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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신저토크] “머리는 <시리아나>인데, 몸은 <람보>인 영화죠”

스포일러 있음

울혈도령님(이동진 lifeisntcool@naver.com)이 입장하셨습니다. 선혈낭자님(김혜리 vermeer@cine21.com)이 입장하셨습니다.

김혜리 “<킹덤>은 포스트 9·11 테러 상황을 엔터테인먼트로 발 빠르게 가공한 상업영화예요.” 이동진 “겉으로는 탄식하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총격과 폭발장면을 스펙터클로 신나게 소비하는 영화랄까요.”

선혈낭자님의 말(이하 낭자) : 늦어서 죄송합니다. 점심부터 못 먹었으니 눈 감아주세요.

울혈도령님의 말(이하 도령) : 뭐라도 드시면서 하세요. ^^

낭자: 그렇지 않아도 사과 먹으며 하고 있어요. ^0^

도령: 참, 오늘이 애플데이라던데요? 평소 미안했던 사람에게 사과를 선물하면서 사과하는 날이라나? 세상에나. -.- 그게 왜 오늘인지는 몰라요. 좌우지간 저같이 민폐를 많이 끼치는 사람은 사과를 트럭으로 사야 할 듯. -_-

낭자: 뭘요. 이번주에 이야기할 <킹덤> <식객> <블랙 달리아>는 뜻밖에도 피가 흥건하더군요.

도령: 그래서 빛깔도 곱게, 아이디가 선혈낭자구랴.^^ 거기 운을 맞추느라 전 요즘 속 터지는 일도 많은 김에 그냥 울혈도령으로 골랐습니다.

낭자: 잘 지내고 계시는 줄 알았는데요. 그러다 진짜 속 터질 때는 뭘 대화명으로 하시려고요.

도령: 그땐 (뇌)일혈도령으로 하죠 뭐. -_-# 이번주는 발품에 비해 소득이 좀 적은 주였죠?

낭자: 네. 눈이 확 뜨이는 영화는 없었습니다. 지난 부산영화제 기간에 다뤘던 <투야의 결혼>이 개봉작 가운데 가장 좋은 편인데요. 이미 이 꼭지에서 이야기한 탓에 빠지게 됐어요. <킹덤>은 연표와 그래픽으로 미국의 중동 외교 역사를 브리핑하며 시작합니다. 제1산유국 사우디아라비아, 제1석유 소비국 미국의 관계를 정리하면서요. 그래서 혹시 <불편한 진실>과 같은 부류의 고발을 담은 영화일까 싶었는데, 보고 나니 <시리아나>처럼 정치 상황의 본질을 캐는 욕심까지는 품지 않은 영화였습니다.

도령: ‘통찰없는 <시리아나>’입니다. 미국에선 <CSI: 리야드>라는 표현을 쓰더군요. ^^

낭자: 제법 어울리네요. 하지만 수사 과정은 <CSI>보다 추리의 쾌감이 떨어졌습니다.

도령: 퍼즐맞추기 쾌감이 한참 떨어지는 게, 처음부터 아부 함자라는 사람을 용의자로 콕 찍어서 리야드에 간 뒤, 줄창 아부 함자만 되뇌다가 결국 아부 함자에게로 가서 영화가 끝나니까요. -.- 말씀하신 대로, 이 영화는 시작이 거창하죠.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나면, 자주 인용되는 성경의 말을 반대로 쓰고 싶어져요. 시작은 창대했으나 결말은 미약하다고 할까요.-..-

낭자: <킹덤>은 포스트 9·11 테러 상황을 엔터테인먼트로 남보다 좀더 발 빠르게 가공한 상업영화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1, 2차대전이나 베트남전을 장르적 공식으로 다룬 오락영화들이 있듯 말이죠.

도령: 좀 과하게 말한다면, 양두구육(羊頭狗肉) 액션영화 같은 느낌이 있죠.

낭자: +_+ 앗 눈부셔, 사자성어!

도령: 논술공부에 메신저토크를 참고하는 학생들이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잖아요? ^^ 겉으로는 9·11 이후의 테러가 판치는 세계에 대해 탄식하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그 설정 속에서 총격과 폭발 장면을 스펙터클로 신나게 소비하게 하는 영화랄까요.

