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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 몸이다

<두 번째 사랑>의 김진아 감독

“미국의 에이전트 CAA와 계약을 맺었고 파라마운트사와 새 영화도 준비 중이다. 이제 전업감독 해야지. 3년째 강의했던 학교 수업도 이번 학기를 마지막으로 끝낼 예정이다. 감독이 연출로 밥 먹을 수 있으면 선생 노릇 안 해도 되지 않겠나. (웃음)” <두번째 사랑>을 만드는 동안 김진아 감독은 몸이 몇개라도 부족할 만큼 바쁘게 살았다. 이 영화를 만드는 동안에도 하버드대학 영상예술학부 초빙교수로서 매 학기 두 과목씩을 가르치는 일은 계속해야 했다. 여름방학 동안 25회차로 촬영하고 학기 시작한 뒤로는 월요일에서 수요일까지 강의하고, 목요일에 뉴욕으로 날아가 편집하고, 다시 주말에 보스턴으로 오는 살인적인 일정을 보냈다. 고된 땀이 빚어낸 결과물은 결이 고운 멜로드라마로 나왔다. 백인 여성이 두명의 한국계 남성 사이에서 자기의 욕망을 찾는 내용이다. 한·미 제작사의 실험적인 합작품이자 뉴욕 독립영화의 일면을 보여주는 영화다. 그리고 무엇보다 김진아 감독 편에서 본다면, 1950년대 미국의 가족멜로드라마와 한국의 50, 60년대를 풍미한 통속멜로드라마가 만나기를 바랐던, 더글러스 서크와 신상옥의 결합을 꿈꾼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파라마운트와 계약한 새 작품은 어떻게 돼가나. =개발 중이다. 선댄스에서 5일 동안 여섯개의 할리우드 스튜디오 개발팀을 만났고 그중 파라마운트를 선택한 건데, 에이전트를 통해서 스크립트를 많이 받았다. 그런데 마음에 드는 게 별로 없었다. 그중에 딱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있었다. 여자주인공이기도 했고. 누가 붙어 있느냐고 물었더니 안젤리나 졸리라고 하기에 무조건 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틀 뒤 에이전트에게 전화가 온 거다. 이틀 전에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가져갔다고. 정말 좋은 스크립트는 그런 사람들이 훔쳐가는 모양이다. 솔직히 내가 클린트 이스트우드하고 경쟁할 순 없지 않나. (웃음) 그래서 아예 그럴 바에야 초기 개발하고 있는 프로젝트를 달라고 했다. 여자 두명이 주인공이고, 연기파 여자배우 두명을 붙일 가능성이 있는 프로젝트다. <두번째 사랑>의 히치콕 버전이랄까. 평범한 가정주부 옆집에 굉장히 예쁜 독신 여성이 이사오면서 그 둘의 정체성이 바뀌어간다는 묘한 사이코스릴러다. 지금 작가하고 초고를 같이 써가는 중이다. 한국말로 하면 <질투하는 여인>(The Jealous Woman) 정도 될 것 같다. 파라마운트에서 생각하는 건 나오미 왓츠와 니콜 키드먼인데, 그 정도 스타를 캐스팅하려면 개발 단계에서부터 배우들의 의견을 들어야 하는 거라 지금 그 작업 중이다. 올해 가을까지 초고를 완성하고, 겨울쯤부터 구체적인 캐스팅에 들어가려고 한다.

-선댄스에서는 반응이 좋았다고 들었다. =내 입으로 이런 말 하는 건 민망하지만(웃음), 그랬다. 원래 나는 시사회장에 메모지와 수첩을 들고 가서 관객의 반응을 적는다. 여기서 웃고 저기서 우는구나, 이런 걸 체크한다. 그런데 선댄스에서는 사람들이 너무 몰입해서 보니까, 그렇게 체크하는 행동 자체가 미안하다는 느낌이 들어 그만뒀다. 메인 극장에서 상영하고 난 다음에 사람들이 기립박수를 치는데 나 같은 냉혈한도(웃음) 눈물이 핑 돌고 한국식으로 90도 인사하게 되더라. 머리를 많이 굴려야 하는 게 아니라, 마치 더글러스 서크 영화처럼 정석대로 만든 거라서 그런가보다.

