 남자> <괴물> <타짜>

정성일: 이제 자연스럽게 <왕의 남자> <괴물> <타짜>를 묶어서 이야기하면 좋을 것 같다. 나는 이 세편을 문화적으로 읽기 전에 서사 구조 면에서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들의 시나리오는 영화를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절대 쓰지 말라는 방식으로 쓰여졌다. <왕의 남자>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누가 주인공인지 알 수 없고, 이야기는 분산되어 있다. <괴물>을 보면서는 ‘봉준호, 미친 거 아냐’라는 생각을 두번 했다. 첫 번째는 영화의 오프닝을 (괴물의 근원을 설명하며) 대놓고 시작하는 순간이었고, 두 번째는 희봉이 죽은 뒤 인물들을 분산시킬 때였다. 일반적으로 괴물과 싸우는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온갖 우여곡절을 겪은 뒤 한곳에 모인다. 그리고 괴물과 전투에 임한다. 예를 들면 <에이리언> 같은 영화. 하지만 봉준호는 희봉이 죽는 순간, 인물들을 다 흩뜨린다. <타짜>는 이야기가 중간부터 시작한다. 이야기 자체를 가운데에서 딱 잘라놓고, 중간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물론 플래시백을 사용한 서사의 진행이 <범죄의 재구성>과 같은 구성이긴 하지만, 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서사 구조 양식과 차이가 있다. 나는 이것이 미학적 성취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이런 방식의 영화에 600만, 1천만 관객이 들었다는 점은 신기하다. 즉 세편의 영화가 한국영화에 새로운 화법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김소영: 영화가 점점 관객이 일종의 선택을 하게끔 만들기 때문인 것 같다. 윈도체제의 서사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는 몇년 전까지만 해도 대중영화에서는 수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괴물> <왕의 남자>는 이 체제의 서사 방식을 취하고 있다. 관객에게 이야기 방향을 열어놓는다. 예를 들어 다수 관객은 <왕의 남자>를 관람하면서 많은 인물 중 공길이란 캐릭터를 선택했다. 이는 생산의 관점에서 다중인물의 영화를 가능하게 한다. 즉 관객이 영화에 대해 유사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허문영: 좋게 말하면 캐릭터들의 민주화, 나쁘게 말하면 주인공의 분산과정인 것 같다. 주·조연의 경계가 불분명해지고, 캐릭터의 위계가 해체되고 있다.

김소영: 인물의 관계를 직선적으로 밀고 갔던 강우석의 <한반도>가 관객에게 거부됐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제 관객은 인물들의 직선적인 관계에 반감을 갖고 있는 것 같다.

허문영: 일종의 프로페셔널리즘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전의 대중영화 주인공들이 오로지 암흑가에서 고통받는 아웃사이더였다면 지금의 주인공들은 프로페셔널리즘을 끊임없이 과시한다. <왕의 남자>는 광대놀이, <타짜>는 도박술을 과시하는 과정 자체를 굉장히 중요한 엔터테인먼트 기능으로 사용하고 있다.

김소영: 그리고 <괴물>에서는 테크놀로지 자체가 과시다. 프로페셔널리즘 자체가 영화를 통해 구현되는 것 같다. 한편 그런 요소가 없는 영화는 액션영화 예처럼 꽃미남과 젊음을 절대적인 자산으로 사용하고 있다.

정성일: 프로페셔널리즘에 대한 지적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는 다른 말로 영화의 전시성과도 관련있다. 하지만 영화가 전시성에 몰두할 때, 인물은 깊이를 잃는다. 그래서 세 영화의 공통점은 인물이 너무 평면적이고 캐리커처에 가깝다는 것이다. 사건의 변화는 있지만, 그 사건에 대한 인물들의 감정, 심리적 변화는 보이지 않는다. 결국 서사 구조의 화법 변화가 전시성을 획득하는 대신 인물의 깊이를 잃어버린 것이다. 이는 최근 개봉한 한국영화 모두에 해당한다. 올해 유난히 메소드 액터들의 영화가 흥행에 실패했다는 점도 이에 대한 증명 사례다. 특히 설경구 영화가 그렇다. <사랑을 놓치다> <열혈남아>는 아주 못 만든 영화가 아니다. 설경구의 연기도 이전 작품들의 연장선상에 있다. 하지만 관객은 이제 설경구 방식의 인물에 지루함을 느끼는 것 같다. 말하자면 대중은 인물을 포기하고 사건에 집착하며 전시적 효과에 매혹된다. 이것이 2006년 한국영화에 대한 대중의 태도 변화다.