낭자: 그래요. 윤리적인 회의를 대사로써 군데군데 표현하고 있긴 하지만 복수라는 목적을 갖고 영웅, 악당이 분명히 구분돼 대립하고 폭음과 액션의 스펙터클을 앞장세우고 있지요.

도령: 뭐, 머리는 <시리아나>인데, 몸은 <람보>인 영화죠.

낭자: 그런데 말씀드린 도입부의 해설이나 주인공의 의미심장한 대사로 그런 색깔을 좀 희석시키고 있어요.

도령: 그런데 이 영화가 이야기하는 메시지라는 게 지나치게 원론적인 휴머니즘 수준이잖아요? 가장 중요한 아랍인 캐릭터인 알 가지의 대사인 “테러의 원인은 중요하지 않아요. 100명이 이유없이 죽었다는 게 중요하죠”라는 말이 이를테면 이 영화가 핵심적으로 하고 있는 말인 셈인데, 이건 사실 극소수의 원리주의적 테러리스트를 제외하면 누구나 동의하는, 너무 옳아서 하품 나오는 말이니까요.

낭자: FBI 간부와 행정부 요인이나 외교관이 논쟁하는 장면도 몇개 있던데 그 논점이 좀더 날카로웠다면 훨씬 솔깃한 영화가 됐을 겁니다. “괜찮아 우리가 다 죽여버리면 돼”라는 대사를 양 진영의 캐릭터에게 부여해 이 사태의 원인은 인간이면 누구나 다 갖는 분노고 거기서 비롯되는 비극은 막기 어렵다는 뉘앙스도 남겼죠.

도령: 그게 대단히 메시지를 도드라지게 강조한 장면인데, 저는 너무 직접적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저는 이 영화의 ‘오락영화’적인 측면이 오히려 괜찮았어요. 그걸 ‘오락’으로 소비하려면 좀 마음을 다부지게 먹어야 하긴 하지만요. 폭발장면이나 테러장면 같은 게 상당히 리얼하고, 제작자인 마이클 만을 연상시키는 시가전도 괜찮았어요.

낭자: 사실 마이클 만이 제작해서 그런지 마이클 만 감독풍의 시가전 연출이나 제이슨 본 시리즈의 빠른 스타일을 추종하고 있는 영화처럼 보이죠. 그런데 비슷하지만, 조금 못 미친다는 인상이에요. 물론 액션 시퀀스를 이만큼 능숙하게 다룬 점은 대단하고 특히 도입부의 미국 정유회사 사택 단지 테러 시퀀스는- 말하려니 정말 마음이 불편하네요- 공들여 리듬을 연출한 기색이 역력해요. 하지만 세세한 접합이 어딘가 헐겁고 마이클 만이나 폴 그린그래스 같은 우아함과 뉘앙스에까지는 도달하지 못하죠.

도령: 그 시퀀스에서 압권은 테러범이 마치 피신시키는 데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하는 듯 사람들을 최대한 근처로 끌어 모아서 자폭하는 장면이었죠. 정말 끔찍하더군요.

낭자: 그런 효과를 염두에 두고 있었겠죠. 하필 테러를 한 날이 평화로운 소프트볼 시합이 있는 가족 나들이 날이었다는 점도 그렇고요.

도령: 뭐 그런 상황 설정은 매우 전형적인 거죠. <진주만> 같은 영화조차 그렇잖아요.

낭자: 음, <진주만>은 역사적인 사실이지만, <킹덤>의 소재는 19명이 사망한 건물 폭탄 테러라고 들었거든요. 그런데 극중에서는 100명 이상 미국인이 죽은 다른 장소의 사건이다보니 더욱 설정이 눈에 띄는 거죠. <킹덤>은 인물도 비교적 전형을 따르고 있지 않나요? 팀 구성을 위해 배분된 캐릭터로 보이죠. 수사대가 등장하는 TV시리즈가 흔히 그렇듯 농담꾼, 터프가이, 전문지식을 가진 여성 요원 등등.

도령: 흠. 그러네요. 그중 제가 가장 좋았던 것은 크리스 쿠퍼였어요. 제이미 폭스도 새삼 참 좋은 배우라는 생각을 했어요. 이 영화에서의 연기가 특별히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낭자: 그러고보니 크리스 쿠퍼는 <브리치>에서도 FBI로 나왔었네요. 제이미 폭스는 <킹덤>에서도 잘 보여주듯, 좋은 화술과 설득력을 가진 남자 역에 썩 어울려요. 테렌스 하워드와 나란히 다양화된 흑인 스타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배우예요.