-처음에는 호러영화를 구상했다고 들었다. 그러다 하버드 초빙교수로 갈 즈음 이 영화를 구상하게 됐다고 알고 있다. 그 시기에 구체적으로 어떤 경험이 있었나. =나는 지금도 여자가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장르는 호러와 멜로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내 화두는 결국 여자가 자신이 추구하는 일을 알고 그걸 할 때 무슨 일이 생길까 하는 것인데, 그때 무서운 일이 생기면 호러고 슬픈 일이 생기면 멜로인 거다. 그때는 호러가 맞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하버드에 갔을 즈음, 내가 미국을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도 미국이 별세계로 보였다. 미국 지식인층의 심장부 역시 골수 백인사회라는 걸 깨달았다. 그곳에서 내가 아시아인들을 많이 볼 수 있던 곳은 차이나타운이었다. 보스턴 차이나타운은 뉴욕 차이나타운하고 또 달라서 되게 우울하다. 거기서 아시아 남성들이 완벽하게 무성화한 존재로 취급받는다는 걸 알았다. 내가 고민하고 있던 여성의 욕망 외에 아시아 남성의 성에 대해서도 민감하게 생각하게 된 거다. 그게 두 남자 캐릭터가 나온 계기인데, 소피(베라 파미가)의 남편인 앤드루(데이비드 맥기니스)는 그나마 성적인 존재로 여겨질 만한 전문직 아시아 남자지만 그 사람이 사실은 정자에 이상이 있는 사람이고,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불법체류자인 지하(하정우)야 말로 꿈틀거리는 생명력과 건강한 몸을 가진 남자라는 두 극단을 보여주고 싶었다. 또 한 가지 계기는 내가 두 번째 학기부터 한국영화 강의를 맡게 되면서다. 전공자는 아니지만 원래 좋아했고 세미나 형식이라 부담없이 맡게 되었는데, <하녀> <자유부인>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같은 한국 고전영화들을 프린트로 새로 보면서 멜로라는 장르가 이렇게 대단하구나, 느낀 거다. 그 전까지 여자의 욕망을 호러로 풀어보려 했다면, 방향을 바꿔 멜로로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특정한 영화를 염두에 두고 장면화한 것이 있나 =무의식적으로 보자면 <지옥화>에서 최은희가 피아노 치는 장면. <자유부인>에서 주인공이 집으로 돌아오는 골목길 장면. <자매의 화원>의 의상 컨셉. 그리고 <씨받이>에서도 영감을 많이 받았다. 비즈니스로 시작한 것이 사랑이 된다는 것.

-소피 역의 베라 파미가는 금발의 백인 여배우인데도 이상하게 성적인 면보다 모성애가 더 강조되어 보인다. =그런 소리를 들으면 나는 좋은데, 말하자면 베라는 백지 같다. 백치가 아니라. (웃음) 주변 색에 따라 눈동자 색이 바뀌는 희귀한 눈을 갖고 있다. 그런데 배우로서 베라 자신도 그렇다. 완전히 변신이 가능한 배우다. 원래 내가 생각했던 소피 캐릭터는 부잣집 마나님 느낌이 좀 있었는데, 베라를 보는 순간 순진한 매력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굳혔다. 미국은 그런 캐릭터 내용을 상의할 때 매니저를 통하지 않고 배우와 직접 한다. 되게 똑똑한 친구인데 할리우드에서 여자배우들이 섬세하지 않게 그려지고 맡을 역할이 많지 않은 것에 불만이 많다. <디파티드> 때에도 각본에 불만이 많았고, 마틴 스코시즈도 그걸 알고 있었다. 심지어 그 영화에서 어떤 자기 대사는 자기가 쓰기도 했으니까. 마틴 스코시즈가 그걸 인정해줬다. 나하고는 몹시 잘 맞아서 할리우드에서 그 복잡하고 까다롭다는 노출신도 아주 편하게 찍었다. 복도에서 지하와 소피가 섹스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건 원래 없던 장면이다. 그런데 베라가 “여기서는 팬티 내리고 엉덩이에 키스 한번 해줘야 감정이 산다”고 해서 들어간 장면이다.

