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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자고 말하는 광주 영화 <화려한 휴가>
김혜리 2007-07-25

미안하다고, 기억하자고 말하는 광주 영화

1980년 5월 전라남도 광주는 군부의 계엄령 확대에 항의하는 시위로 술렁였다. 공수부대의 잔혹함은 시민들의 분노에 불을 질렀고 시위대 주력은 5월20일을 기점으로 학생에서 시민으로 옮겨갔다. 5월21일 오후 발포 명령을 기해 비무장 시민 학살에 대응하여 시민군이 결성됐고 광주의 싸움은 민중 항쟁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마지막까지 항전한 이들은 5월27일 새벽 도청에서 죽임을 당하거나 긴 모욕과 고통을 겪었다.

영화가 역사를 재현하는 길은 여러 갈래다. 기록필름을 재구성할 수 있고 생존자의 증언을 경청할 수도 있으며, 허구를 빌려 과거를 극적으로 재연하는 법도 있다. 세 번째에 해당되는 <화려한 휴가>는, 평범한 서민을 거리로 나서게 한 힘이 무엇이며 그들은 어떻게 스러져갔는지 상상한다. 영화가 시작되면 연두색 포니 택시가 그림 같은 가로수 길을 달린다. 운전석의 강민우(김상경)는 행복한 얼굴로 초여름 미풍을 음미한다. 청년 가장인 그는 공부 잘하는 동생 진우(이준기)를 애지중지하고, 진우와 같은 성당에 다니는 간호사 박신애(이요원)를 사모한다. 동생의 서울대 법대 진학에 큰 희망을 거는 형의 모습은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보았던 것이다. 신애의 아버지 박흥수(안성기)는 정치 군인들과 뜻을 달리해 퇴역한 대령으로 민우네 운수회사 사장이다. 구변 좋은 동료 인봉(박철민)은 민우의 연애 카운슬러다. 영화 중반에 닥쳐올 지옥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일까. <화려한 휴가>의 도입부는 항쟁 전 시민들의 일상을 오붓한 낙원처럼 묘사한다. 배우들은 과장된 매너로 선량함을 표현한다. 민우의 연애 고민을 상담하던 인봉은 TV뉴스를 아예 꺼버린다. 1980년 5월이라는 시점을 고려하면 어색할 정도로 극중 시민들은 정치를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며칠 뒤 이들은, 혈육의 죽음에 가슴이 찢기고 반인륜적 참극에 넋을 잃은 채 총을 움켜쥔다. 애국가를 ‘반주’ 삼아 저질러진 5월21일 오후 금남로 학살을 재연한 시퀀스는 우리를 얼어붙게 한다. 조금 전까지 대치한 군인들에게 농담을 던지던 시민들이 쏟아낸 피는 삽시간에 대로 위에 시내를 이룬다. 광주를 풍문으로라도 접한 관객이라면, 이 장면은 단지 눈으로만 볼 수 있는 이미지가 아니다. 하지만 <화려한 휴가>는 학살의 경악에 자연히 뒤따르는 “누가? 왜?”라는 질문은 멀리까지 좇지 않는다. 강경 진압을 종용하는 전두환 일파 장성(극중 최훈기 준장)의 얼굴을 보여줄 뿐이다. 비극의 전체적 윤곽을 더듬는 유일한 대사는 “가만히 있는 개를 걷어차서 짖으면 매질해서 쓰러뜨리고, 시끄러운 걸 막아줬으니 나머지 모두 말 잘 들으라는 격이지”라는 김 신부(송재호)의 비유 정도다. 대신 <화려한 휴가>는 권력욕이 낳은 야만이 수많은 삶을 어떻게 일거에 부숴버리는지 보여준다. 잘못된 역사는 포악을 부려 간호사가 살인하게 만들고 신부에게 무기를 쥐어준다. 파릇한 소년, 방금 사랑을 시작한 젊은이, 젖먹이를 둔 아버지는 반문할 틈도 없이 사지에 뛰어든다.

<화려한 휴가>는 함께 통곡하기를 권하는 데에 머문다. 웃음과 로맨스, 가족애를 안전하게 배합한 연출은, 5·18의 역사적 특수성과 이 사건이 드러낸 인간성의 양극단을 담기에 너무 작은 그릇으로 보인다. 전형적인 인물과 일화, 긴장이 떨어지는 전개는, 아직 차갑게 식지 않은 역사를 소재로 취한 장점을 살리지 못한다. 처음 광주 항쟁의 안쪽으로 들어갔지만 <화려한 휴가>는 소재의 파괴력을 이용하는 데에 소극적이다. <화려한 휴가>는 “우리는 폭도가 아니다”라는 외침을 거듭 강조한다. 그러나 이 당연한 외침은 영화에서 더이상 구체화되지 않음으로써 은연중에 5·18의 정치적 성격을 지워버리는 효과를 낸다. 무장 항쟁은 정당방위였다. 또한 “계엄 철폐”와 “전두환 퇴진”을 애초부터 요구한 광주 시민들은 분명 정치적이었다. 광주 시민의 명예는 그 정치성을 포함한다. “가족애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영화”로 요약되는 <화려한 휴가>의 마케팅 슬로건은, 정치를 금기시하고, 연루되어선 안 될 음습한 것으로 간주하는 한국 대중영화의 두려움을 내비친다. 과연 광주는 가족을 잃은 자에게 가장 깊은 상흔을 남겼으나 동시에 5·18은 시민들이 자기 가족만 생각했다면 일어날 수 없었던 사건이기도 했다.

역사를 그린 영화는 싫건 좋건 집단적 기억의 밑그림이 된다. <화려한 휴가>는 이미지의 몸을 입지 못한 채 구천에 떠돌던 역사를 스크린에 불러낸 것만으로도 값진 위로가 될 것이다. “우리를 기억해주세요”라는 신애의 절규는 바로 관객에게 날아드는 간청이다. 하지만 <화려한 휴가>는 그들을 기억하되 어떻게 기억할지, 역사의 우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무엇을 경계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언질을 주지 않는다. 역사의 영화적 재현은, 어느 편에 서느냐를 선택하는 문제만은 아니라는 까다로운 사실을 <화려한 휴가>는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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