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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관찰자, 혹은 이미지의 모험가
2001-10-10

<처녀의 샘> <희생>의 스벤 닉비스트

“카메라를 들여다보는 순간,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잊게 된다. 렌즈를 통해 눈앞에 펼쳐진 작은 세상 앞에서 비로소 나는 내가 살아있음을 느낀다. 카메라와의 만남은 내게 유일한 즐거움이 되어주었고, 순수한 빛을 갈구하는 나의 노력은 더해갔다.” 감독이 전달하고자 하는 감정과 느낌을 바르게 해석하여 영화의 분위기를 창출해내는 것이 촬영감독의 소임이라 여기던 스웨덴 출신 촬영감독 스벤 닉비스트는 이같은 철저한 자기집중 위에 영화의 삶을 세웠다.

근 30년 동안 그와 작업 해온 잉그마르 베리만은 “영화를 만드는 것은 그립지 않지만, 그와 함께 작업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라고 자신의 시각이 되어준 닉비스트를 회상한다.1998년 <셀리브리티> 촬영을 끝으로 실어증으로 영화계를 은퇴하고, 이제는 초로의 노인으로 묻혀 지내는 스벤 닉비스트의 모습 뒤로 어릴 적 영화에 대한 호기심에 충만한 작은 소년이 오버랩된다. 아프리카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아버지는 영화를 보는 것을 죄악으로 여겼고 아들이 영화관에 가는 것을 엄하게 금했다.

그러나 한번 각인된 스크린에 대한 미련은 신문배달을 하여 모은 돈으로 8mm 카메라를 장만하는 열성을 낳았고, 이후 이탈리아의 치네치타 스튜디오에서 촬영기사 생활을 시작으로 한 영화와의 인연은 53년 <톱밥과 금속조각>에서 베리만과의 만남으로 이어진다. 당시 이 둘이 이루어낸 강렬한 색채의 흑백 화면과 빛의 사용은 그 자체가 도전이자 용기를 필요로 하였으며, 평단의 달갑지 않은 시선 또한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빛에 대한 꾸준한 연구와 실험정신은 모더니즘 영화의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갈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외침과 속삭임>(1974), <화니와 알렉산더>(1984)로 두번의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닉비스트의 화면은 단순함에 그 기반을 둔다. 최소한의 빛과 최소한의 색으로 사실에 가까운 자연스러운 이미지를 창출해낼 수 있다는 믿음은 그의 화면 어디에서도 복잡한 조명이나 필터나 렌즈를 이용한 테크닉을 찾아볼 수 없는 이유이다. <겨울 빛>의 촬영 당시, 실제 교회에서 5분마다 시시각각 바뀌는 빛을 관찰하여 그 빛을 스튜디오에 세운 교회세트에 반영한 일례는 철저하게 빛을 연구하여 자연광의 효과를 내려는 의도를 잘 보여준다. 스웨덴의 음산한 숲에서 전망 좋은 경관에 이르기까지 그가 구가하는 화면은 이미 촬영에 들어가기 몇달 전부터 치밀하게 사고된 빛의 탐구에 연원한다.

유독 배우의 얼굴에 관심을 두는 촬영방식 또한 주목할 만하다. 미디엄 숏을 배제하고 대담하게 클로즈업된 화면에서 배우들의 심리상태는 적나라하게 드러나며, 콘트라스트가 강하고 번쩍거리는 조명 대신 부드럽고도 풍부한 그만의 빛은 인간 영혼의 깊은 곳을 놓치지 않고 포착해낸다. 애정과 관심으로 세밀하게 빚어낸 화면은 함께 작업을 한 배우들이 그와의 작업을 기쁘게 회상하게 만든다.

물론, 베리만과의 강렬한 인상으로 100여편이 넘는 또다른 그의 작품을 간과할 수는 없다. 우디 앨런, 로만 폴란스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필립 카우프만, 리브 울만에 이르기까지 그는 70년대 이후 스웨덴 안팎의 활동을 통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독창적인 영상으로 한번 그와 작업을 한 감독은 또다시 그와의 작업을 기대하였다고 하며, 이는 10여분에 이르는 도입부의 롱테이크가 돋보이는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에서부터 화려한 촬영감각으로 브룩 실즈를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한 루이 말의 <프리티 베이비>, 쇼비즈니스계의 어두운 이면을 드러내기에 효과적인 흑백화면을 구가한 우디 앨런의 <셀리브리티> 등에서도 잘 나타난다.