-누가 봐도 이전까지의 작품이 개인적인 심리의 심연을 보여준 거라면 이번 영화는 대중적인 장치를 많이 고려한 영화다. =일단 나 개인에 대한 관심이 없어졌다고 해야겠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를 보면 왜 그런 말하지 않나. “모든 여자애들에게는 자기 발가락 자기가 찍으면서 좋아하는 때가 있다”고. 내 생각에 여자는 대학을 졸업하는 순간부터 자기 자리를 찾는데 어려움을 겪는데, 그때 대처할 수 있는 건 나르시시즘밖에 없다. 우선 자기를 알아야 하니까. 그래서 나도 많이 헤맸던 때가 <김진아의 비디오 일기>나 <그 집 앞> 만들던 시기다. 그때까지만 해도 야심만만해서 이 세상에 내 자리는 어디인가 고민하던 시기였으니까. 그런데 서른 넘어가면서 든 생각은 나는 여자고 영원히 유목민이라는 거다. “어차피 위대함은 그들(남성)의 것이니까”라는 말을 자주 하는 선배도 있다. 동의한다. 그러면서 나를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의 어떤 기계라고 생각하기로 했고, 그러면서 나 자신에 대한 나르시시즘적 관심이 없어졌다. 또 한 가지는 직장 생활하면 왜 사람이 건강해지는 면이 있잖나. 3년 동안 학교에서 일하면서 시간적으로 고생하다보니 나 자신에 대한 생각을 다 잊었다. 여자감독이 갖는 어떤 한계가 있다. 자기를 투사하려는 자전적인 성향을 못 벗어난다. 하지만 정도의 차이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래서 다음 작품도 개인적인 나하고는 상관없는 스릴러다.

-방법론은 바뀌었겠으나 화두가 바뀐 것 같지는 않다. 여성의 욕망이 언제나 화두다. 다만 <그 집 앞>의 두 주인공 가인과 도희가 겪는 몸의 여행, 말하자면 임신, 낙태, 새로운 사람에 대한 성욕 등이 두 사람에게 양분되어 있었다면, 이번에는 소피라는 한 사람으로 합쳐졌다는 느낌이다. =맞다. 아마 그것도 나 자신에게 관심이 없어지면서 생긴 것 같은데, <그 집 앞>까지는 영화에서 타인과의 관계가 거의 없지 않나. 자기 자신과의 관계만 있을 뿐. 그런데 그걸 관계 안에서 풀게 되면서 한 여자로 합쳐지고, 대신 두 남자가 생긴 것 같다.

