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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의 실수들] 알 파치노, 피터 오툴
박혜명 2007-03-13

들러리로 전락한 주인공

<대부2>로 첫 주연후보, 20년 뒤 <여인의 향기>로 주연상 탄 알 파치노

“알 파치노는 언제나 신부의 들러리 같았지 신부 같진 않았다.” 로버트 오스본이 쓴 두꺼운 책 <65년간의 오스카: 아카데미 시상식의 역사> 중 1992년 남우주연상을 거머쥔 알 파치노의 사진 아래 쓰인 구절이다. 파치노는 1972년 <대부>로 처음 조연상 후보에 지명됐고 그로부터 20년 만에 연기상을 수상했다. 그동안 주연상 4회, 조연상 2회 후보에 올랐고 드디어 수상이 이루어진 1992년에 알 파치노의 실패 기록을 뛰어넘는 사람은 이제 피터 오툴과 리처드 버튼밖에 없었다. 그해 파치노는 <글렌게리 글렌로즈>의 남우조연으로도 노미네이트되었다. 그는 <여인의 향기>로 오스카 주연상을 탔다. 눈먼 퇴역 군인의 신경질적인 외면과 따뜻한 내면이 겹친 연기가 뛰어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파치노는 첫 주연 후보에 자신을 올려준 <대부2>(1974)로 상을 받았어야 했다. 미국으로 이주한 마피아 대가족의 젊은 대부로서 그가 뿜어낸 비장한 아우라는 그 또래 다른 남자배우들에게서 볼 수 없는 귀족적 위엄마저 풍겼다. 그는 34살에 불과했고 170cm의 단신이었다. 브라이언 드 팔마의 <스카페이스>와 <칼리토>에서 터뜨린 광기 넘치는 에너지는 오스카가 꺼리는 연출가의 이름이 있으니 열외로 치더라도, 파치노는 10년간 네 번에 걸쳐 연기상 후보로 오른 자신의 전성기 70년대에 훨씬 더 적절한 공식 평가와 대우를 받을 수도 있었다. <대부2>로 첫 주연상 후보에 오른 그의 경쟁자들은 <차이나타운>의 잭 니콜슨, <레니>의 더스틴 호프먼,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의 앨버트 피니 등이었다. 아카데미는 37년생 동갑내기 니콜슨과 호프먼을 버리고, 36년생 영국 출신 앨버트 피니를 무시하고 40년생의 파치노도 외면한 다음 <해리와 톤토>라는 영화의 아트 카니라는 배우에게 주연상을 주었다. 당시 56살로 생애처음 주연상 후보에 올라 트로피를 가져간 아트 카니는 그 뒤 다시 오스카 시상식장에 이름이 불리지 않았다. 이듬해 알 파치노는 <개같은 날의 오후>로 다시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트로피는 전년도 경쟁자였던 잭 니콜슨(<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에게 주어졌다.

오드리 헵번은 <마이 페어 레이디>(1964)가 여우주연상을 제외하고 오스카 12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는 꼴을 보았다. 영화는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촬영상, 미술상, 음악상, 의상디자인상, 사운드상 등 8개 부문 수상의 쾌거를 이뤘지만 그녀가 기뻤을 리는 없다. 낙담한 후배를 위해 캐서린 헵번(그녀는 오스카 통산 여우주연상 4회 수상의 기록을 가졌다)이 전보를 쳤는데 이런 글귀가 담겨 있었다고 한다. “후보 지명도 안 됐다고 걱정하지 말아. 언젠가 그닥 평가받을 만하지 않는 역할로 상을 받게 될 테니까.”

