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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즈비언 로맨스 <스파이더 릴리>
김혜리 2007-06-20

두 여자가 나쁜 꿈에서 깨어 함께 아침을 맞기까지

사랑영화 <스파이더 릴리>에서, 끝내 만나야만 할 운명의 연인은 샤오리(양승림)와 다케코(양락시)다. 섹스를 포함한 여성과 여성의 멜로드라마 <스파이더 릴리>는 성적 정체성을 한번도 화제로 테이블에 올리지 않는다. 레즈비언이라는 주인공들의 존재 조건은 보름밤 달처럼 거기 태연히 놓여 있다. 영화 표면에 드러난 이야기만 보면, 샤오리와 다케코가 이겨내야 하는 주요한 장애는 불행한 가족사, 그리고 거기서 파생된 죄책감과 열등감이다. 현실적인 관객이라면 넘겨짚을 수도 있다. 유년의 나쁜 추억에 대한 샤오리와 다케코의 고착은 어쩌면, 그들이 해결해야 할 한층 중대한 문제를 설정함으로써 섹슈얼리티를 상대적으로 가볍게 받아들이려는 자기 보호의 몸짓인지도 모른다고.

샤오리는 오랫동안 할머니와 단둘이 살아왔다. 그녀는 인터넷에 동영상 블로그를 만들어 성인용 사이트에 서비스한다. 밤마다 자신의 초라한 방에다 꾸민 예쁜 스튜디오에서 가발을 쓰고 춤추며 로그인한 사람들에게 명랑하게 말을 건다. 샤오리는 속삭인다. “나는 당신 꿈 안에 사는 유령이고 당신 또한 내 꿈 안에 사는 유령입니다.” 고객에게 더 짜릿한 자극을 주려고 문신 가게를 찾은 샤오리는 뜻밖에도 아홉살 시절 첫사랑인 다케코와 재회한다.

다케코는 냉정하고 유능한 문신 아티스트다. 고교 시절 매달리는 동생을 뿌리치고 좋아하는 친구와 밤을 보낸 날, 그녀는 지진으로 아버지를 잃었다. 홀로 참변을 겪은 남동생 칭은 아버지 팔의 꽃 문신을 제외한 기억을 잃는다. 자책에 사로잡힌 다케코는 애인과 헤어지고, 아버지와 똑같은 피안화(彼岸花: 지옥가는 길 양편에 핀다는 나리꽃) 문신을 제 팔에 새기고 문신 아티스트로 훈련받는다. 다케코의 기억 속에 꼬마 샤오리는 희미하다. 그러나 샤오리는, 오지 않는 엄마를 고집스레 기다렸던 어느 해질녘 그녀를 자전거에 태워주었던 아름다운 언니의 콧노래를 잊은 적이 없다.

<스파이더 릴리>는 주제를 향해 모든 것이 앞으로 나란히 정렬된 영화다. 각본과 대사들은 의도적으로 많은 의미를 눌러담고 있으며 여기 자막으로 덧붙여진 아포리즘이 관념성을 더한다. 다케코와 샤오리의 일은 심리와 직결돼 있다. “그렇게 내가 보고 싶어, 엄마?” 어린 샤오리는 돈벌기 위해 딸을 방치한 엄마와 감옥에 간 아빠와 통화하는 시늉을 하며 혼자 논다.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 자기 곁에 있다고 상상하는 일에 유능해진 소녀는, 보이지 않는 불특정 다수에게 애인 역을 하는 ‘웹걸’이 된다. 가상현실은 잊혀지고 버림받기만 한 여성이 유일하게 안전하다고 느끼는 삶의 장이다. 샤오리는 “이런 일 하지 말라”고 조언하는 고객에게 여기선 내가 원할 때 접속하고 원할 때 끊을 수 있다고 항변한다. 그러나 침대 위에 몸을 던진 샤오리의 눈에는 웹캠이 비추지 않는 초라하고 눅눅한 방의 벽이 보인다. 누군가가 기억해줄 때야 실체가 된다고 믿는 샤오리와는 반대로 다케코는 문신이라는 흔적만이 망각을 막을 수 있다고 믿는다(“남자들은 파워를 가장하기 위해 문신을 하고 여자들은 사랑을 기억하기 위해 문신을 한다”고 그녀는 적는다). 그래서 오직 새기고 또 새기기만 한다. 새롭게 기록해야 할 기억을 만드는 일은 다케코에게 너무 버겁다. 순서는 정해져 있다. 샤오리가 먼저 손 내밀어 가상현실로 다케코를 초대하고 거기서 싹튼 감정이 현실로 범람한다. 두 여자 곁에는 착하지만 약한 남자들이 어슬렁거린다(엄밀히 말해 거치적거린다). 다케코의 의존적 동생, 음란 사이트 단속에 나선 선량한 경찰, 문신에 중독된 건달은 다케코와 샤오리에게 계속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른다. 그들은 말을 더듬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할 이야기가 없다.

앞서 지적했듯 <스파이더 릴리>에서 성 정체성의 번민은 주된 이야깃거리가 아니다. 그러나 거꾸로 <스파이더 릴리>의 로맨스가 주류 이성애자 사이의 이야기라고 가정하면 남는 장점이 많지 않다. 유년의 상처에 너무 과중한 책임을 돌리고 우연과 운명에 열쇠를 맡기기 때문이다. 적어도 레즈비언 로맨스라는 틀은 관객에게 여배우의 아름다움을 다른 각도에서 발견하게 만든다. 다케코 역의 양락시에게서는 한국 배우 이나영을 연상시키는 신비로운 박하 향기가 난다(늦기 전에 이나영에게 그녀만이 할 수 있는 배역을!). <스파이더 릴리>는 두 연인이 사랑할 준비를 마치고 심호흡을 들이쉬는 순간 끝난다. 제57회 베를린영화제에서 가장 뛰어난 퀴어영화에 주어지는 테디베어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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