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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패니메이션시장 생존전략] 소규모 장기 상영으로 승부
최하나 2008-04-17

<시간을 달리는 소녀>

흡족한 성찬이었다. 2006년을 기점으로 극장판 일본 애니메이션이 전면 개방되고 ‘국제영화제 수상작만 개봉이 가능하다’는 진입 장벽이 사라지면서, 2007년과 2008년 상반기 한국의 극장가는 그 어느 때보다 다채로운 일본 애니메이션을 맞이했다. <왕립우주군: 오네아미스의 귀환> <귀를 기울이면> <마녀 배달부 키키> 등 익히 알려진 고전부터 <초속 5센티미터> <시간을 달리는 소녀> <벡실> <파프리카> <에반게리온: 서(序)> <브레이브 스토리> 같은 화제의 신작 혹은 근작까지, 과거 지브리 스튜디오 작품에만 치중되어 있던 개봉작의 범위는 한결 확장됐고 그 편수도 증가했다. 하지만 더욱 눈에 띄는 것은 개봉 전략의 변화다. 가늘고 길게 혹은 작고 효율적으로. 처음부터 프린트를 5벌만 제작한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5개관 개봉으로 시작해 순회상영으로 5만8천명을, 단 2개관으로 지역을 돌며 두달 넘게 상영한 <초속 5센티미터>는 2만여명을 불러모았다. 또한 올해 1월 16개관으로 개봉해 4월인 현재까지도 제주도에서 상영 중인 <에반게리온: 서(序)>는 7만3천명 관객을 동원했다. 이는 2005년 이후 20개관 미만의 스크린을 확보한 개봉작 중 최고의 성적이다.

‘작고 길게’ 개봉 전략 바꿔

소규모 장기 상영이라는 전략의 변화는 시장에 대한 냉정한 판단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 과거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2), <하울의 움직이는 성>(2005)이 각각 200만, 300만 관객을 수확한 ‘대박’의 사례가 있지만, 두 작품을 제외하고 그동안 한국 극장가를 찾은 일본 애니메이션은 대다수 10만 관객의 벽을 넘어서지 못했다. 국내에서도 인지도가 상당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을 필두로 한 ‘킬러 콘텐츠’가 아닌 이상 일본 애니메이션은 가족 친화적이고 무난한 할리우드 애니메이션과는 달리 대중적인 소구가 쉽지 않은 분야다. 하지만 동시에 충성도 높은 마니아층을 중심으로 한 핵심 타깃이 분명하게 존재하는 시장이기도 하다. 때문에 작고 길게 가는 개봉 방식에 맞물린 마케팅 전략의 1순위는 팬심 붙들기다. <에반게리온: 서(序)>는 팬들이 참여하는 피겨 전시회, 한정 제작한 오리지널 포스터를 제공하는 프리미엄 패키지, 3회 반복 관람시 O.S.T를 제공하는 이벤트 등으로 팬심에 호소하는 마케팅 전략을 펼쳤고, <초속 5센티미터>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개봉 직전 애니메이션 팬들의 집중도가 높은 SICAF를 통해 감독들이 내한하면서 적잖은 마케팅 효과를 올렸다. <초속 5센티미터>의 홍보를 진행한 영화사 숲의 권영주 실장은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이미 국내에 마니아층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작품에 대한 기대감이 존재했다”며 “개봉 시점을 일부러 SICAF에 가깝게 잡았고 기대 이상으로 효과가 컸던 덕에 1억원도 채 안 되는 예산으로 굉장히 좋은 성과를 거뒀다”고 말한다.

마케팅 1순위는 ‘팬심’ 붙잡기

마니아층을 핵심 타깃으로 설정하지만, 흥행의 문턱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관객층을 좀더 확장하는 전략 또한 필요하다. “마니아들이 메인이 맞지만, <에반게리온>이 한국에서 극장 개봉을 한 적이 없어 정확한 팬층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미지수였다”고 말하는 무비 앤 아이의 노민지 과장은 “꼭 에바의 팬이 아니더라도 그 이름은 다들 들어봐서 알고 있지 않았나. 이게 왜 그렇게까지 대단했나에 대한 화제성을 불러일으키면서 전반적으로 일본 대중문화에 관심이 있는 일반 관객층을 확보하려 했다”고 말한다. 도시의 건널목 앞에 소녀가 가만히 서 있는 오리지널 포스터 대신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소녀가 뛰어오르는 한국판을 별도로 제작한 <시간을 달리는 소녀> 또한 마니아층 외에 10대, 20대 여성 관객을 집중 타깃으로 설정했다. 홍보를 진행한 프리비젼의 김희준 부장은 “젊은 여성들의 감수성에 호소하는 힘을 가진 작품인 만큼 포스터도 그런 느낌을 잘 살릴 수 있도록 새롭게 제작했고, 결과적으로 흥행에 한몫을 한 것 같다”며 “또 학생이 주인공이라 중·고등학교에 전체 관람을 유도했고, 실제로 학생들이 단체로 보러오는 경우가 많았다”고 이야기한다.