허문영: 하지만 그 변화가 유독 올해 영화만의 퇴행인가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있다. 한 영화의 캐릭터가 주변부나 하위로 전락하게 되는 건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스타일, 전시성, 플롯 등. 하지만 이는 70년대 중반 이후 세계 대중영화의 추세이기도 하다. 그래서 프로페셔널리즘이 영화의 인물을 밀어내는 장본인인가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한국영화의 새로운 인물, ‘괴물’과 ‘사이보그’

정성일: 올해 한국영화에는 이제껏 본 적 없는 새로운 인물이 두명 등장했다. 괴물과 사이보그. 괴물은 명백히 일본 괴수영화와 할리우드에서 시작된 SFX 테크놀로지물에 기대고 있고, 사이보그는 전투 미소녀물 <최종병기 그녀>와 <총몽>을 믹스한 것이다. 여기서 봉준호와 박찬욱은 동일한 화두에 사로잡힌 게 아닐까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바깥영화의 전통을 끌어들여 한국영화를 만들까, 혹은 한국영화가 어떻게 하면 바깥영화가 될까. 그 점에서 올해 한국영화의 가장 낯선 타자는 괴물과 사이보그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봉준호와 박찬욱은 방식에서 차이를 보인다. 봉준호는 괴물을 한국영화에 끌어들인 뒤 최대한 거리를 유지하려고 애쓰지만 박찬욱은 사이보그를 끌어들여 친화적 동일화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한다. <괴물>은 괴물과 단 한순간도 소통하지 않고, 비판적 거리를 포기하지 않으며, 괴물을 완전한 타자로 둔 채 죽이지만,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차영군이 사이보그라고 착각한 다음 그래도 괜찮냐고 질문한다. 봉준호와 박찬욱은 한국영화에서 완소(완전소중)로 여겨지는 존재다. (웃음) 그래서 괴물과 사이보그는 또 다른 측면에서 2006년 한국영화의 특징으로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어쩌면 21세기 한국영화가 2006년 이전과 이후로 나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괴물>과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앞으로 한국영화에서 무한 증식할 새로운 토픽, 휴먼하지 않은 인물을 던져준 면이 있다. 그동안 한국 감독들은 영화에 로봇을 끌어들이는 것에 대해 “이러다가 남기남 되는 거 아냐”, 괴물을 끌어들이는 것에 대해 “이러다가 심형래 되는 거 아냐”라며 겁을 먹고 있었다. 하지만 박찬욱과 봉준호는 일종의 방어선이 돼준 셈이다. 이제는 해도 괜찮아. (웃음) 괴물과 사이보그에는 깊이가 필요없다. 여기서 중요한 건 전시성이다. 기계인간의 무한 변화와 전투적 기능. 두 타자가 한국영화에 끌려들어오는 순간, 한국영화는 포스트휴먼이라는 토픽과 직면했다. 서사 구조의 변화를 대중이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 확인된 순간, 휴먼하지 않은 것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 서사에 대해서도 관객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는 근거가 성립된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김소영: 괴물은 외부적으로 만들어진 타자다. 미군이 만들었다고 바로 지명이 가능한 타자. 하지만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할머니와 손녀를 겹쳐놓는다. 소녀는 현재에 있는데 할머니라는 존재를 가져와 과거, 현재, 미래를 뭉뚱그린 게 재미있었다. 그리고 문제의 원인은 다 과거에 있다. 사실 이 영화가 다루는 시제는 미래라기보다는 과거에 더 치우친 현재라고 생각한다. 또 영화는 끊임없이 부정한다. 사이보그에 대한 얘기? 아니다. 그럼 모성에 대한 얘기? 그것도 아니다. 10대에 대한 얘기? 그건 조금 맞는 부분이 있다. 여기서 타자는 과거에 만들어진 존재가 미래의 갑옷 형태를 하고 있다. 기계의 형태로 돌아온 것이다.