도령: 그런데 <킹덤>을 보면 할리우드영화 특유의 어떤 여유 부리기랄까, 그런 게 좀 불편했어요. 이 영화에서 미국인들은 여유만만하고 냉소가 담긴 유머를 툭툭 쿨하게 던지는데, 그 앞에서 딱딱하고 여유없는 사우디아라비아인들은 그 유머의 제물 역할을 하니까요. ^^ 그 여유로움이 일반적으론 걸리지 않는데, 이렇게 국제정치적인 현실을 다루는 경우엔 좀 불편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낭자: 영화 자체도 좀 여유만만이죠. 중반까지 꽤 늦장을 피우고 액션은 영화 앞뒤에 집중해 터뜨리잖아요. 제가 듣기에 이 영화의 색깔을 잘 드러낸 대사는 제이미 폭스가 사우디인들에게 한 말이었는데 “우리 미국인이 딴 건 몰라도 수사는 좀 하는 편입니다” 하는 말이었어요.

도령: 그 말이 사우디 왕자까지 감동시켰잖아요.

낭자: 뭐랄까. 9·11 테러와 이라크전의 지리멸렬한 결과를 갖고 자신감을 잃어가는 미국 대중을 위로하는 것처럼 들리더라고요. 대사로 들리더라고요.

도령: 헐헐. 그걸로 위로가 되려나….

낭자: 음 그러니까, 남의 나라를 짓밟고 다니는 무뢰한의 이미지가 아니라 <킹덤>의 주인공 FBI 요원들처럼 분노는 있으되 합리성을 잃지 않으면서 전문가적 능력을 발휘해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오고 싶다는 환상과 욕망을 대리충족시켜주는 영화 아닐까요?

도령: 저는 그 대사가 미국 외의 관객을 위한 서비스 대사처럼 느껴지는 측면도 있더라고요. ^^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무서웠던 대목은, 좀 엉뚱한 장면이었어요. 테러 사건 뒤 증언을 청취하는 과정에서 한 여자가 자신의 집엔 큰돈을 들여 만든 ‘세이프룸’ 때문에 피해가 없었다고 증언하잖아요? 그러고 나서 부인이 죽은 옆집을 거론하면서, “잭슨씨 집에는 세이프룸이 없었거든요”라고 말하면서 살짝 미소지을 때였죠. 저는 그런 장면들이 참 무시무시해요. 인간의 행복감이 얼마나 잔혹한 것인가를 여실히 느끼게 해주는 장면이랄까.-_-

이동진: “<식객>의 연출은 평범하고 낡은 느낌이 있어요. 잔재미도 있고 에피소드도 흥미로운 편인데, 극 전체의 구조나 리듬을 보는 시선이 느껴지지 않았어요.” 김혜리: “요리에 대한 시선도 조금 아쉬웠어요. 대립구도가 사치스런 음식 vs 정이 담긴 검소한 음식 같은 뻔한 것이라 승부의 향배도 승부의 해석도 예측 가능해요.”

낭자: 상대적 행복감이군요.-_- 후, 갑자기 말문이 막히네요. 다음은 공기를 바꿀 겸 <식객>을 이야기할까요? <식객>은 보고 있노라니 만화책을 훨훨 넘겨 읽는 기분이더군요. 최대한 이야기의 가시를 바르고 껍질을 벗겨서 입에 넣어주는 영화였어요.

도령: <식객>은 확실히 관객으로선 거의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는 영화죠.

낭자: 주인공과 적대인물의 경쟁 구도를 가진 전문분야 만화의 관습을 관객이 숙지하고 있다는 전제로 잔재미를 주는 에피소드들을 척척 빠르게 던지며 진도를 나갑니다. 각 에피소드는 과제-위기-해결로 구성되고 그것이 반복되며 스테이지가 올라가죠.

도령: 그런 잔재미가 <식객>의 주요한 재미였어요. 웃음을 이끌어내는 특정 에피소드나 대사들의 재미랄까.

낭자: 대령숙수의 정통 후계자 자리를 둘러싼 성찬(김강우)과 봉주(임원희)의 요리 대결 중에는 라면 광고처럼 화면을 분할한 기법도 등장하던데요.^^

도령: 만화책의 컷 구성을 그대로 따온 장면도 있더군요.

