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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최종 승리자는 괴물이다

<추격자>와 <괴물>은 어떻게 대중의 지지를 획득했나

<추격자>는 2월14일에 개봉해 9주차에도 흥행 10위권 안에 들었고 지금까지 500만 관객이 보았다. 500만명이 넘은 영화들이 대개 그러하듯 여러 번 본 관객도 다수 생겨난 것 같다. 이 숫자는 이 영화가 우리 사회에 어떤 신드롬을 불러일으켰음을 방증한다. 무엇이 그걸 가능케 했을까?

장르영화로서 <추격자>의 뛰어난 점들을 많은 평자들이 지적했고, 500만이라는 숫자는 주로 그 장점과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그들의 지적에 대부분 동의한다. 하지만 무언가 말해지지 않은 점이 있다는 느낌을 감추기 힘들다. 늦었지만 더 늦기 전에 그 점에 대해 말하려 한다. 이 영화의 장점을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추격자>를 처음 본 뒤로 나는 이 영화의 잘 말해지지 않은 단점을 계속 떠올렸고, 결국 그 단점이 단순한 흠이라기보다 이 영화의 본론과 직결된 것이 거기에 담겨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거두절미하는 게 좋겠다. <추격자>에는 숨막히게 질주하던 이야기가 갑자기 주춤하는 대목이 있다. 영화의 4분의 3쯤이 지난 지점, 무혐의로 석방된 연쇄살인범 지영민(하정우)은 담배를 사러 동네 입구의 개미슈퍼에 들렀다가 탈출한 김미진(서영희)이 그곳에 머물러 있음을 알고, 가게 여주인과 미진을 망치로 죽인 뒤 집으로 간다(개미슈퍼에서 집으로의 이동은 생략되어 있다). 그날 밤 마침내 지영민의 거처를 찾아낸 중호(김윤석)가 지영민과의 피투성이 대결을 벌이게 될 대단원을 예비하는 시퀀스이다.

이 시퀀스는 그냥 지나치기 힘든 우연과 작위들이 갑자기 출몰해, 그 시점까지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던 서사의 물줄기가 갑자기 탁한 웅덩이에 갇혀버린 듯한 느낌을 준다. 여기엔 명백한 몇 가지 우연이 있다. 왜 하필이면 그때 지영민은 담배가 떨어졌을까, 또 왜 하필이면 그때 출동 명령을 받은 형사들은 차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을까. 물론 미진은 하필이면 그 직전에 밧줄을 풀어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이 가게에 도착해 있다. 게다가 그녀는 상처투성이의 몸인데도 왜 가게 여주인에게 경찰에 신고만 부탁하고 119를 부르지 않았을까. 물론 전에도 이상한 우연은 있었다. 지하방도 아닌 고급주택(망원동 24-1)의 화장실에서 왜 휴대폰이 터지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 정도 우연이라면 스릴러의 속도감을 위한 대가 정도로 여기고 넘어갈 수도 있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이상한 장면이 이어진다. 지영민은 가게 여주인과 미진을 죽인 뒤 집으로 간다. 그런데 그냥 가지 않았다. 몇 장면 뒤에 드러나지만 그는 미진의 시체를 들고 갔다. 우리는 그의 집에 있는 어항에 미진의 잘린 얼굴과 두손이 담겨 있는 장면을 보고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된다. 물론 개미슈퍼에선 여주인의 시체밖에 볼 수 없었는데 미진의 머리와 손만 잘라서 갔는지 아니면 시체 전체를 들고 갔는지는 불분명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이 대목을 납득하기 힘들다. 지영민은 미행 사실을 느끼고 있으며, 심지어 가게 여주인으로부터 “경찰에 연락한 지 한참 됐다”는 말을 들었다. 경찰이 언제 도착할지, 그리고 미행하던 형사가 어떻게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는 두 여인을 죽인 뒤에, 피범벅이 된 채로 피가 줄줄 흐르는 한 여인의 시체와 함께 창문을 넘었고, 그 시체를 들고 주택가 골목을 걸어갔다. 그가 개미슈퍼에서 미진의 머리와 손을 잘랐다면 그에게 더 위험천만한 일이 될 것이다. 이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의아스럽게도 “결말부 구멍가게 시퀀스가 마음에 걸리는 대목이네요. 다소 인물을 학대하는 느낌이 있어서요”(김혜리, <씨네21> 2. 27)라는 부드럽고 간략한 지적 외엔 이 점을 말하는 평을 아직 보지 못했다. 오히려 네티즌이 이런 허점들에 관한 많은 지적을 여러 사이트에 올려놓고 있다.

