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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한 크리스마스용 영화 <대정전의 밤에>

훈훈한 재난이 찾아든 도쿄의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이브, 천체망원경을 들여다보던 중학생 쇼타는 병원 옥상 난간에 위험하게 서 있는 젊은 여성을 본다. 병석에 누운 아버지는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비밀을 고백하고, 아들은 병원서 나와 아내가 기다리는 집이 아닌 연인이 기다리는 호텔로 가 이별을 선언한다. 폐업을 앞둔 재즈바 마스터인 키도(도요카와 에쓰시)는 첫사랑을 기다리고, 맞은편 캔들숍의 노조미는 양초를 켜고 키도를 위해 기도한다.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긴지는 전 부인 레이코(테라지마 시노부)를 만나나 그녀는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해 출산 직전이다. 작고도 사소한 엇갈림과 오해와 기다림 속에 크리스마스를 맞은 도쿄에는 대대적인 정전이 일어나고 도시는 어둠에 잠긴다.

빌딩숲의 반짝이는 야경으로 세속화된 별빛은 대정전으로 인해 오롯이 다시 하늘의 제자리를 찾는다. 사랑과 은총이 가득해야 할 크리스마스는 나름의 사연을 품은 헛헛한 사람들에겐 여전히 일상의 일부분일 뿐이다. 한번의 기다림, 작은 이해, 그리고 사소한 인정이 이들의 모난 마음을 녹이고, 어두운 도시의 골목은 따뜻한 촛불로 덥혀진다. <도쿄타워>로 감독 데뷔한 미나모토 다카시는 2004년에 발생한 뉴욕의 대정전을 다룬 TV다큐멘터리를 연출한 바 있다. 도시의 대정전을 오히려 따뜻한 경험으로 추억하는 뉴요커들을 인터뷰하며 영화에 대한 기본적인 영감을 얻었다. 빌리 에반스의 재즈 명곡인 <Foolish Heart>는 영화의 분위기를 이끄는 한편 인물들의 상황에 대한 적절한 비유가 된다. 인공적인 불빛으로는 볼 수 없던 사람들의 냉정한 마음은 따뜻한 불빛에 슬며시 타인을 향해 열린다. 도시에 일어난 대재난을 따뜻하고도 사소한 기적으로 바꿔내는 한발 늦게 찾아온 잔잔한 크리스마스용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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