낭자: 저는 맛기행 프로그램을 볼 때마다 오늘은 또 맛있다는 말을 어떻게 참신하게 표현하려나, 시식 순서가 되면 괜스레 제가 초조해지는데요. 음식만화들이 흔히 그렇듯 허풍의 재미도 빼놓을 수 없죠. <미스터 초밥왕>이나 <신의 물방울> 같은 만화를 보면 꼭 나오잖아요. 와인을 한 모금 물면 갑자기 제비꽃밭이 펼쳐진다든가. 물론 <라따뚜이>에도 이 관습을 따르는 장면이 있고요. <식객>에서도 심사위원들이 이런저런 말을 하죠.

도령: “내 입 속에서는 이미 궁중연회가 벌어지고 있어요”라는 대사 같은 거요? ^^ 그런데 저는 심사위원들의 표현이 듣기 거북했어요. 만화에서는 충분히 용인될 대사지만 배우의 육성으로 발화되니 듣기 괴로웠어요. 저는 진수(이하나)와 할아버지의 박카스 에피소드 같은 게 재미있었어요. 이리저리 귀여운 대사로 웃게 만드는 장면들도 많았고요. 사실 이 영화에서 배우들의 연기는 상당히 아쉬운 점이 많죠. 대사들이 체화하지 못해서 의미만 동동 뜨는가 하면, 동작이나 표정 연기들도 다들 기본만 하는 것 같더라고요. <경의선>과 비교할 때 김강우씨 연기는 너무 납작했고, 임원희씨의 연기는 캐릭터와 어울리지 않았어요.

낭자: 저는 임원희씨 연기가 아쉬웠습니다. 기존 이미지를 밀어붙이는 것도, 그러지 않는 것도 아닌 애매한 포즈여서 불안정했어요. 봉주는 주요 갈등의 기둥이면서도, 만화책의 개그 컷 같은 역할까지 요소요소에서 하다보니 지나치게 바빠 보이더라고요. <연애시대>로 이름을 알린 이하나씨는 가능성이 커 보였어요. <식객>에서 TV보다 발전한 연기를 보이진 않았어요. 하지만 김선아, 김정은씨를 이을 만한 코미디 재능과 자신감이 보여요. 보통 여배우는 어딘가 미숙하고 청순한 이미지에 의지하다가 20대 후반이 넘어가야 씩씩하고 자기 세계가 확고한 인상을 갖추기 시작하잖아요. 이하나씨는 신인이지만 연약하거나 미숙한 척하지 않고 넉살 좋고 튼튼한 여자를 보여주는 여배우라서 유쾌했어요.

도령: 저도 이하나씨가 개성이 있다고 봤어요. 초반에는 좀 불안한 면이 있었는데, 점점 좋아지더군요. 방송 카메라로 봉주를 갖고 노는 장면에선 코미디 연기 타이밍이 정확했어요. 연출 이야기를 하자면 <식객>은 평범하고 낡은 느낌이 있어요. 무엇보다 연출에 거시적인 시선이 결여된 것 같아요. 잔재미도 있고 에피소드도 흥미로운 편인데, 극 전체의 구조나 리듬을 보는 시선이 느껴지지 않았어요. 스토리의 진행에 따라 플래시백도 편의적으로 그때그때 사용하고요.

낭자: 플래시백 대목에서 화면의 색보정도 단순하고 거친 터치라는 인상이었어요.

도령: “이거 색조가 다르니까, 과거로 봐주세요”라고 대놓고 말하는 느낌이죠. 그리고 요리대회가 극의 뼈대를 이루는데, 이게 진행되면서 점점 긴장을 쌓아가야 하는데, 틈틈이 곁가지 이야기를 하느라 흐름이 끊기니 승부에서 오는 긴장감이 거의 없어요. 그래서 단계마다 발표되는 두 요리사의 점수에 관객이 거의 관심이 없어지게 된다는 거죠. 최고의 숯을 찾는 에피소드는 전체적인 리듬이나 구조로 보면, 이상하게 삽입되어 있거든요.