찬사의 긴 행렬 뒤에 불평의 사족을 달기 위해 이 시퀀스를 새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가져온 의문은 오히려, 왜 그런 우연과 작위를 짊어지고라도 <추격자>는 이 시퀀스를 필요로 했는가, 이다. 관객의 입장에서 다시 말하면, 왜 우리는 그 무리의 시퀀스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였는가, 이다. 그 의문에 답하기 위해선 약간의 우회가 필요할 것 같다.

이 시퀀스의 결과는 미진의 불운한 죽음이다. 미진은 피투성이가 되어 천신만고 끝에 탈출하지만 여러 ‘하필이면’이 중첩된 그 시공간에 살인귀를 다시 만나, 5번의 망치질 끝에 비참하게 죽었고 그녀의 잘려나간 시신은 ‘화려하게’ 전시된다. 꼭 그래야 했을까? 미진은 지영민이 살해한 12명(그가 그렇게 주장했다) 중 한명이 아니다. 그녀는 이 서사를 출발시켰고 지탱시킨 존재다. 중호는 그녀를 찾느라 고립무원의 밤거리를 미친 듯이 헤맸고 그녀의 딸은 혼절했고 오열했다. 우리는 그녀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혹은 살아서 돌아올지 모른다는 기대없이 이 어두운 두 시간의 서사를 버텨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관객의 권리로 이렇게 물어보는 건 당연하다. 미진을 꼭 죽여야 했을까.

실제로 <씨네21>이 개최한 시사회에서 한 관객이 그렇게 물었다. 나홍진 감독의 대답은 놀랍게도 “그렇다”였다. 그는 “밝은 대낮에 평화로운 주택가에서 한 여자가 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 영화의 시작이었다”고 대답했다. 물론 그가 말하는 ‘시작’은 이야기상의 시작이 아니라 구상의 시작이며, 이야기상으로는 결말부에 해당된다. 그러니까 결말은 정해져 있었고, 우리는 헛된 기대에 이끌려 중호와 함께 밤거리를 헐떡거리며 함께 달려온 것이다. 하지만 혹시 우리의 기대와 달리 그녀가 죽은 게 아니라, 오히려 그녀의 죽음이 우리가 말하지 않은 마음속 기대를 충족시키는 건 아닐까?

<추격자>와 <괴물>의 공통점

우리는 비슷한 질문을 다른 영화에서 한 적이 있다. 그 영화는 <괴물>이며, 질문은 현서(강두의 딸)는 꼭 죽어야 했는가, 였다. 나는 <추격자>가 이제껏 많이 비교되어왔으며 외양상 비슷한 점이 많은 <살인의 추억>보다 <괴물>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살인의 추억>의 주인공을 움직이는 동기는 피해자에 대한 사적 감정이라기보다 직업의식 혹은 공적 분노에 가까운 것이었다. 반면 <추격자>와 <괴물>을 관류하는 모티브는 ‘보호’ 혹은 ‘부성’이라 부를 만한 사적인 것이다. 김영진은 <추격자>가 불러일으키는 감정에 대해 “새끼를 울게 만드는 적에 대한 아비의 분노와 비슷한, 짐승의 절실한 보호본능을 자극한다”고 썼는데(<필름2.0> 3월26일자), 이 말은 <괴물>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괴물 혹은 연쇄살인범에 의해 감금돼 생사가 불투명한 한 아이 혹은 한 여인을 위해, 무기력한 공권력과 제도를 뒤로한 채 강두와 중호는 뛰고 또 뛰었다. 보호는 공히 실패한다. <괴물>에서 강두는 결국 딸 현서를 보호하지 못했고, <추격자>에서 중호는 결국 미진을 보호하지 못했다. 두 희생자는 모두 최초의 위기에서 목숨을 건졌으나 시체에 둘러싸여 죽음 같은 공포에 내던져졌고 탈출을 위해 악전고투하지만 끝내 실패한다. 에필로그에서 온전하지 못한(강두는 정신적 능력의 면에서, 중호는 포주라는 사회적 신분의 면에서) 두 남자가 모두 양부(養父)의 자리에 와 있다는 점도 같다. 강두는 하수구에서 현서가 보호하던 고아 세주를 보호하고, 중호는 미진의 홀로 남은 딸을 보호한다.

<괴물>이 개봉되었을 때, 현서의 죽음에 관한 김소영의 질문에 봉준호 감독은 이렇게 답했다. “처음 시나리오가 나왔을 때 회사 직원들 사이에서 찬반이 반으로 나뉘었지만 결말이 바뀌지는 않았다. 그 부분의 딜레마는 없었고, 죽음이 의미가 있는가, 그 죽음이 헛되지 않는가가 중요했다. 물론 비극이긴 하지만 마지막 장면이 관객에게 위로를 준다고 생각했다. <친구>나 <공동경비구역 JSA>처럼 오히려 비극적 엔딩이 한국에서는 상업적 감각처럼 받아들여지는 측면도 있었던 것 같다.”(<한겨레> 2006년 7월12일자)

봉준호의 말대로 비극적 엔딩이 한국에선 대중적이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비극적 엔딩이라는 단어에 현서와 미진의 죽음을 다 담을 수 있을까. 봉준호는 답변에서 “죽음이 의미가 있는지, 죽음이 헛되지 않은지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가 예로 든 <친구>와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죽음은 의리 혹은 우정(형제애)의 신화를 완성한다. 신파멜로에서라면 그것은 절대 사랑의 완성일 것이다. 그런데 <괴물>에서 현서의 죽음의 의미는 무엇일까. <추격자>에서 미진의 죽음의 대가는 무엇일까.

