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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멜로가 되버린 첩보물 <굿셰퍼드>
오정연 2007-04-18

성실한 감독 드 니로. 스릴러와 첩보물, 정치드라마 사이에서 망설이다 가족멜로에 도착하다

<굿 셰퍼드>를 소개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193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초 미국의 쿠바 공습 실패에 이르기까지,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 시절부터 살펴보는 초기 CIA 이야기. 혹은 로버트 드 니로가 <브롱스 테일> 이후 13년 만에, 맷 데이먼과 안젤리나 졸리와 윌리엄 허트와 알렉 볼드윈과 존 터투로와 조 페시까지 거느리고 만든 두 번째 연출작. 전자의 방식으로 택할 경우 관객의 기대는 다시 두 가지로 나뉠 것이다. 첩보기관의 대명사 격인 CIA의 기원을 다뤘다는 면에서 <007> 시리즈를 비롯한 첩보스릴러물의 계보를 따르거나, 미국이 CIA의 힘을 빌려 전세계 내전에 개입한 내막을 파헤친 정치드라마의 길을 가거나. 그러나 1961년의 냉철한 첩보원 에드워드 윌슨(맷 데이먼)이 내부의 음모를 파헤치는 과정과 1939년 예일대학의 문학도로 “정교하고 섬세한” 시를 쓰던 에드워드가 현재에 이르기까지 20여년간의 궤적이 교차되는 <굿 셰퍼드>는, 두 가지 기대 모두를 거부한다.

무엇보다도 감독 로버트 드 니로는 장르로서의 첩보물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이는 “최선을 다해 진짜에 가까운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사람들이 총에 맞고 피를 흘리는 것은 꼭 필요한 순간에만 과장하지 않고 보여주려 했다”는 인터뷰가 아니어도 짐작할 수 있다. 온갖 첨단 기계가 존재할 수 없었던 시대가 배경인데다가, 1940년 베를린으로 첫 부임한 에드워드의 임무는 중요한 인재를 미국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임무수행 와중에도 느끼한 작업을 잊지 않는 제임스 본드(<007>)와 달리 기껏 하룻밤을 같이한 여인조차 의심 끝에 처단하거나 희생시켜야 한다. 사무실 안에서 혹은 고국에서 방첩 활동에 열중하며 망명객의 진위를 가리는 일의 성격상 각종 신기한 기술로 적들을 따돌리는 이단 헌트(<미션 임파서블>)와도 거리가 있다. 그들과 에드워드가 공유하는 공통점이라곤 그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된다는 비인간적인 철칙뿐이다. 그는 상관에게, 동료에게, 가족에게, 심지어 어려서 자살한 아버지에게서조차 배신당한다.

<뮌헨>의 작가 에릭 로스가 시나리오를 썼음에도, 드 니로의 관심은 정치드라마에 있지 않다. 에드워드의 여정을 따르는 <굿 셰퍼드>의 카메라는 쿠바의 혁명세력을 견제하는 CIA의 공작, 망명한 러시아 첩보원의 거짓 여부를 가리기 위한 살벌한 고문, 냉전을 이용해 내부의 위기를 감추려는 국가적인 음모까지 골고루 미치지만, 어디에도 오래 머물지 않는다. 따라서 전직 CIA 요원의 정교한 고증과 협조를 거쳐 완성된 이 영화에 9·11 이후 미국사회를 향한 냉철한 비판이 담겨 있다는, 일부 미국 평론가들의 독해는 연출자의 의도와는 무관해 보인다. “이탈리아인에겐 가족과 신앙, 아일랜드인에겐 고국, 유대인에겐 전통, 흑인에겐 음악이 있다면, 우리에겐 미국에 대한 애국심이 있다. (우리를 제외한) 나머지는 그저 방문자일 뿐”이라는 에드워드의 대사를 가장 좋아한다는 드 니로의 말을 통해, 허황된 국가 및 집단의 이데올로기 때문에 몰락하는 미국 백인 주류계층을 향한 옅은 냉소를 짐작할 뿐이다.