-아시아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다음 백인 남성 둘을 배치하는 영화의 설정을 생각해보지는 않았을까 추측해봤다. =그러면 아마 지금과 다른 영화가 됐을 거다. 이 영화에서의 미학적 전략이 있다면 모든 장면에 역설이 들어갔으면 하는 거였다. 기본적으로 내러티브도 남편에 대한 희생이 남편에 대한 배반으로 이어진다는 것이고. 또 성모 마리아가 되고 싶은 욕망이 창녀로 전락하는 것이고. 그 역설의 일환 중 하나가 미국에서 가장 주류라 할 수 있는 백인 여성이 아시아 남성 사이에서 갈등하게 되는 것이었다. 백인 여성이 아시아 남성과 결혼하는 경우는 그렇게 오래 미국에 살았어도 두세 커플 이상 본 적이 없다. 그런 식으로 상식을 뛰어 넘는 조합을 만들고 싶었다. 미국사회에서 마이너리티는 사실 앤드루인데 그의 집안에서 마이너리티는 오히려 소피다. 만약 아시아 여성과 미국 남성이었다면 그런 느낌이 나기 어려웠을 거다. 아시아 여성은 전세계에서 가장 하층계급이니까. 힘의 전복을 줄 수가 없다. 또 한 가지는 아까 말한 것처럼 아시아 남성의 무성화한 몸에 섹스를 부여하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몸의 사랑이 정신의 사랑을 넘어서는 이야기라는 게 이 영화의 흥미로운 점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몸에 대한 화두는 앞으로도 본인에게 중요할 것 같다. 여성의 환경이나 사유에 대해 발언하는 방법보다는 늘 여성의 몸에 대해 더 중요하게 말한다. =사랑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 몸이다. 비록 나 자신에게 관심이 많이 없어지긴 했지만, 내가 세상과의 접점을 찾으려고 할 때 내가 나라는 인간에 대해 고민할 때, 가장 치열하게 파냈던 게 몸이라는 부분이다. 여자라는 문제를 각인하게 하는 건 결국 몸이니까. 몸에서 시작하지 않는 혁명이나 사유는 의미가 없다고 믿기 때문에. 너무 투사 같은 말인가? (웃음)

-영상의 결이 곱다. 촬영은 누가 했나? =매튜 클락이라는 사람인데 이 작품으로 입봉했다. 한국에서는 이 작품이 메인 상업영화지만 미국에서는 저예산영화다보니 스탭을 구하기가 좀 힘든 경우가 있었다. 무엇보다 이 친구는 사람 얼굴을 찍는 데 따듯함과 애정이 느껴지게 하는 재주가 있어 같이 일하게 됐다. 내가 원하는 게 아주 뚜렷했기 때문에 그걸 잘 뒷받침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기도 했고. 같이 만나서 사진에 대한 이야기들을 해보니 말도 잘 통했고. 아니나 다를까, 이 영화 나오자마자 갑자기 급부상해서 지금 잘나가고 있다. 사실은 이런 면도 있었다. 베라가 <조슈아>를 끝내고 되게 힘들어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촬영장에서는 치어리더가 돼서 기쁘게 해줘야겠구나, 생각하고 있었다. 이 촬영감독이 되게 유머러스하다. 그래서 내가 그 친구하고 같이 촬영장에서 코미디 복식조가 돼줘야겠구나, 생각했다. 나는 감독이 프리프로덕션 단계에서는 작가지만 촬영장에서는 배우들이 잘 놀게 여건을 만들어주는 치어리더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미 합작영화의 연출자로서 차후에 이런 시도를 하려는 연출자들에게 해줄 만한 조언이 있을 것 같다. =이런 건 사실 제작자가 답해야 할 말이긴 한데…. 아, 이런 걸 말하면 좋겠다. 베라와의 인연으로 마틴 스코시즈를 알게 되어 식사 자리에 초대되어 간 적이 있다. 그 사람이야말로 엄청난 거장 아닌가. 안 어울려 보여도 내가 의외로 그 사람 영화를 좋아한다. (웃음) 그런데 그 노련한 거장이 식사 자리에서 꺼내는 얘기가 내가 영화 찍으면서 겪는 고충과 어찌나 똑같던지. 잭 니콜슨은 스탭들이 몹시 어려워해 연락하기를 꺼리는 통에 자기가 매번 연락하느라 고생했다고 하는 말이나, 영화 이거 정말 더러워서 못해먹겠다고 하는 말이나. (웃음) 영화란 크기만 다르지 어디가나 다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뉘앙스와 구체적인 예의범절이 다를 뿐 인간관계가 중요하다. 물론 규모나 까다로운 법적 문제들이 더 있긴 하지만 사람을 중요시해야 하는 건 다 똑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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