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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죽고 싶은 욕망 <씨 인사이드>

잘 살고 싶은 욕망만큼 소중한, 잘 죽고 싶은 욕망

무엇인가를 반대하는 행위는 그 행위에 대한 그 사람의 무의식적 끌림 또는 그 욕구에 대해 자기 스스로는 통제 불능이라는 사실을 방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까 지나친 ‘00포비아’는 자기 안에 있는 00적 경향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순진한 ‘호모포비아’들은 동성애를 반대하는 이유 중 하나로 그것을 허용하면 ‘비정상적’인 성적 취향이 만연하게 되리라는 것을 내세운다. 그런 논리는 동성애가 인간의 본성에 속하는 것이며 정치적, 사회적 차별에 의해 자연스런 성욕이 억압당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동시에 그렇게 말한 이의 내밀한 성적 욕망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자신의 성적 정체성이 분명하다면, 타인의 성적 취향에 의해 그것이 흔들릴 공포를 갖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동성애처럼 사회적으로 ‘전염성이 강한 나쁜(?) 욕망’으로 거론되는 또 다른 것은 죽음에 대한 욕망이다. 현대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연예인들이 연이어 자살을 선택한 뒤 떠도는, 어르신들의 가장 큰 우려는 사회를 부양해야 하는 젊은이들이 그들의 죽음을 모방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물론 흔히 ‘베르테르 효과’라고 알려진 것처럼 유명인의 자살은 강한 전염성을 갖는다.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의 영화 <씨 인사이드>는 자살을 다른 측면에서 접근한다. 자기 손으로 자신의 목숨을 끊을 수 없는 자들에게 죽을 수 있는 권리는 보장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어떤 방식으로든 생명은 유지되어야 하는 것일까. 이 작품은 ‘안락사’ 문제를 다루며 그것이 야기하는 법적, 정서적 문제들에 대해서 심각하게 숙고해볼 기회를 제공한다.

라몬 삼페드로(하비에르 바르뎀)는 28년 전, 자신도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바다에 뛰어들었다가 낮은 수심으로 인해 바닷물의 포옹 대신 모래바닥의 충격을 받고 전신마비가 된다. 그는 이야기를 하거나 입으로 글을 쓰는 것 이외에 타인의 도움 없이는 1cm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이다. 외국을 공짜로 여행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선박기술자를 택했던 그는 젊은 시절 전세계를 누볐지만, 이제 그것은 사진 속의 추억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오직 자신의 꿈과 환상 속에서만 육체적으로 자유로운 라몬에게 하루하루는 무기력과 고통의 연장이며, 자신의 존엄성을 잃어가는 시간들이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죽을 권리를 주장하는 그를 돕기 위해 변호사 줄리아(벨렌 루에다)가 방문한다. 퇴행성 질환으로 매일매일 죽음의 위협에 직면해 살아가야 하는 그녀는 누구보다도 라몬의 삶을 깊이 이해하게 되고, 공감은 점차 사랑으로 바뀐다. 캔 공장에서 일하며 두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인 로사(롤라 두에냐스)는 어느 날 TV에서 라몬을 보고 무작정 그를 찾아온다. 그녀는 처음엔 라몬을 설득하려하지만, 만남이 지속될수록 그를 통해 오히려 자신이 삶의 의욕을 찾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그에게 사랑을 느낀다.

‘사랑’은 타인을 향한 자아의 이기적인 욕망의 발현인 경우가 많다. 라몬에게 사랑은 모든 형사상의 책임을 감수하고라도 자신이 죽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라몬의 가족, 특히 그의 형에게 사랑은 끝까지 라몬을 책임지고 돌봐주는 것이다. 그는 라몬을 보살피기 위해 삶의 터전이었던 바다를 버리고 농장으로 왔으며, 자신의 집에서 동생이 자살하는 것을 결코 용인하지 못한다. 줄리아가 라몬을 사랑하는 방식은 그가 쓴 아름다운 글을 출판해서 그가 얼마나 죽음을 간절히 원하는지를 여론에 알리고 그것을 통해 사법부를 설득하는 것이다. 로사는 처음에는 라몬에 대한 사랑이 삶에 대한 의지를 회복하도록 돕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점차 그가 진정 원하는 것을 해주는 것이 사랑을 실현하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떼시스> <오픈 유어 아이즈> <디 아더스> 등에서 흥미로운 상상력과 박진감 넘치는 연출력을 선보였던 아메나바르 감독은 이번 영화를 통해 좀더 사회적 파장이 크고, 진지한 성찰이 필요한 주제에 도전했다. ‘안락사’를 다루는 그의 태도는 분명하다. 인간에게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권리만큼 자신이 원하는 죽음을 선택할 권리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라몬의 심리치료사인 제네의 입을 통해 두려움에 의한 죽음과 자유에 의한 죽음을 구별하도록 한다. 줄리아는 라몬의 집을 방문했다가 갑작스런 심장발작으로 죽음의 공포에 직면한다. 지병으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줄리아는 자신도 라몬처럼 죽음을 원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제네는 ‘자유는 살고 싶은지 죽고 싶은지를 결정하도록 하지만, 두려움은 선택의 여지를 앗아간다’고 말하며 그녀가 두려움으로 인해 삶을 포기하지 않도록 설득한다. 안락사가 죽음에 대한 공포나 절망으로 인한 순간적 선택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숙고 끝에 도달해야 하는 결론임을 분명히 해주는 대목이다. 또한 감독은 사랑이 넘치는 라몬의 가족을 통해 ‘안락사’란 가족의 무관심이나 불행한 환경에 몰려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족의 따뜻한 관심과 배려 속에서 환자의 자발적인 선택으로 이루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일반인의 그런 선입견이 환자의 가족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는지, 또 그것이 가족이 환자의 의사를 존중하는 데 얼마나 큰 걸림돌이 되는지를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통해 보여준다. 영화에서 안락사를 위한 라몬의 투쟁은 사법적 논란뿐 아니라, 종교적인 논란까지 불러일으킨다. 라몬과 안락사를 반대하는 전신마비 사제가 벌이는 논쟁은 인간의 삶에 대한 법률적인 권리에 동반되는 윤리적, 종교적 문제들을 상기시킨다. 물론 아메나바르 감독은 의도적으로 사제를 편협한 종교적 아집과 권위를 내세우는 인물로 묘사함으로써 라몬의 통쾌한 판정승을 이끌어낸다.

바다는 라몬에게 세상을 보여준 곳이며, 한순간에 그 모든 것을 앗아간 곳이기도 하다. 라몬의 육체는 언제나 좁은 방 안에 있지만, 그의 정신은 언제나 바다를 꿈꾼다.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라몬이 자신의 백일몽 속에서 창밖으로 날아올라 바닷가에 있는 줄리아를 만나러 가는 장면이다. 아메나바르의 손을 거친 환상적인 편집 덕에 이 시퀀스는 마치 그가 실제로 숲과 바다 위를 자유롭게 날아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그가 꿈속에서 자유로우면 자유로울수록 돌아가야 하는 현실은 더더욱 절망스러울 뿐. 다른 이들에게 당연한 일상적 삶이 불가능한 라몬에게 삶을 연장한다는 것, 특히 그것이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타인의 강요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누군가에게 미래가 오직 과거의 기억들과 현재의 고통을 연장하는 것으로서밖에 의미를 갖지 못할 때 안락사는 삶의 포기가 아니라 더 나은 종말일 수 있음을 이 장면은 백 마디의 대사보다 더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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