8전8패의 굴욕

8번 주연상 후보, 결국 평생공로상 받은 피터 오툴

지금으로부터 43년 전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지 못한 꼬리표는 피터 오툴을 평생 따라다녔다. 올해 오스카에서 다시 한번 주연상을 놓치면서 오툴은 도합 8번 주연상 노미네이트에 모두 수상 실패라는 지독한 기록을 보유하게 되었다. 캐서린 헵번이 오드리 헵번에게 전보로 알려준 것처럼 그가 “그닥 평가받을 만하지 않은 역할”을 아직 하지 않았기 때문인가? 아니면 아카데미가 2002년 평생공로상으로 그에게 면피를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가. 그는 74살이다. 타이밍 못 맞추기로 유명한 아카데미 속성에 기대 아쉬운 대로 때늦은 상을 노려볼 기회조차 희미해지고 있다. 이런 셈을 하다보면 오스카에 매달린 영화인의 운명이란 게 참으로 우스워진다. 사실 많은 언론이 피터 오툴의 <아라비아의 로렌스> 남우주연상 실패를 오스카가 만든 최대의 실수 중 하나로 꼽으면서도 당시 수상자 그레고리 펙이 <알라바마 이야기>에서 보여준 뛰어난 홀아비 변호사 연기 때문에 전적으로 오툴 편을 들지도 못한다. 2007년의 수상 실패 또한 절반쯤은 예견된 것이었다. <엔터테인먼트 위클리>는 주요 부문 수상 결과 예측을 실으면서 포레스트 휘태커의 수상 가능성에 30%를 주고 “아카데미는 실존 인물을 연기한 배우를 좋아한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오툴의 과거 노미네이트(및 실패) 기록은 시상식을 앞두고 극적 재미를 위해 매체들이 부러 더 부각한 측면이 크다. 정작 본인은 기대가 컸던 모양. 전년도 여우주연상 수상자 리즈 위더스푼이 휘태커의 이름을 부르자 한동안 어안이 벙벙해 있던 노배우의 얼굴이 뚜렷이 TV에 잡혔다.

오스카 사상 최악의 선택

해외 평단과 관객이 입을 모으는 “오스카 사상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작품상”

오스카 역사를 정리한 책에서 힌트를 얻고, 오스카 관련 인터넷 사이트들에서 넓은 목록을 얻고, 마지막으로 관련 기사들에서 근거를 얻었다. 동양인의 눈이 아닌 서구인의 눈으로 만들어진 ‘오스카 사상 최악의 선택’ 리스트들이 공통적으로 언급한 최악의 작품상들. 표시된 연도는 제작연도다.

1941년 존 포드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vs 오슨 웰스 <시민 케인> 오슨 웰스의 데뷔작 <시민 케인>은 이듬해 오스카 시상식에 9개 부문 후보를 올렸다. 수상은 각본상이 유일했다. 작품상, 감독상, 주연상, 촬영상, 편집상 등을 모두 놓친 셈. 신인감독의 영화인데다 경쟁작인 존 포드의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또한 걸작이므로 <시민 케인>이 타지 못한 점을 크게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고도 생각되지만 <BBC>는 “존 포드의 금세 잊혀질 멜로드라마”보다 “지금껏 만들어진 가장 위대한 영화” <시민 케인>에 손을 들어주었다.

1979년 로버트 벤튼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 vs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지옥의 묵시록> 영화사상 가장 위대한 연기, 촬영, 편집, 사운드, 각본 그리고 연출로 평가받기 손색이 없는 <지옥의 묵시록>은 오스카 8개 부문 노미네이트 중에 촬영과 사운드상만을 타갔다. 아카데미는 양육권을 둘러싸고 부부간에 벌어지는 감동적인 가족물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에 감독상과 작품상, 남녀연기상, 각본상까지 주었다. 황금종려상이 자랑스럽겠지만 <지옥의 묵시록>은 안정성을 좋아하는 아카데미 회원들 맘에 들기에 지나치게 어둡고 강렬하고 파괴적인 이야기였을 것이다. 코폴라의 또 다른 황금종려상 수상작 <컨버세이션>(1974)도 오스카 작품상, 각본상, 사운드상 후보에만 그친 바 있다.

1998년 존 매든 <셰익스피어 인 러브> vs 스티븐 스필버그 <라이언 일병 구하기> <쉰들러 리스트>(1993)에 이어 스필버그가 두 번째 감독상을 수상했다. 모두가, 작품상도 그의 것이라 생각했다. 두 상을 묶어주는 시상식 관례가 튼튼했고 <셰익스피어 인 러브>는 지나치게 해맑고 가볍기 때문이었다. <셰익스피어 인 러브>가 작품상을 수상하자 <워싱턴 포스트>는 당시 “굉장한 애정을 받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뒤로하고 아카데미는 16세기를 산 작가의 밝은 이야기에 각종 상을 주었다”며 탐탁지 않음을 간접 표현했다. 2차대전을 소재로 미국의 이상을 건전하게 이야기한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미국 대중과 작은 영화 웹진들의 큰 지지를 얻었다. 제3국의 시선으로는 그해 테렌스 맬릭의 <씬 레드 라인>이 7개 후보 지명에 한개의 트로피도 갖지 못한 것이 더 아쉬울 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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