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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색’은 ‘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인물간의 ‘계’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채 ‘색’의 기교만 도드라지는 리안의 <색, 계>

리안의 영화를 별탈없이 좋아하는 편이다. <와호장룡>이 홍콩의 60, 70년대 무협영화를 모르는 사람들을 위한 눈속임 오리엔탈리즘 영화라는 비평을 혹평이라고 생각했고 <결혼피로연>을 투항성 퀴어영화라고 지적하는 시선에서도 거리를 두었다. <헐크>는 걸프전에 대한 재치있는 코멘트라고 여겼다. <브로크백 마운틴>은 쉬르리얼하게 아름다웠다.

작가의 개인사가 깊게 배어있는 원작

내게 <색, 계>는 리안의 영화 중 별탈이 많은 영화다. 우선 나는 이 영화의 색과 계, 이 양자에 대한 이해가 좀 어설픈 기반 위에 세워진 뒤 과잉 이항 대립되고 과속 질주 뒤 단죄되고 파국에 이른다고 생각한다. 알려진 대로 이 영화의 서사적 기반이 된 동명의 단편은 1921년 상하이에서 태어나 1940년대 인기를 얻었던 장아이링(張愛玲, 엘렌 창)의 동명 소설이다. 장아이링은 현재 중국 현대문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한 사람으로, 여성주의 작가로 재평가받고 있다.

특별히 작가의 전기에 전적으로 기대어 텍스트를 읽는 것을 선호하지는 않지만 단편소설로 1979년 발표된 <색, 계>는 작가의 아버지와의 관계와 말썽 많은 첫 결혼 경험과 깊이 관계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장아이링의 아버지는 아편과 축첩을 일삼다가 결국 이혼을 하게 된다. 이후 그녀는 1944년 호란성이라는 남자와 결혼하게 되는데, 그에겐 이미 아내가 있었던 것은 물론 그는 친일 세력이라고 주변의 지탄을 받는 문제적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랑하였으나, 새 여자가 생겨 이혼한다. 이리하여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음, 친일 반동 세력인 남자와의 사랑은 <색,계>라는 텍스트의 중요한 상처, 핵 중의 하나가 된다.

아버지가 영국에서 자신을 불러줄 날을 기다리면서 일본 점령지인 상하이를 떠나 영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홍콩의 대학(홍콩대학이라고 하는데 링난대학에 대한 언급이 더 많이 나온다)에 들어간 왕치아즈(탕웨이)는 상하이에서 건너온 친구들과 함께 연극반에 들어간다. 일본 압제에 시달리는 중국을 구하자는 선전선동 연극을 하게 되면서 일정한 정치의식을 갖는다. 이 공연이 홍콩 사람들에게 (극장 안)에서 정치적 선동을 일으키는 데 성공하자 왕치아즈와 그의 동료들은 친일파 앞잡이인 이 대장(양조위)을 암살할 계획을 세운다. 왕치아즈는 대학 연극 경력을 살려 홍콩의 젊은 수출입상 막사장의 부인 역할을 하면서 이 대장의 아내(조안 첸)에게 접근한다. 홍콩 지리에 어두운 그의 아내를 상하이식 식당 등에 안내하고 죽어라고 마작을 함께 치는 일이다. 일단 그녀의 환심을 사는 데는 성공한다. 홍콩인, 대륙에서 망명 온 중국인들 틈에서 극렬 친일 세력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이 대장은 암살, 테러 위험에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있다. 그는 치밀하고 잔인하지만 친지들 앞에서는 부드럽다. 양조위가 이 이중적 외/내를 지닌 친일파 역할을 해낸다.

‘색’의 설정이 좀 어수룩할 수 있는 것이 대학 극단의 연기 배우에다 처녀인 왕치아즈가 막부인 역할을 수행하면서 ‘미인계’를 써 뱀 같은 양조위를 유혹하고 유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왕치아즈의 무엇이 이것을 가능하게 할 것인가? 가능한 것이라고 영화는 설득할 것인가?

리안의 ‘색’은 과연 ‘계’의 세계를 넘어서는가

우선 캐스팅과 의상이다. 캐스팅에서 보자면 탕웨이는 40년대의 상하이 거리를 걷는 모던 걸처럼 출연한다. 위 입술선을 붕어처럼 봉긋하게 올리고 붉은 루즈(상하이 레드라는 루즈 색깔이 실제로 있다)를 칠하고 자수나 망사가 든 화려한 치파오을 입은 그녀는 당시의 달력 그림으로부터 막 걸어나온 것 같다. 중국인 저항 집단을 고문하는 쾌락에 몰입하면서도 일본의 패망이 멀지 않았음을 깨달아가는 이 대장이 끌릴 만한 부분이다.

