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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이입을 하게 만드는 최루 드라마 <내일의 기억>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남자의 위엄 있는 투병기

펑펑 울었다. 더 중요한 것은 실컷 울고 나서 뒤늦게 속은 기분이 들거나 울었다는 사실이 부끄럽지 않았다는 것이다. 니콜라스 케이지가 주연했던 ‘당신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 더 잘 어울리는 제목이 될 것 같은 <내일의 기억>은 강력하게 감정이입을 하게 만드는 최루 드라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최루물로서 감정을 착취하지 않는다. 품위를 갖추면서도 관객의 눈물을 쏙 빼게 만드는 드라마를 만드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광고회사 직원인 사에키(와타나베 겐)는 성실한 일처리로 회사의 신임을 받는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건망증 증세가 깊어지면서 고민에 빠진다. 아내 에미코(히구치 가나코)의 강권으로 병원에 간 사에키는 알츠하이머병 환자라는 진단을 받자 큰 충격을 받는다. 그는 결국 딸의 결혼식을 치른 뒤 사직하고 본격적인 투병 생활에 들어간다. 알츠하이머병 환자의 눈물겨운 투병을 다룬 이야기는 예상대로 흘러간다. 코믹하게 느껴질 정도로 가벼운 증세에서 시작해 점점 병세가 심해지고 이에 따라 좌절도 점층된다. 그간 내조만 해오던 아내는 간병을 도맡는 동시에 취직해 돈까지 벌어야 한다. 그리고 부부는 고통 속에서도 그들의 사랑과 삶을 지키기 위해서 분투한다. <내일의 기억>은 다르게 말하지 않는다. 그저 좀더 깊게 말할 뿐이다. “그릇을 보면 만든 인간이 보여. 자기와 똑같은 그릇을 만드는 법이니까”라는 부부의 옛 도예 스승의 말처럼, 이 영화는 만든 사람들의 성품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사에키가 증세를 처음 드러내는 것으로 묘사되는 내용이 할리우드 스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이름을 잊어버리는 것이란 사실은 흡사 와타나베 겐이 이 영화에 임하는 자세를 암시하는 부분 같다. <라스트 사무라이> 이후 <게이샤의 추억> <배트맨 비긴즈>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같은 영화에서 ‘위엄있는 동양 남자’ 캐릭터를 인상적으로 구현해온 와타나베 겐은 그의 할리우드 출연작에서와 전혀 다른 연기 스타일로 혼신의 힘을 다한다. 좌절하고 슬퍼하는 연기를 반복할 수밖에 없는 극의 성격에도 불구하고, 장면마다 조금씩 다른 감정을 넣어가면서 입체적으로 연기한다. 에미코 역의 히구치 가나코도 와타나베 겐의 연기에 성실히 조응하면서 제 몫을 해낸다.

휴먼드라마적 측면 외에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가 ‘일본인이 꿈꾸는 바람직한 일본인상’을 그대로 드러낸다는 점이다. 이 영화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위치에서 성실한 삶을 산다. 훌륭한 직업인인 동시에 믿음직한 남편인 사에키와 외유내강의 전형으로 현명하게 대처하는 에미코는 말할 것도 없고, 친구와 부하 직원 하나하나까지 전부 그렇다. 심지어 사에키를 해고하는 회사 간부도 인간미를 지녔고, 사에키의 병을 고자질해 그의 자리를 꿰찬 후배까지도 최소한의 품위를 갖췄다. 특히 언뜻 냉정해 보이는 의사는 전문지식과 직업윤리를 체화한 모습으로 깊은 인상을 남긴다.

급작스런 발병을 다루는 영화들은 그 직전까지 일에만 몰두했던 삶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관성적으로 드러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갑자기 인생에서 조퇴하게 된 상황에서도 그전까지 모든 것을 바친 26년간의 직장생활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지 않는다. 가족과의 관계만큼이나 일도 소중했다고 말하는 영화를 보는 것은 기묘한 체험이다.

악인의 음모 탓도 아니고, 잘못 살아왔기 때문도 아니다. 그저 누군가의 삶에는 모든 것을 뒤흔드는 균열의 순간이 불현듯 찾아온다. 분명 삶이 행과 불행을 선택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행과 불행이 삶을 선택한다. 그러나 불행이 점찍은 삶에서도 자존과 위엄을 애써 지켜내면서 최후를 향해 걸어갈 수는 있다. “언젠가는 누구나 죽습니다. 인체는 처음 십몇년 이후엔 노쇠해지기만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인간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극중 의사의 대사 속엔 이 영화가 하고 싶은 말이 모두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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