<초속 5센티미터>

<에반게리온: 서(序)>

물론 이 같은 성공적인 사례 뒤로는 실패의 그늘도 길게 드리워져 있다. 핵심 타깃이자 입소문으로 흥행의 견인차 역할을 하는 마니아층이 다운로드 세계를 통해 한발 앞서 작품을 구하는 것에도 적극적이기 때문이다. <파프리카> <크리스마스에 기적을 만날 확률> 등 지난해 개봉한 곤 사토시의 애니메이션은 뒤지지 않는 완성도와 재미를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각각 관객 수 1천명, 1만명을 넘지 못했고,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전회 매진을 기록했던 <벡실>도 3천여명을 동원하는 데 그쳤다. 세월의 간극이 크다고는 하지만, 걸작으로 꼽히는 <왕립우주군…>은 심지어 485명이라는 참담한 흥행성적을 기록했다. 과거 극장에서 흥행을 하지 못하더라도, DVD 판매를 통해 만회가 가능했던 수익 구조 또한 불법 다운로드로 인한 DVD 시장의 고사로 벽에 부딪힌 상태다. <최종병기 그녀> <기동경찰 패트레이버> <헬싱> <벡실> 등 꾸준히 일본 애니메이션 타이틀을 출시해온 프리미어엔터테인먼트의 강수경 대리는 “몇년 전에는 못 해도 몇 천장은 나갔는데, 이제는 1천장을 출고하는 것도 힘들다. 재고는 자꾸 쌓이고 어쩔 수 없이 할인에 들어가는데, 그러다보니 남는 게 없다”고 말한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하울의 움직이는 성> 등 인기 타이틀로 한때 7만장 이상의 기록적인 판매고를 올렸던 대원C&A의 강명진 팀장 또한 “대원은 할인을 안 하는 대신 양질의 원자재를 써서 높은 퀄리티를 유지하는 정책을 쓰고 있는데, 2007년 들어와서부터 제조 원가도 안 나온다. 블루레이가 확실한 시장을 형성하지 않는 이상 앞으로도 전망은 어둡다”고 이야기한다. 일본 대중문화 개방 이전, 동호회를 중심으로 지글대는 해적판 비디오테이프를 돌려보며 음지에서 꽃피기 시작한 한국의 일본 애니메이션 시장은 확실한 수요층을 형성했지만, 동시에 불법 공유가 마니아의 열성과 동일시되는 위험부담을 안고 성장했다. “이미 다운로드로 감독의 전작들을 학습한 팬들”에 힘입어 <초속 5센티미터>는 좋은 성과를 거뒀지만 반대로 “개봉 전에 볼 사람들은 이미 다 찾아서 본” <파프리카>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듯이, 팬심에 뿌리박은 문화는 양날의 칼로 작용하고 있다. 불법 다운로드로 영화를 본 관객이 평점과 감상평을 제출하면 극장 관람료를 1천원 할인해주겠다는 위험천만한 이벤트를 진행한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아예 역발상의 홍보를 펼쳐 성공을 거둔 사례다. 이용하거나 혹은 이용당하거나. 개방을 가로막던 법의 장벽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에서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한 작품으로 한국 극장가를 두드리고 있는 일본 애니메이션은 좀더 효율적인 생존 전략, 영리한 마케팅으로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팬심에 울고, 또 웃으면서.

<에반게리온: 서(序)> 수입·배급한 태원엔터테인먼트의 김가혜 대리

“잘 짜인 전략이 흥행을 부르더라”

-소규모 장기 상영으로 좋은 성과를 거뒀다. =초반에 CGV 16개관으로 갔고 이후에 재개봉 형식으로 프리머스 6개관에서 상영했다. 마니아 대상이다 보니 와이드 릴리즈는 처음부터 고려를 안 했었고, <시간을 달리는 소녀>가 장기 상영을 하는 걸 보면서 우리도 관 수가 적은 대신에 저렇게 오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본래 목표로 잡았던 관객 수가 어느 정도였나. =목표는 10만명이었고 예상은 5만명이었는데, 결과적으로 7만3천명이 들었다. CGV쪽에서는 한 3만명 잡았다고 하더라. 기대를 안 했던 거다. 단독 개봉으로 16개관을 잡아서 사실 3만명 모으는 것도 쉽지 않은데 성과가 좋았다. 마니아뿐만 아니라 일본 문화 자체에 관심있는 수요가 많이 흘러든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단독 개봉이라는 방식을 선택한 이유는. =일단 배급 과정 자체가 수월하고, 아무래도 홍보에 도움을 많이 받는다. <에반게리온: 서(序)>는 CGV극장 무인 발권기에서 동영상 돌리고, 예고편이 굉장히 좋은 위치에 배정돼 전 극장라인에서 계속 나가고, 또 TV광고는 생각도 안 했는데 채널CGV에도 광고가 나가고, 합쳐서 거의 1억원 상당의 마케팅 비용을 지원받았다. 작게 시작했으니 프린트 비용도 많이 안 들어갔고. 전략을 잘 세워 좋은 성과를 본 것 같다. 우스개 소리로 네이버 메인 광고 하나 때릴 비용으로 전체 다했다는 말도 했다.

-DVD는 언제 나오나. =5월 출시 예정인데, DVD에 들어가는 작품은 안노 히데아키가 극장판과는 다르게 새로 편집한 거다. 그래서 발매 전에 이벤트로 다시 한번 극장판을 상영할 계획을 갖고 있다.

-그 밖에도 <초속 5센티미터> <철근 콘크리트> 등 일본 애니메이션 DVD를 출시하고 있는데, 시장 상황이 어떤가. =많이 죽었지만, 그래도 확실히 마니아층은 있는 것 같다. <초속 5센티미터>가 잘돼서 1만장이 넘었고, <철근 콘크리트>도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잘나가는 편이다. 하지만 물론 그건 정말 잘되는 경우의 이야기다. 나머지는 1천장 정도만 찍는 수준이다.

-후속편인 <에반게리온: 파>도 개봉할 예정인가. =아직 확정된 건 없지만, 1편을 했으니 이변이 없는 한 2, 3편도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일본쪽하고 관계가 돈독한 편이어서 지금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1편이 성공을 해서 값을 좀 비싸게 받으려고 그러는 것 같다. 사실은 우리가 잘해서 잘된 건데 말이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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