낭자: 긴장이 흩어진 것엔 악역의 행태가 어이가 없고 뻔한 이유도 있을 거예요. 구성상의 좀더 넓은 시야도 아쉽지만, 저는 요리에 대한 시선도 조금 아쉬웠어요. 음식을 보는 철학도 인물과 함께 뚜렷이 갈등했다면 더욱 구미가 당겼을 텐데 말이죠. <식객>의 대립구도는 사치스런 음식 vs 정이 담긴 검소한 음식, 비열한 숙수 vs 선한 숙수와 선한 자 같은 뻔한 것이라 승부의 향배도 승부의 해석도 예측 가능해요. 거기다 보태어 적자 vs 서자의 구도도 있죠. 할아버지가 바른 요리사면 손자도 그렇다는 셈이니 마음에 걸렸어요.

도령: 너무나 원리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요리영화랄까요.^^ 저는 이 영화에서 가족처럼 기르던 소를 잡는 설정이 정말 이상했어요. 원작을 보지 못해서 이게 원작에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는데, 주인공 캐릭터가 이 영화에서 묘사된 방식으로 볼 때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그 소를 죽인다는 설정 자체가 이상하고, 가족 같은 소를 죽인 이유가 고기를 쓰기 위해서도 아닌, 뼈에서 살을 발라내는 방식을 겨루는 ‘정형’ 때문이었다는 것도 의아하죠. 봉주가 실수하지 않았다면, 그 고기로 탕은 끓여보지도 못한 채 정형으로 끝났을 테니까요. 게다가 일종의 가족을 희생시키는 엄청난 일을 비장하게 하면서도 패한 것으로 일단 결론이 났을 때 그냥 담담히 받아들이는 식의 묘사도 이해할 수가 없었고요. “약속해. 네 희생을 헛되게 하지 않을게”라는 대사는 정말 어찌나 이상한지…. -_-#

낭자: 저 역시 두 번째 지적하신 부분이 석연치 않았어요. 사실 채식주의자가 보기엔 힘겨운, 펄떡거리는 동물들을 물고 내는 장면들이 몇 있죠. 그 밖에도 갸웃했던 점은 있어요. 대령숙수의 정통 후계를 찾는 행사가 숙수의 칼을 가져간 일본인 관료 후손의 제안으로 시작되잖아요. 그런데 승부의 궁극적 판정은 ‘내선일체’의 맛과 정통성 순수성을 강조하는 맛을 대비하며 논한다는 점이었어요.

도령: 단일민족신화와도 관련있는 민족주의적 원리주의적 음식영화라니까요. ^^

낭자: 비단 <식객>과 관련한 이야기만은 아니지만 이 영화 서두에 “좋은 맛은 혀가 아니라 가슴을 움직이는 것이다”라는 말이 나오잖아요.

도령: 자막으로도 강조하죠.

낭자: 저는 그 말에 일말의 진실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정성이란 재료와 처리 과정도 포함하니까 당연하죠.

도령: 어려서부터 먹던 게 맛있기도 하고요. -.- 그게 음식영화의 클리셰이기도 하죠.

낭자: 하지만 음식을 평할 때 ‘정’을 전가의 보도로 삼는 건 살짝 문제가 있다고 봐요. 모두가 무조건 엄마가 끓여준 된장찌개가 최고의 맛이라고 한다면 한국 요리의 깊은 맛, 세련된 맛을 위해 수련을 할 필요도 없잖아요. 요리는 전문분야로서 열어갈 경지가 있다는 점이 간과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도령: 시사회에서 “진심으로 만들었으니까 마음으로 봐주세요”라고 흔히 인사들을 하실 때도 그와 조금 비슷한 느낌이 들죠. ^^ 하지만 이 영화엔 일정한 재미가 분명 있다고 생각해요. 임원희씨가 극중에서 “음식의 맛은 80%가 재료로 결정되지”라고 말하잖아요? 그 말처럼, 기본적으로 재미있는 설정과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럭저럭 즐길 구석이 있는 대중영화라고 생각했어요.

김혜리: “<블랙 달리아>는 인물뿐 아니라 이야기가 약간 약에 취한 듯 비틀거려요. 각색이 이야기의 구심점을 단단히 붙잡지 못했다고 느꼈어요.” 이동진: “자동차 안에서 벅키가 졸다가 총격사건에 휘말리는 장면은 아주 좋았어요. 총격 직전의 불안한 전조와 또 다른 한편으론 권태로움 같은 게 잘 그려졌어요.”