<괴물> 평에서 정성일은 현서의 죽음이 남긴 것을 ‘정치적 정의의 죄의식’이라고 말했다(물론 이것은 그의 해석의 일부다). 여러 인터뷰에서 ‘재앙의 구조적 성격’을 강조한 봉준호는 그런 의도를 충분히 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다일까. 주한미군이 뿌린 재앙으로 신자유주의의 희생자인 하층민 소녀가 죽는 영화 <괴물>을 1200만명이 본 지 1년 반 뒤에 어째서 너무나 친미적이며 철저히 신자유주의적인 이명박이 대통령에 당선됐을까.

여기서 텍스트 내부로 다시 들어가 또 다른 해석을 제출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한편의 영화라는 텍스트가 사회적 신드롬이 될 때 텍스트와 대중과의 공모에 관해 생각해보려는 것이다. 영화는 언제가 감독의 의도를 넘어선 복합체이며 그 공모가 발생할 때, 감독의 연출 의도는 거의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경험담 한 가지를 말하고 싶다. <괴물> 상영이 막바지이던 2006년 9월 초 한강변에 산책을 갔다. 그곳에서 엄마를 따라온 10살쯤 되는 한 여자아이의 말을 들었다. “괴물 어딨어? 괴물 찾아줘.” 아이의 표정은 진지했고 엄마는 난감해했다. 아이의 말에 나는 충격을 받았다. 평자로서 나는 <괴물>의 진지한 의도를 해석하느라 고심했지만, 그 아이는 서사의 모든 논리를 단숨에 뛰어넘어 괴물을 영웅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 아이에게 괴물은 영웅/애완동물이었다.

그렇게 흉측하고 지저분한 괴생물체가 아이에게 애완동물이 될 수 있을까? 게다가 자신의 동년배인 착하고 가련한 현서를 먹어버린 잔혹한 식인귀가? 그럴 수 있다. 우리는 한강변에서 괴물에게 쫓긴 적이 없다. <괴물>은 한편의 영화일 뿐이고, 게다가 그 속의 괴물은 디지털 이미지일 뿐이다. 그런데 그게 아이의 시선이며 아이의 감상방식일 뿐이라고 말하면 될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괴물은 성인에게도 영웅이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필요한 건 분석이 아니라 솔직함이다. 우리는 괴물을 만나러 <괴물>을 보러 갔다. 나는 나아가 <괴물>을 괴물의 최종적 승리에 관한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추격자>는 지영민이라는 또 다른 괴물의 최종적 승리에 관한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괴물은 죽고, 지영민은 체포된다. 하지만 이 결말의 비중을 과장하면 안 된다. <괴물>에선 현서의 생명을 두고 강두 일행과 괴물이 시합을 벌였고, <추격자>에선 미진의 생명을 두고 중호와 또 다른 괴물이 시합을 벌였다. 물론 게임의 승리자는 두 괴물이다. 현서와 미진의 생명은 이 게임에 베팅된 제물이다. 이건 너무 잔혹한 게임 아닌가. 그렇다. 그러나 패배가 그렇게 참혹하지 않다면 누가 이 시합에 흥미를 가질 것인가. 물론 그 참혹함이라는 것도 허구다. 우리는 스크린에 도착한 기차를 보고 혼비백산하는 1895년의 구경꾼이기는커녕, 실재와의 존재론적 결속을 급격히 잃어가는 디지털 영상에 포위된 21세기의 관객 아닌가.

그러니 가련한 그들이 왜 죽어야 했는가가 아니라 왜 현서와 미진이 제물로 선택되었는가라고 묻는 게 맞을 것이다. 두 질문은 다르다. 현서와 미진이 왜 죽었는가라고 질문하는 순간 그 질문의 휴머니즘적 뉘앙스에 이끌려 관객으로서의 우리가 무조건 강두와 중호의 편에 서 있다고 오인하기 쉬우며 동시에 이 영화에서 얻은 감각적 쾌락을 그 질문의 윤리성으로 은폐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두 영화의 그리고 대중적 스릴러영화의 관객으로서 우리는 결코 윤리적이지 않다. 우리는 <괴물>을 보면서 현서 외에 괴물이 먹어치운 수많은 한강변의 사람들을 애도한 적이 없으며, <추격자>를 보면서 미진 외에 지영민이 살해한 12명의 피살자들에게 관심조차 가진 적이 없다. 다만 텍스트가 마련해놓은 코스를 따라 하나의 게임을 체험했을 뿐이다. 뛰어난 스릴러일수록 관객과의 감정 게임이며, 두 영화의 게임에서 두 생명의 표상(생명 그 자체가 아니다)은 목표이지 목적이 아니다.