최근 그의 유려한 영상세계를 재조명한 다큐멘터리 <잉마르 베리만과 스벤 니크비스트>(Light Keeps Me Company, 2000)가 아들 칼 구스타프 닉비스트에 의해 제작되었으며, 지난해 부산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그간 함께 일해온 동료들의 인터뷰로 조망된 79살 노장의 어깨 위에 걸린 훈장은 휘황찬란한 조명도 세인의 찬사도 아닌, 자연의 빛을 좇아 한길 영화에 바친 구도자의 모습 그대로이다. 소리없는 색채이지만 큰 울림을 자아낼 수 있는 힘, 그건 바로 빛에 대한 사랑이었다.

이화정/ 자유기고가 zzaal@hanmail.net

필모그래피

<셀리브리티>(Celebrity, 1998) 우디 앨런 감독

<사적인 고백>(Enskilda Samtal, 1996) 리브 울만 감독

<사랑 게임>(Something to Talk About, 1995년) 라세 할스트롬 감독

<라이프세이버>(Mixed Nuts, 1994) 노라 에프런 감독

<온리 유>(Only You, 1994) 노먼 주이슨 감독

<하버드 졸업반>(With Honors, 1994) 알렉 케쉬시안 감독

<길버트 그레이프>(What's Eating Gilbert Grape, 1993) 라세 할스트롬 감독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Sleepless In Seattle, 1993) 노라 에프런 감독

<채플린>(Chaplin, 1992) 리처드 애튼버러 감독

<옥스>(Oxen, 1991) 스벤 닉비스트 감독

<뉴욕 스토리>(New York Stories, 1989) 우디 앨런, 프랜시드 포드 코폴라, 마틴 스코시즈 감독

<범죄와 비행>(Crimes and Misdemeanors, 1989) 우디 앨런 감독

<또다른 여인>(Another Woman, 1988) 우디 앨런 감독

<프라하의 봄>(The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 1988) 필립 카우프만 감독

<희생>(Offret, 1986)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

<신의 아그네스>(Agnes of God, 1985) 노먼 주이슨 감독

<스완의 사랑>(Un Amour de Swann, 1984) 폴커 슐뢴도르프 감독

<즐거운 농장>(Cannery Row, 1982) 데이비드 S. 워드 감독

<화니와 알렉산더>(Fanny Och Alexander, 1982) 잉마르 베리만 감독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The Postman Always Rings Twice, 1981) 밥 라펠슨 감독

<허리케인>(Hurricane, 1979) Jan Troell 감독

<집시들의 왕>(King Of The Gypsies, 1978) 프랭크 피어슨 감독

<가을 소나타>(Hostsonaten, 1978) 잉마르 베리만 감독

<프리티 베이비>(Pretty Baby, 1978) 루이 말 감독

<테넌트>(Le Locataire, 1976) 로만 폴란스키 감독

<고독한 여심>(Face to Face, 1975) 잉마르 베리만 감독

<마법 피리>(Trollflojten, 1975) 잉마르 베리만 감독

<외침과 속삭임>(Viskningar Och Rop, 1972) 잉마르 베리만 감독

<정열>(En Passion, 1969) 잉마르 베리만 감독

<페르소나>(Persona, 1966) 잉마르 베리만 감독

<겨울 빛>(Nattvardsgasterna, 1963) 잉마르 베리만 감독

<침묵>(Tystnaden, 1963) 잉마르 베리만 감독

<거울을 통해 어렴풋이>(Sasom I En Spegel, 1961) 잉마르 베리만 감독

<처녀의 샘>(Jungfrukallan, 1960) 잉마르 베리만 감독

<톱밥과 금속 조각>(Gycklarnas Afton, 1953) 잉마르 베리만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