낭자: <궁녀> 때와 같아요. <식객>과 같은 영화가 잘 만들어지고 성공할 경우, 풍성한 기획을 자극할 수 있을 거예요. 다음은 희생된 성찬이네 소보다 더 비인도적인 방식으로 사람이 살해되는 광경이 나오는 영화, <블랙 달리아>입니다. T-T<블랙 달리아>에 나오는 로스앤젤레스는 <차이나타운> <빅 슬립> <LA 컨피덴셜>과 같은 버전의 로스앤젤레스입니다. 악을 토대로 건설된 도시죠.

도령: 줄줄이 여러 영화가 떠오르죠. 그래도 가장 진하게 떠오르는 것은 히치콕의 <현기증>이더라고요.

낭자: 아하! 근데 <현기증>의 환영은 꼭 이 영화뿐 아니라 드 팔마 감독의 영화에서 자주 떠오르지 않나요?

도령: 아뇨. 주인공 벅키(조시 하트넷)가 매들린(힐러리 스왱크)에게 매혹되는 이유가 참혹하게 살해된 엘리자베스 쇼트(미아 커시너)와 닮아서잖아요. 매들린이란 이름은 <현기증>에서 킴 노박이 맡은 캐릭터 이름이기도 하고요.

낭자: 그런데, 미아 커시너와 힐러리 스왱크가 하나도 안 닮았다는 게 이 영화의 난센스 중 하나죠.-..-

도령: 맞아요. 힐러리 스왱크는 연기 잘하는 배우지만 이 영화는 미스캐스팅이에요.

낭자: 그런데 <블랙 달리아>는 인물뿐 아니라 이야기 자체가 약간 약에 취한 듯 비틀거려요. 같은 원작자의 ‘LA 4부작’ 중 한편을 똑같이 각색한 <LA 컨피덴셜>하고 비교해봐도 각본이 엄청나게 혼란스러워요. 사실 브라이언 드 팔마의 영화를 보다가 한눈팔기는 쉽지 않은데, 이 영화는 주의가 흔들리더라고요. 각색이 이야기의 구심점을 단단히 붙잡지 못했다고 느꼈어요.

도령: 약에 취하고 피에 굶주린 이야기죠. ^^ 그래서 다들 영화화가 불가능하다고 그랬나봐요. 데이비드 핀처님도 고심 끝에 포기하셨다잖아요. 이런 이야기를 드 팔마나 폴란스키 아니면 누가 영화화하겠어요? 스토리라인만 딱 읽어도 드 팔마 스타일이죠.

낭자: 드 팔마가 <블랙 달리아>에 끌린 이유는 누가 봐도 선명해요. 뭐, 여성을 난자하는 장르영화의 거장이시잖아요. 비꼬는 게 아니라 그런 소재를 기막히게 찍어냄으로써 인간성의 한 측면과 영화 매체의 (죄스런) 쾌락을 선명히 드러내는 감독이죠. 그런데 <블랙 달리아>는 이야기 화자인 형사 벅키의 여정에 관객이 동참하는 것이 쉽지 않았어요.

도령: 이건 뭐 <현기증>도 아니고 <멀홀랜드 드라이브>도 아니여….(이 말투 상당히 유용하더라고요. ^^)

낭자: 전 현재 할리우드의 유력한 주연급으로 떠오른 배우들이 이 영화에서 보여준 연기를 보면서 매체들이 과찬해온 게 아닐까하는 의구심도 품었어요.

도령: 일단 전 스칼렛 요한슨이라는 배우가 과대포장됐다고 생각해요. 예전부터 그런 느낌이었죠.

낭자: <블랙 달리아>에서 스칼렛 요한슨은 연기가 흉내처럼 보였어요. 물론 캐릭터의 연륜을 실제 나이가 따르지 못한 이유도 컸겠지만.

도령: 매력있는 배우라는 점은 분명한데 지금 다들 이야기하고 있는 정도는 아니라는 거죠. 요한슨이 분한, 악당의 손에서 구원된 여자 케이 역은 원래 그웬 스테파니를 물망에 올렸다는데, 그녀가 했다면 어땠을까 궁금하더라고요.

낭자: 브리트니 머피는 어때요? ^^ 요한슨은 아무래도 산전수전을 겪은 여인으로 보이진 않아요. 그리고 힐러리 스왱크는 <빅 슬립>의 로렌 바콜이 심하게 타락한 버전의 인물인데 그런 스타일이 어색하더군요.