결국 앞서 언급한 <굿 셰퍼드>의 두 가지 소개법 중 적당한 것은 후자이며, 적절한 비교대상은 드 니로의 첫 번째 연출작인 <브롱스 테일>이나, <굿 셰퍼드>의 제작자로 나선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와 드 니로를 운명적으로 만나게 한 <대부2>다. CIA 전신인 OSS에 요원을 공급한 비밀조직 해골단은 실제 ‘매년 극소수의 엘리트만 입단시키며,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고위직을 배출한 산실’로 알려져 있다. 해골단 동료의 여동생 마가렛(안젤리나 졸리)과 맺은 단 한번의 관계가 임신으로 이어지면서 가족을 이룬 에드워드는 명예를 위해 사랑없는 결혼을 이어가고, 평생 아버지의 관심과 인정을 갈구한 아들까지 외면한다. 오해 끝에 화해에 도달하는 <브롱스 테일>의 부자와 달리 <굿 셰퍼드>의 부자는 끝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에드워드의 이러한 비인간적인 변화의 원인은 그가 평생 헌신한 국가에서 찾아야겠지만, 민주주의와 국가의 실체는 모호할 뿐이다. ‘선한 목자’(Good Shepherd)는 애당초 존재할 수 없는 이상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등장인물 모두가 서로를 배신하는 <굿 셰퍼드>의 결말은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성장과 몰락에 대한 <대부2>의 차가운 고찰을 연상케 한다. 문제는 <대부2>의 마이클과 달리 에드워드는 마지막까지 관객의 공감을 얻지 못한다는 점이다.

<굿 셰퍼드>에 대한 미국 내 평가는 정확히 반으로 갈렸다. “모든 일을 벌여놓고 단 하나의 소재나 주제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는 혹평과 “성실하게 비밀을 파헤친 수작”이라는 호평 속에 일치하는 한 가지는 “스릴러와 첩보물, 정치드라마와 가족드라마 사이에서 망설였다”는 분석이다. 그 우유부단함의 가장 큰 원인은 감독 이전에 꼼꼼한 사실주의로 소문난 배우인 드 니로의 정체성에 있을 것이다. 초창기 첩보활동의 디테일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가족에게도 진심을 보일 수 없는 첩보원의 직업병을 그대로 대변하듯 맷 데이먼은 내부의 격랑을 무표정으로 일관한다. 하나같이 흥미로운 역사와 극적인 감정 속에서 단 하나의 방점을 찍지 못한 영화는 167분의 러닝타임 내내 무심하게 흘러갈 뿐이다. 감독의 명성에 힘입은 초호화 캐스팅도 마찬가지다. 훌륭한 남편감을 위한 당돌한 시도가 수십년에 걸친 외면의 날들로 귀결되는 마가렛을 연기한 안젤리나 졸리는 당찬 여전사에서 무기력한 내조자로 변신을 꾀했고, 드 니로 자신이 OSS 창설자인 설리반 장군으로 출연하여 묵직함을 더했지만 개성있는 배우들이 보여준 성실한 연기는 시너지 효과를 내지 못한다. 한편 올리버 스톤과 마틴 스코시즈의 오랜 파트너 로버트 리처드슨의 카메라는 흠잡을 데 없이 우아한 시선으로 1939년대에서 1961년에 이르는 시대의 공기를 포착했다. 이 완벽한 드림팀의 협업에서 필요한 마지막 한 가지는, 동정없는 세상과 시대에 이용당한 동정없는 남자를 향한 일말의 연민이다. 스스로에게도 변명을 허용하지 않는 배우 드 니로가 연출자로서 갖춰야 할 마지막 덕목 역시, 본인이 선택한 주인공을 위해 작은 변명을 준비하는 여유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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