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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 감독은 변한게 아니라구요! [2]

면회녀: 다른 영화 이야기로 넘어갈까요? 요즘 부쩍 충무로에서 뜨는 이름 중 동구가 있죠.

번트남: <날아라 허동구> 좋았습니다. 대중적인 어법을 그대로 따른 영화지만, 아주 똑똑하고 바른 영화라고 할까요. 가장 큰 호감요소는 무책임하게 극적인 모티브를 남발하는 충무로 드라마들에 대한 해독제 같다는 느낌이었어요. 교통사고도 불치병도 없는데도 이렇게 감동을 줄 수 있다는 점 말이에요. 아, 하나 더. 반전도 없어서 너무 좋고요. ^^

면회녀: 큰길은 예상한 대로인데 그 걸음을 하나하나 내딛는 법이 영리하고 작은 일화들이 잘 아귀가 맞았어요. 야구 경기 클라이맥스에 동구가 다이아몬드를 두 바퀴 돈다거나 하는 설정이 그 예죠. 다만 동구 같은 어려움을 지닌 아이가 실제로 보통 학교에서 어울려다니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특별한 교육법으로 학습 능력을 키우는 게 도움이 되는 걸까는 판단하기 어려웠어요.

번트남: 사실 이 영화에서 주역이 아닌 조역을 쓰는 방식은 좀 거친 면이 있다고 여겨지긴 했어요.전반부에서 꽤 중요하게 나오는 듯한 담임 교사가 중반 이후 온데간데없잖아요. 인물은 잘 만들었지만, 등-퇴장 방식이 좀 맘에 걸렸다고 할까요? 축구 코치가 등장해 야구부 권 코치와 만나는 마지막 시퀀스도 사족 같은 느낌이 있죠. 요사이 충무로 영화들은 ‘시간이 흐른 뒤 웃음이 흐르는 장면의 깔끔한 후일담 스케치’로 마무리해야 한다는 에필로그 강박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도 이 영화엔 사랑스럽고 인상적인 장면이 많습니다.

면회녀: 알루미늄 배트에 빗방울이 튀면서 “번트를 하자”는 아이디어를 얻는 장면!

번트남: 마루에서 해뜨길 기다리다 잠든 아이가 어느새 뜬 해에 실눈을 뜨고 슬쩍 웃으며 “해떴다” 하는 장면도 좋았고, 화장실에서 용변 뒤처리하는 방법 가르치는 장면도 아주 좋았어요.

면회녀: 아 참! 저는 부자가 꼭 끌어안고 자는데 깔아놓은 매트가 (아마도) 싸구려 스펀지라서 둘의 포옹한 몸을 중심으로 쫙 주름이 잡히는 숏에서 찡하더라고요.

번트남: 좀 지나치게 힘을 준 감이 없지 않지만 “아웃이 되면 안 돼. 살아야 돼. 집으로 돌아오면 1점이야. 치고 싶어도 못 치는 너, 달리고 싶어도 못 달리는 나, 그런 게 아웃이야” 같은 친구 준태의 대사도 참 좋더군요.

면회녀: 제작사 타이거픽처스는 영화사 아침과 함께 씨네월드에서 갈라져 나온 영화사인데요, 엉뚱하지만 ‘범 씨네월드’적 영화의 색채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선량하고.

번트남: 듣고보니 그렇군요. ‘씨네월드 휴먼드라마’라는 소장르명을 만들어봄직도…. 결정적인 차이는 디테일에 있는 것 같아요. <라디오 스타>도 기획이나 이야기 얼개는 별다를 게 없었지만 어떤 터치가 적절하게 가해져 생생하고 감동적인 삶의 순간들이 살아나는 거죠.

면회녀: 주류적 이야기의 영화 대다수가 ‘착한 사람’을 그냥 상상하는 반면, 씨네월드 영화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 진심으로 믿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이 무슨 날인 줄 아세요?

번트남: 글쎄요?

면회녀: 1961년 오늘(4월17일)이 미국이 쿠바 피그만을 침공했다가 된통 패배한 날이래요. 지난주 개봉한 <굿 셰퍼드>의 시발점이 되는 사건 있잖아요? <굿 셰퍼드>는 제목으로 짐작하기 참 힘든 영화였는데 알고 보니 초기 CIA의 사이비 종교적 분위기를 묘사한 말이더군요. “우리는 미국의 선한 목자다”라는(사냥개란 뜻인 줄 알았어요).

번트남: 선한 목자의 역설에 관한 영화죠. 울타리 밖을 지키느라 울타리 안의 양이 어찌 되는지도 몰랐던 성실한 목자.

면회녀: 그렇군요. <대부>의 연상도 강하죠? 알 파치노가 누이의 남편을 죽이고 아내에게 거짓말을 하는 장면이 있는데, <굿 셰퍼드>에는 그것과 정확히 포개지는 장면이 아들 결혼식에서 연출되죠.

번트남: 확실히 <대부2>의 잔영이 강하죠. 이 영화의 크레딧에서 제작자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이름은 로버트 드 니로 감독만큼 중요해요. 이야기가 복잡하고 치밀해서인지 러닝타임이 긴데 전혀 지루하지 않더군요.

면회녀: 각본은 <뮌헨>과 <인사이더>를 쓴 에릭 로스군요. 플롯이 무진장 복잡한데 “뭐야? 자기도 모르고 쓴 거 아냐?” 싶은 복잡함이 아니라 시나리오를 한번 읽어보고 싶도록 만드는 각본이었어요. 중견 남자배우들 동창회 같았어요. 알렉 볼드윈, 윌리엄 허트, 로버트 드 니로에 티모시 허튼까지. 배우들이 보통 사람보다 더디 늙잖아요? 그런데 마침내 한 세대씩 늙은 이 사내들을 보니 제 인생의 이정표를 보는 것 같았어요.

번트남: ‘클래스 오브 85’쯤 되는 건가요? 무척 좋아하는 배우인데, 존 터투로도 나왔죠.

면회녀: 전 그 배우가 <5번가의 비명>에서 펭귄을 때려죽이는 것을 본 이후 언제나 무섭답니다. 이 영화는 전도유망한 예일대생이 CIA가 되어 영혼이 닳아가는 이야기인데, 선배가 보시기엔 주인공의 인생이 결정적으로 타락하는 순간이 어디인 것 같았나요?

번트남: 바닷가 장면 아닐까요? 돗자리 깔고 청각 장애자 애인과 키스하고 있는데 안젤리나 졸리의 오빠가 찾아와서 누이가 한 번 불장난으로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장면.

면회녀: 인생이 엇나가는 삐걱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죠.

번트남: 금가는 소리에 더 가깝죠. 아, 이걸 ‘기스 나는 소리’라고 쓸 수 있어야 제대로인데….

면회녀: 제겐, 예일대 재학 시절 맷 데이먼이 나치 동조자인 줄 알고 FBI에 밀고했던 교수(마이클 갬본)를 세계 대전 중 다시 만났는데 알고보니 영국 공작원이었음을 발견하는 장면이 결정적으로 보였어요. 그때까지는 ‘밀고’라는 행위와 주인공의 품성이 분리되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 모든 것이 조작이었음을 아는 순간 그의 인생이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 같거든요. 아무튼, 선배는 “드 니로가 계속 감독을 했으면 좋겠다”에 한표 던지시겠네요?

번트남: 물론입니다. 요즘에만 한정하면 오히려 연기보다 나은 듯.

면회녀: 배우가 연출한 영화답게 근사한 대사도 많은데, 그 중 영화 기자로서 좌우명 삼을 만한 몇 마디도 있었어요.

번트남: 들려주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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