도령: 팜므파탈 특유의 독한 맛이 없어요. 머리를 짧게 깎고 남장한 형사 역으로 나왔으면 더 어울렸을 듯…. ^^ 저어… 할리우드에서 <씨네21> 안 보는 거 맞죠? ^_^

낭자: 갑자기 겁나네요. 그런데 더 큰 문제는 형사 짝패 리와 벅키로 나온 아론 에크하트와 조시 하트넷이에요. 우선 그들의 극중 별명인 미스터 파이어와 미스터 아이스라는 개성이 연기로 전달되지 않아서 혼동이 왔고요. 차라리 미스터 설레발과 미스터 엉거주춤이랄까. -_-#

도령: 미스터 아이스브레이크와 미스터 파이어익스팅귀셔라면 모를까….-_-

낭자: 에크하트의 연기는 넘치게 설명적이었고 하트넷은 멋지고 성실하지만 여전히 표현력이 둔해요. 하트넷은 이 영화의 화자로서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을 하는데, 만약 그 내레이션이 없다고 가정하고 이 캐릭터를 본다면 과연 성격을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어요. 그래서 결국 이 영화에서 가장 뛰어난 배우는 영화 속 오디션 필름에 나오는 미아 커시너! 섬약한 카리스마가 있었어요.

도령: “이젠 결코 굶지 않을 거야”라고 스칼렛 오하라의 대사를 다시금 연기할 때 좋던데요? ^^ 전 예전에 미아 커시너가 <엑조티카>에서 교복 입고 나와서 춤추는 모습이 그렇게 인상적이었어요. 아, 나도 아저씨 다 됐나보다…. -_-

낭자: <블랙 달리아>에서 좋았던 장면은 없었어요?

도령: 드 팔마가 워낙 기술적으로 뛰어난 감독이니까 인상적인 장면이 없을 순 없죠. 저는 자동차 안에서 벅키가 졸다가 총격 사건에 멋도 모르고 휘말리는 장면이 아주 좋았어요. 총격이 일어나기 직전의 불안한 전조와 또 다른 한편으론 권태로움 같은 게 잘 그려졌어요. 시체 발견으로 시작되는 시퀀스죠.

낭자: 저도 그 언저리예요. ^_^ 형사들이 잠복한 건물 앞에서 인물들을 그네 갈아타듯 바꿔가면서 카메라가 이동하다가 까마귀를 따라 건물 뒤쪽으로 갑자기 넘어가면 지나가던 여인이 시체를 보고 비명을 지르는 시퀀스가 좋았습니다. 약간 과시하는 듯도 했지만, 정신이 번쩍 나더군요.

도령: 잔뜩 힘을 준 장면이죠. 그 장면에서 시체를 발견한 여자를 찍은 부감의 롱숏도 근사했습니다.

낭자: (한숨) 브라이언 드 팔마는 역시 순수하게 장르적인 영화를 찍을 때가 훨씬 더 좋아요.

도령: 전 드 팔마의 스릴러도 좋지만, 그의 갱스터를 정말 좋아해요. 특히 <스카페이스>, 특히 마지막 저택 실내 총격전은 정말 명장면!

낭자: 지금도 저택 거실에 멍하니 앉아 있는 알 파치노가 눈에 선하네요. *.* 그런데 <블랙 달리아>는 무서운 영화이긴 해요. 리뷰하는 사람들에게 불안을 야기하는 영화랄까?

도령: 그런가요? *.*

낭자: 어떻게 이런 이해할 수 없는 배합의 영화가 있을까 싶고, 너무 이상하다 보니 이 영화가 혹시 몇년 뒤에 ‘숨은 걸작’으로 판명나는 게 아닐까 무서워서 자다가 문득 소스라쳐 일어나게 되는 영화거든요. T-T 특히 드 팔마는 그런 작품이 종종 있었던 감독이기도 하고요.

도령: 뭐, 그때 가서 그해의 애플데이에 사과 한 궤짝 보내면 되지요. 영화야, 미안해. 내 사과를 받아줘…. ^^

낭자: 그런 식으로 평론가들의 사과를 받았으면 지금쯤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은 청과 도매상, 아니지 잼 도매상을 하고 있을 거예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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