허문영: <괴물>에 대한 정성일의 의견에 100% 동의하지만,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와 함께 얘기하기엔 조금 애매한 구석이 있는 것 같다. 괴물은 명백히 타자지만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동일자 이야기다. 김소영의 말처럼 이 영화가 워낙 의도적으로 복잡하게 만들어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전통적인 서사로 묶일 수 있는 이야기임에도 소녀는 이상한 존재로 그려진다. 영화에서 소녀는 할머니와 자기를 정신병자로, 심지어 쥐, 라디오와 동일시한다. 내가 이 영화에서 가장 이상하게 생각했던 것은 할머니, 라디오, 쥐, 틀니 등 사물의 연계다. 소녀는 할머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틀니와 마우스를 함께 묻는다. 할머니의 죽음 소식에서 컴퓨터 물품 중 하나인 마우스를 떠올리는 것이다. 처음엔 어처구니없는 유머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녀가 스스로를 사이보그라고 오인하는 순간, 할머니를 쥐, 컴퓨터의 부품인 마우스로 오인하는 게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이 영화는 자신을 사이보그로 동일시하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다. 그리고 그것이 과거에 존재했던 어떤 대상이 아니라 앞으로 함께 살아갈 동일자로 그려진다. 우리가 괴물과 마주할 때, 괴물이란 타자를 어떻게 축출하는지는 단순한 숙제이지만, 사이보그는 복잡하다. 소녀의 손에서 총알이 보일 때, 마우스를 생물 쥐와 동일시하는 오인을 목격할 때, 당신은 그걸 받아들일 수 있는가의 질문이다.

김소영: 도나 해러웨이의 <사이보그 선언문> 중 “나는 여신보다는 사이보그가 되고 싶다”는 구절이 있다. 이는 여성이 신화적 여신, 신화적 세계에 들어가기보다는 새로운 정체성을 갖겠다는 의미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의 주인공도 여성이기 때문에 젠더적 측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사이보그가 음식을 먹지 않으니까 거식증, 완벽히 마른 몸매, 임수정이라는 스타 이미지에서 소녀들의 판타지를 읽어낼 수도 있다. 정신분석학적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는 메타적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면서 동시에 차단해버린다. 부정과 지체의 과정이 영화를 구성하고 있다.

소재주의의 한계,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다세포 소녀> <괴물>

정성일: 올해는 흥미로운 미성년 관람가 영화가 2편 나왔다. 하나는 12세 관람가를 받은 <싸이보그지만 괜찮아>고 다른 하나는 15세 관람가를 받은 <다세포 소녀>다. 나는 이 두 영화를 <괴물>과 함께 생각하고 싶다. 김소영이 지적한 것처럼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소녀가 왜 사이보그가 되고 싶어하는지에 대해 12살 소녀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이야기한다. ‘하얀 맨’들이 할머니를 하얀 차에 실어갔고, 소녀는 할머니를 지키지 못했다는 것. 하지만 핵심은 이 영화는 소녀가 할머니를 지키지 못해서 사이보그가 된 이야기가 아니라, 소녀가 할머니를 쫓아가다 보니 문득 자신이 사이보그라는 걸 알았다는 이야기이다. 할머니를 지키지 못해서 사이보그가 된 것과 자기가 사이보그였다는 사실을 몰랐다가 아는 것은 다른 문제다. 그리고 영화는 소녀가 충전해서 사이보그의 힘을 되찾는 과정을 그린다. 나는 “그 힘을 가져서 어떻게 할 건데?”라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영화는 끝내 소녀가 사이보그라는 정신병을 갖게 된 사회적인 이유에 대해 질문하지 않는다. 이것은 <괴물>에서 괴물이 왜 태어났는지를 보여주고 시작하는 것과 이상할 정도로 정반대다. 나는 두명의 민주노동당 당원인 박찬욱 감독과 봉준호 감독이 괴물과 사이보그라는 타자를 한국영화에 끌어들인 다음 정반대의 태도를 보여준 점이 궁금하다. 또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서 가장 이상했던 건 마지막 장면이다. 자신의 존재 목적을 안 차영군은 비 오는 날 박일순과 함께 기다리다가 세상을 끝장내는 대신 문득 무지개를 만난다. 이 엔딩이 장준환의 <지구를 지켜라!>와 비교했을 때, 얼마나 정치적으로 보수적인가에 대해 질문하게 되더라. 또 이재용 감독의 <다세포 소녀>. 사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가난을 등에 업은 소녀는 수많은 무쓸모고등학교 학생 중 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재용은 그 소녀에게 가난을 업힌 뒤 주인공으로 삼고 이야기를 진행한다. 이재용은 이 영화에서 성적 취향에는 무척 관대하지만 프롤레타리아의 사랑에는 그렇지 않다. 가난을 등에 업은 소녀는 부르주아 앤소니와 사랑에 성공하지 못하지만, 가난을 등에 업은 소녀와 원조교제에 빠졌던 사장님의 여고생 복장도착증은 너그럽게 그려진다. 즉 이 영화의 탈정치적 눈감음은 지나칠 정도로 선명하다. 더불어 두 소녀영화의 탈정치성, 박찬욱과 이재용이라는 우리 시대 트렌드 감독의 정치적 무관심이 매우 의아하게 느껴졌다.

