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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고독한 산책자 <빨간풍선>

파리의 시간, 빨간 풍선의 시간, 그리고 허우샤오시엔의 영화적 시간

수잔(줄리엣 비노쉬)은 일곱살짜리 아들 시몽과 함께 파리에서 살고 있다. 중국 정통 인형극의 제작자이자 목소리 연기자인 그녀는 아들 시몽(시몽 이테아뉴)의 베이비 시터로 중국 유학생 송팡(송팡)을 고용한다. 몸도 마음도 언제나 불안정하게 바쁜 수잔과 나이에 비해 성숙한 시몽, 차분하고 따뜻한 영화학도 송팡은 그렇게 일상을 공유하게 된다. 시몽의 학교에서 집으로 오는 거리, 카페, 집, 그리고 수잔의 일터를 오가며 단조롭게 반복되는 대화와 얼굴들과 일상. 유일한 ‘드라마’가 있다면, 때때로 그러한 일상을 견디지 못하고 수잔이 터뜨리는 히스테리 혹은 우울증의 과민한 표정과 눈물이다.

그렇다. <빨간풍선>은 이야기의 요약을 기다리는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를 보면 즉각적으로 몇몇 영화의 공기가 떠오르는데, 우선은 허우샤오시엔이 오즈 탄생 100주년을 맞아 일본에서 찍었던 <카페 뤼미에르>다. 지하철이라는 도시의 풍경, 그 안의 쓸쓸한 개인들, 그들이 찾아가는 과거의 기억들(고서점, 대만의 음악가 장웬예), 그 기억과 겹치는 현재의 시간, 무엇보다도 컷으로 쉽게 쪼개지지 않아 인물이 오롯이 견뎌내야 하는 공간의 시간은 파리에서도 반복된다. 수잔은 중국 인형극의 거장 아종 선생을 만나 중국 고유의 인형극을 경험하고(인형극이라는 이유로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건 <희몽인생>), 인형극을 하던 할아버지의 생전 모습이 담긴 오래된 필름을 복원하며, 송팡이 만든 영화의 제목은 공교롭게도 <기원>이다. 또한 이 영화가 모티브를 얻은 알베르 라모리스의 <빨간풍선>(1956)은 송팡에 의해 혹은 시몽에 의해 파리의 현재 곳곳에서 새롭게 되살아난다. 말하자면 허우는 도쿄에 이어 파리라는 도시 또한 역사, 문화적으로 혼종적인 기억과 기록의 터널을 통과해서 바라본다. 과거, 현재, 미래 사이에 열려진 문, 그 문을 오가며 흐르는 지금 파리의 시간, 그리고 그 시간을 성찰하는 허우의 영화적 시간.

영화의 첫 장면에서 시몽은 하늘을 향해 애처롭게 외친다. “이리 와! 나한테 올래? 오면 사탕 천개를 줄게.” 그러나 무엇도 이 귀여운 소년의 부름에 답하지 않는다. 실망한 소년이 그 자리를 떠나자 카메라가 하늘쪽으로 천천히 움직이니 소년을 애타게 했던 대상은 바로 빨간 풍선. 이때부터 영화의 타이틀이 뜰 때까지 카메라는 파리의 도심과 지하철역을 살랑살랑 부유하는 빨간 풍선의 동선을 따라간다. 도시의 바쁜 시민들은 이 풍선을 보지 못하거나, 무심히 지나치고 오직 소년만이 유심히 관찰한다. 다시 풍선이 모습을 드러내는 시점은 인물들의 일상이 한참 진행된 뒤다. 이때에도 풍선은 이 무심한 도시 위를 관망하듯 떠다니다가 틈틈이 시몽 주위를 맴돈다. 창밖에서 시몽과 마주보거나, 창 위에서 시몽을 지켜보거나, 창문을 돌아다니며 시몽의 시선과 숨바꼭질을 하거나. 이 영화가 인물들의 일상을 중심으로 스토리텔링이 되지 않는다고 할 때, 우리는 바로 빨간 풍선의 이러한 동선, 나아가 시선을 보아야 한다. 풍선을 쳐다보는 소년이 아니라 소년을, 도시를, 나아가 스크린 밖을 쳐다보는 풍선의 시선! 그 시선의 외로움. 카메라의 시선과 인물의 시선에 구속되지 않은 풍선의 무심한 응시는 그 응시와 마주한 자를 정녕 매혹시킨다.

라모리스의 <빨간풍선>에서 강아지처럼 소년을 졸졸 따라다니던 풍선을 두고 바쟁은 ‘풍선의 동물화’라는 표현을 쓴 바 있다. 아이들의 판타지를 반영하는 초현실적인 존재이지만, 궁극에는 인간의 시선 속에서 의인화된 라모리스의 풍선은 약 50년 뒤 파리를 부유하는 허우의 풍선에 비해 심약하다. 허우의 빨간 풍선은 인간과 결부된 그 어떤 상징도 넘어서 ‘거기에 있음’ 자체로 도시의 시간과 삶을 체현하는 존재다. 이 풍선은 완전히 판타지라고 할 수도 없고 완전히 사실적이라고 할 수도 없는 위치에서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도시의 일상에 나타날 때나 돌연 자취를 감출 때나 어떤 시선으로서 늘 ‘거기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하여 영화 속 빨간 풍선은 도시의 고독한 산책자다. 이 산책자는 “반은 햇빛, 반은 어둠”으로 감싼 도시의 불안한 풍경을 우아하게 어슬렁거리며 자신의 시간을 꿈꾸는 듯하다. 오르세미술관 개관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이 작품에서 허우샤오시엔이 빨간 풍선의 시선을 통해 성찰한 파리의 시간에는 도시의 쓸쓸한 운명이 켜켜이 배어 있지만,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시적인 아름다움의 경지가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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