와중에 자신들이 이용하던 친일파 한 사람을 엉겁결에 잔인하게 죽이는 것을 목도하게 됨으로써 그녀는 아마추어 저항집단의 세계를 떠난다. 예컨대 이들이 거사를 도모하지만 생각대로 일이 빨리 진행되지 않자 바닷가에 모여 ‘이제 방학도 끝나가는데’라고 자탄하는 장면은 이들의 위상을 그대로 드러내는 대목이다. 3년 뒤 이들은 상하이에서 다시 재회하게 되는데 이때는 저항군 세력의 전문적 도움을 받아 좀더 치밀한 계획을 세운다. 영화의 세트 작업은 1940년대의 홍콩 쇼핑가와 상하이의 조계지역을 재현하는 데 공을 들인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내게 다가온 가장 큰 문제점은 리안이 홍콩에서 찍을 때는 왕가위의 홍콩이 생각나고 상하이에 와서 찍을 때는 허우샤오시엔의 <상하이의 꽃>이나 관금붕의 <장한가>가 그립다는 점이다. 특히 양조위와 왕가위가 함께 만들어내는 멜랑콜리한 도회적 어둠은, 양조위와 리안의 결합에 와서는 연민을 느끼기 어려운 어두운 성격으로만 변해 강도와 복합성이나 단일 특성이 떨어진다. 그래서 가끔 양조위가 여전히 <2046> 안에서 연기하는 것 같기도 하다. 상하이에서의 세트 구성과 촬영 등은 <상하이의 꽃>이나 관금붕의 <완령옥>에 떨어지고, 역시 관금붕의 <장한가>가 포착하는 당대 상하이의 정조에 못 미치며 장아이링의 작품 해석에서도 <붉은 장미, 하얀 장미>가 낫다.

이런 그리움을 뒤로하고 <색, 계>의 논란의 중심, 섹스장면에 집중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이들의 ‘색’이 과연 계의 세계를 넘어 색의 세계로 통하는 문, 그래서 색의 세계를 경계를 알아챌 수 있는 재료성을 갖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섹스장면의 연출 아니 안무 자체는 창의적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처녀성을 ‘투쟁’상의 이유로 간신히 면한 여자와 안가를 따로 두고 여자들과 거친 섹스를 실행해온 남자와의 사이에 세번 재현된 성행위 속 ‘클립’ 포지션 을 거치면서 서로의 몸과 마음을 끼우도록 한다는 것이 과연 색의 세계를 관중할 수 있게 하는 것인가? ‘색’이란 사실 유한한 감각으로 인지할 수 있는 모든 세계를 가리키는 것으로 색은 모든 인연으로 생긴다고 한다.

이 영화의 ‘색’의 재현에서 가장 깊은 골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이 대장(상하이로 와서는 장관이 된다)의 상태가 빚어내는 상황이다. 그리고 이것은 당시 상하이와 홍콩이 처해 있던 정치 상황의 한 국면이다. 예컨대 그는 비밀과 의심과 고문의 세계, 그러면서 국가의 운명(일본 제국)이라는 대서사가 지배하는 세계에 거주하는 사람이다. 집에 돌아오면 아내는 늘 그녀의 벗들과 마작을 치고 있다.

예의 클립 포지션을 전후해 그는 일본에 저항하는 지도자급 인사들을 심문한 뒤 죽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의 아내와 함께 마작을 치고 있는 막부인(왕치아즈)과 안가와 자신의 집에서 섹스를 하게 된다. 그가 성행위에 쏟는 에너지는 오히려 고문의 연장이며 이 측면에 대해 막부인 역시 잘 이해하고 있다. 노련한 저항군 안 영감이 그를 사로잡으라고 주문하자, 오히려 자신이 사로잡히고 있다면서, 자신이 ‘피를 흘리고 비명을 질러야’ 이 장관이 절정에 오른다고 말한다. 그녀가 노골적인 자신의 성적 체험을 두 남자 앞에서 직설적으로 전달하자 안 영감은 그만하라며 소리지르고 좌불안석이다.

이러한 색은 쾌와 불쾌, 혹은 성적 사디즘의 영토이기도 하지만 ‘형’, 즉 계를 어겼을 때의 처형의 상태에 가깝다. 문제는 이러한 색, 쾌, 불쾌, 계, 형의 매우 복잡한 ‘계’를 이루고 있는 이 장관에 반해 막부인이 처한 ‘계’에 대한 영화적 재현의 빈곤함이다. 이 불균형이 색과 계의 강도 높은 긴장이 구현되는 섹스신의 심리적, 그래서 육체적 농밀도를 낮춘다. 말하자면 체위 안무는 노골적이면서도 기교가 있으나, 기예에 가깝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 영화는 리안의 베스트는 아니다

‘저항’의 기술을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여자 스파이(전문가인 안 영감도 이해를 못하니 누가 그녀를 가르칠 것인가?) 와 고문의 달인인 남자 군인정치가 사이의 섹스 놀이에는 색과 계의 깊이와 파고가 높지 않다. 만약 깊어 보이고 파고가 높아 보인다고 한다면 그것은 예의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이 장관의 사디즘 때문이다.

이후 6캐럿 다이아몬드 시퀀스에서 영화는 거의 코미디 수준으로 떨어진다. 시사회에서 이 영화를 두번 보았는데 일반 관객 시사회에서 이 부분은 커다란 폭소를 유발시켰다. 베니스영화제가 이 영화에서 무엇을 보고 상을 주었는지 알 것도 같지만, 리안 감독의 영화 목록 중에서 베스트 영화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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