김소영: 장작을 지고 불에 들어간 셈이다. 가난한 소녀를 주인공으로 택해서 불에 들어갔는데, 들어가 보니 불이 아니라는 식이다. 이는 일종의 모순, 패러독스다. 10대나 20대의 관객층을 대상으로 가난이 매우 페티시적인 방식으로 소환된다. 표면적으로는 계급문제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는 재현 방식의 특이성에 불과하다. 마치 우리가 가난을 식별할 수 없다는 것을 반영하듯이 가난이 인형으로 표기된다. 계급을 이야기함에 있어 가난이 이런 식으로 그려지는 건 문제다. 사실은 지지리 궁상인데 홍보될 때는 흔들녀로 정체가 변환됐다. 따라서 소재주의로 볼 수밖에 없는 불편함도 있다.

허문영: 두 영화가 사회적 문제를 끌어들이고 있지만, 그것이 소재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에 동의한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정치적 언급을 끌어들인 뒤 그것을 비웃는 점에서 굉장히 박찬욱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념, 정치적 노선 등의 문제도 무지개 뜨는 날의 아름다운 풍경으로 무화된다. 문제를 스스로 제시하고 스스로 비웃는 방식이다. 이는 봉준호가 <괴물>에서 노골적으로 정치성을 표방하면서 동시에 정치적 행위를 비웃는 것과 마찬가지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정성일: <카이에 뒤 시네마>가 봉준호와 인터뷰하면서 제목을 ‘삑사리의 예술’이라고 했더라. 남일이 하얀 병을 던지는 장면에서 뒤로 놓쳤을 때 기자가 그건 뭐냐고 물었더니, 봉준호가 삑사리라고 답해서 그런 제목이 나온 것 같다. 봉준호의 정치학이 삑사리의 정치학이라면, 박찬욱의 정치학은 뻥의 정치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박찬욱은 이번 영화가 복수 3부작과 차기작 <박쥐> 사이에 놓인 작은 섬이자, 베토벤 교향곡 8번과 같은 영화라고 하더라. 그래서 “이번 영화에 대해 제발 그렇게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보지 마세요”라고 반론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박찬욱 영화에는 무효화의 매혹이 있는 것 같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보여준 것처럼 판단의 무한정한 유보라고 부를 만한 게 있는 것 같다. 엄청난 화두, 그리고 무효 선언. 이런 반복이 크게 문제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여기에 매혹되는 우리 세대를 바라보는 마음은 참담하다.

김소영: <싸이보그지만 괜찮아>가 관객을 매혹시킬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매혹에 성공한다면 그건 정지훈이나 임수정, 배우의 몫인 것 같다.

그 밖의 주목작, <신성일의 행방불명> <피터팬의 공식> <가족의 탄생>…

정성일: 이 밖에 개인적으로 좋았던 영화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나는 신재인의 <신성일의 행방불명>과 조창호의 <피터팬의 공식>이 좋았다. 신재인이 이전 한국영화에서 본 적이 없는 상상력을 갖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특히 신성일이 고아원을 나온 뒤 사도행전을 하듯 이불을 쓰고 거리를 떠도는 장면은 심금을 울렸다. 이어질 ‘김갑수, 심은하 연작’을 기대하게 된다. <피터팬의 공식>은 전혀 기대없이 보다가 쇼크를 받은 작품이다. 처음 영화가 시작했을 때는 대단하지 않은 작품이라고 생각했는데, 꿈장면 이후 영화가 리듬을 타더니 마지막에 죽은 엄마가 나신으로 병원을 돌아다닐 때는 조창호란 감독의 재능을 인정하게 하더라. 이 두 사람의 다음 영화가 정말 궁금하다.

김소영: 나는 <아주 특별한 손님> <후회하지 않아> 그리고 개봉은 안 했지만 김응수 감독의 <천상고원>이 좋았다. 사실 김응수 감독은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 이후 작품들이 어떻게 흘러왔는지 몰랐는데, 이번에 <천상고원>을 보고 감독과 이야기하면서 이해하게 됐다. 저예산으로 이렇게 좋은 영화를 찍었다는 것도 의미있고, 고산지대에서 이 정도의 영상을 만들어냈다는 것도 좋았다. <가족의 탄생>은 어땠나.

