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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가르쳐주는 사랑의 진실 <주노>
문석 2008-02-20

뱃속에 아이를 품고 있는 아이가 가르쳐주는 사랑의 진실

고등학교에 다니는 여자아이가 아이를 뱄다는 <주노>의 기본설정은 일단 가혹하게 느껴진다. 미국영화 <리치몬드 연애소동>에서부터 한국영화 <제니, 주노>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이런 이야기를 담은 영화가 취한 노선 또한 그 첫 느낌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여전히 누군가에 의해 키워져야 할 아이가 또 다른 아이를 낳아 키운다는 것은 말도 안 되게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야기는 아이를 낳을 것이냐 말 것이냐의 문제 또는 청소년 출산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생명의 존엄을 위한 투쟁쪽으로 기울게 마련이다.

하지만 <주노>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은 상당히 다르다. 16살짜리 고등학생 주노 맥거프(엘렌 페이지)는 평소 점찍어뒀던 상대인 폴리 블리커(마이클 세라)와 하룻밤을 나눈 뒤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이를 마크(제이슨 베이트먼)와 바네사(제니퍼 가너)라는 불임부부에게 주기로 한 주노는 마크가 한때 록밴드를 했으며 여러 면에서 비슷한 취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뒤로 <주노>는 주노가 아이를 낳을 때까지의 수개월 동안 그와 조그마한 주변 세계가 겪는 소박한 변화를 코믹하게 그려낸다. <주노>는 소녀의 고통과 수난에 초점을 맞추는 멜로영화나 사회드라마가 되기보다는 인물들 사이의 의미없는 듯 보이는 수다와 작은 몸짓에 집중하면서 사랑의 본질을 묻는 유쾌한 코미디가 되기를 작정한 영화다.

그렇다고 <주노>가 청소년 임신이라는 묵직한 문제를 웃음거리로 삼는 못돼먹은 영화는 아니다. 항상 시시한 유행어나 읊조리는 듯 보이는 주노이지만, 임신 사실을 알고 황망해하긴 마찬가지다. 하지만 주노는 자신이 주도해 벌어진 이 모든 일에 책임을 질 줄 안다. 그건 그녀가 강직한 소신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기보다 아직 어려서 세파에 덜 찌든 탓이라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내 성숙도(maturity level)를 넘어서는 일을 처리하느라고요”라는 주노의 대사처럼 그녀는 어른들의 세계 속으로 끼어들지만 어른인 척하기보다는 자신의 낮은 ‘성숙도’에 입각해 일을 처리해나가는데 그건 이 영화가 다른 10대 영화와 구별되는 지점이다. 주노가 아이를 낳기로 결심하는 것도 순수함에서 비롯된 직관적 판단에 따른 것이다. 그러기에 “뱃속 아이에게도 손톱이 있다”는 신빙성 희박한 이야기조차 출산의 충분한 근거가 된다.

물론 청소년의 임신이라는 문제는 <주노>의 핵심이 아니다. 영화의 후반부 주노가 아버지에게 던지는 “두 사람이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는 없는 건가요”라는 질문처럼, 사랑의 본질이야말로 이 영화가 끝까지 움켜쥐고 있는 비장의 카드다. 그녀가 뱃속의 아이를 다른 이의 품에 안겨줄 수 있다고 확신하는 순간은 자신과 피 한 방울 안 섞인 새엄마가 건방진 초음파 진단기사와 멋지게 싸울 때이며, 폴리가 진짜 괜찮은 놈이라고 마음을 굳히게 되는 것은 뱃속의 울림에 귀기울인 결과다. 영화에 등장하는 몇개의 작은 반전들은 주노가 익숙지 않은 사랑이라는 감정의 실체를 하나씩 깨치는 과정과 일치한다. 결국 <주노>는 삶의 사소한 부스러기들을 긁어모아 ‘사랑이 무엇일까요’라는 제목의 콜라주 작품으로 만들어내는 영화라 할 만하다.

<주노>는 디아블로 코디의 정교하면서 발랄한 시나리오와 제이슨 라이트먼 감독(<고스트 버스터즈>의 아이반 라이트먼의 아들)의 섬세한 연출력이 아니었다면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코디는 자신의 10대 시절 친구의 임신 사건에서 이 영화를 떠올렸고, 라이트먼은 다른 아이의 입양을 시도했던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이 영화 속에 풍부하게 녹여냈다. 물론 캐릭터와 배우가 분간이 가지 않도록 만드는 엘렌 페이지의 천재적 연기가 없었다면 <주노>는 이토록 사랑스러운 영화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조연들이 만들어내는 작은 별빛이 없었다면 페이지가 만들어낸 화려한 별자리가 빛날 수 있었을까. 멍청해 보이지만 순수함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배어 있는 마이클 세라, 가장 그늘진 곳이게 마련인 ‘주인공의 친구’ 역을 맡았음에도 생동감 넘치는 여자아이를 보여준 친구 레아 역의 올리비아 설비가 그 대표적인 경우. <스파이더 맨>의 편집장으로 눈에 익은 아버지 역의 J. K. 시몬스나 <웨스트윙>의 대변인 C. J.로 유명한 앨리슨 제니의 새엄마 연기 또한 기억에 남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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