정성일: <가족의 탄생>은 절반만 좋았다. 공효진-류승범 부분만 좋았고 고두심, 문소리가 나오는 대목은 진보사회학적이긴 했지만, 영화에는 거의 묻어 들어오지 않는 느낌이었다.

김소영: 사실 이전까지 문소리의 메소드 액팅에 잘 적응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너무 좋더라. 크게 중요한 역할이 아니지만 희소한 캐릭터라는 점에서 엄태웅 역할도 맘에 들었다. 영화가 시간을 왔다갔다 하다가, 마지막에는 관객 품에 안기는 선물처럼 느껴졌다. <후회하지 않아>는 퀴어영화라는 자기 정신에 충실한 것 같아 좋았다. 또 감독이 서울이란 공간을 바라보는 시선이 눈에 띄더라. 서울 사람이 보는 서울이 아니라, 지역에서 서울로 올라온 호스트가 경험할 만한 서울의 공간들, 감독의 재능이 느껴졌다.

허문영: <가족의 탄생>은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 영화의 결과가 본론을 대체하는 식의 결론에는 동의하기 힘들지만, 영화의 윤리성이나 인물들의 묘사 방식, 연기를 끌어내는 감독의 힘은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또 욕을 많이 먹었지만 이하 감독의 데뷔작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이 지나치게 폄하된 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든다. 이하 감독은 나쁘게 말하면 한국에서 가장 차갑게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은 그 가능성을 보여줬다고 본다. 뮤지컬 <삼거리극장>은 신명이 없다는 결함에도 불구하고 시도 자체가 돋보였고, 후반부의 카메라 움직임이나 공간 묘사는 뛰어났다고 생각한다.

한국영화의 또 다른 변화를 기대한다

정성일: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점은 올해 개봉한 배창호의 <길>, 여균동의 <비단구두>, 곽지균의 <사랑하니까 괜찮아>에 대한 냉대다. 아무도 보고 싶어하지 않고, 누구도 이야기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마치 시네마테크에서 회고전하는 감독의 작품처럼 취급된 면이 있다. 한국영화가 새로움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건 아닌가, 생각하게 만든다. 내년에 기대하는 작품은 어떤 것들이 있나.

김소영: 올해 성공한 장르라면 액션영화인 것 같다. 내년에 이 경향이 소진되고 새로운 경향이 나타날 것인지 혹은 다른 장르로 옮겨갈 것인지를 주목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또 이름있는 감독들의 차기작 정도?

허문영: 감독 중심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우리가 늘 궁금해하는 이름들, 홍상수, 김기덕, 임권택. 봉준호가 소품을 만든다고 하니까 그것도 궁금하다.

정성일: 임권택 감독의 <천년학>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몇몇 장면의 러시를 보았는데 아주 좋았다. 일흔 먹은 감독만이 찍을 수 있는 어떤 것, 살아온 세월을 돌아보게 만드는 감흥이 드는 장면이 있었다. 또 처음으로 외국 배우와 작업한다는 김기덕의 차기작 <숨결>이 궁금하다. 사실 가장 궁금한 건 내년에 드디어 발효되는 영화노사법이다. 영화노조에서 요구하는 대로 영화를 찍어야 하는 한국의 영화현장이 궁금하다. 지금까지 감독 중심으로 운영되어 온 영화 현장이 프로듀서와 노조의 합의하에 진행되는 현장으로 바뀔 텐데, 이것이 한국영화 시스템은 물론 영화의 최종 결과물까지 바꿔놓지 않을까 생각한다. 단지 작업 프로세스상의 변화뿐 아니라 영화 형식상의 변화도 함께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점은 올해 한국영화에는 유독 HD에 대한 성찰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박찬욱의 <싸이보그지만 괜찮아>가 HD 바이퍼카메라로 찍었지만, 영화에서 HD에 대한 성찰은 찾아볼 수 없다. 이 점은 마이클 만의 <마이애미 바이스>와 비교된다. 스와 노부히로의 <퍼펙트 커플>, 알렉산더 소쿠로프의 <더 선>에서 보여준 HD의 새로운 질감을 한국영화에선 찾아볼 수 없었다. 한국영화가 HD의 미학에 대해 외면하고 있는 건 아닌지, HD라면 단순히 간편하고 값싼 영화라고만 사고하고 있는 건 아닌지 우려된다. 내년부터는 멀티플렉스 상영관도 디지털로 바꾼다고 하는데, 한국영화가 디지털영화의 가능성을 얼마나 발견해나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

진행 김혜리·장소협찬 춘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