표상을 제거해도 실재는 사라지지 않는 <괴물>의 괴물

이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 두 괴물의 성격과 승리의 양상을 살펴보려 한다. 먼저 <괴물>의 괴물. 영화는 시작에서부터 주한미군이 불법적으로 방류한 독극물이라는 현실의 사건이 괴물의 태생임을 명백히 밝힌다. 농담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정치적 함의보다는 이 괴물이 미제(Made in USA)라는 사실이 더 중요한 것 같다. 미군의 독극물과 괴물의 탄생은 현실적인 인과관계가 성립할 수 없으므로 괴물은 미국적인 것의 징후 혹은 미국 그 자체의 상징에 가깝다. 이 성격은 텍스트 밖의 상황들로 인해 강화된다. 한국 관객의 수많은 할리우드 괴수영화 관람 체험은 이 괴물을 어쩔 수 없이 미국적인 것으로 지각하게 만들며, 괴물의 모형은 호주와 뉴질랜드 업체가 제작했지만 특수효과는 미국 업체가 맡았다. <괴물>의 괴물은 그런 점에서 미국의 무서운 무력과 정교한 테크놀로지를 텍스트 안팎에서 이중적으로 표상한다.

그러니 <괴물>에서 괴물과의 싸움은 결코 이길 수 없는 싸움이다. 표상을 제거해도 실재는 사라지지 않는다(물론 이 말은 비유적이다. 영화 속 독극물은 실재에 가까운 재현 혹은 재연이며, 괴물은 고도로 추상화된 판타지로서의 표상이다). 이 점에 대해 정성일은 정확히 지적했다. “괴물이 죽었을 때 사실상 이야기는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제로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악순환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고, 이 영화가 끝난 다음 (다시 시작하는 현실 속의 속편의) 첫 장면은 당연히 다시 주한 미8군 부대에서 먼지 낀 포름알데히드를 방류하는 순간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 말을 독극물이라는 원인 아닌 원인의 제거를 촉구하는 말로 이해해선 곤란하다. 그건 불가능하다. 괴물과 싸우고 있는 동안 우리는 결코 실재에 이를 수 없다. 그건 영화 속 미8군에도 마찬가지인데 미군 희생자가 생겼는데도 그들은 독극물을 발견하지 못한다. 이 이상한 현상은 봉준호가 실제 사건을 텍스트 안으로 끌고 들어와 시치미 뚝 떼고 그것을 괴물이라는 판타지의 원인으로 제시하면서 표상의 층위를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다행히 봉준호는 <괴물>을 정의롭고 강인한 한국의 영웅들이 독극물이라는 원인을 찾아 미군과 맞서 싸우는 2류 좌파 선전영화로 만들지 않았다. 대신 표상과 실재 사이의 메울 수 없는 심연을 자의식적으로 드러낸다).

그러므로 괴물은 무한대의 힘이다. 흉측하고 잔혹하며 저돌적이지만 제거될 수 없는 힘. 물론 괴물은 마지막에 죽는다. 계속 빚나가던 남일의 화염병 하나가 마침 실수로 땅에 떨어지자 화염병으로 남주는 화살에 불을 붙여 괴물의 입 속에 쏜다. 마침 괴물은 바이러스 퇴치용으로 설치된 에이전트 옐로우를 뒤집어 쓰고 비틀거리고 있을 때였다. 괴물은 불타 쓰러진다. 이 대목이 <괴물>이 우연들에 기대는 유일한 장면이다. 이 우연들은 계산된 우연들이다. 그것은 강두 가족의 무능력의 다른 표현이다. 그들은 능력이 아니라 우연들에 힘입어 괴물을 살해한다. 하지만 현서는 이미 죽었다. 그리고 괴물이란 표상을 낳은 실재는 조금도 손상되지 않았으며 심지어 다시 말해지지조차 않았다. 그들은 끝없이 괴물을 낳을 것이다. 괴물은 텍스트 안에서도 완벽한 승리자이며, 그것의 물질성이 미국적 테크놀로지의 현신이라는 점에서 초텍스트적 승리자이다. 무한대의 힘과 전능한 테크놀로지, 무능력한 부성(가족애). 그 사이에서 내가 본 한강변의 아이는 전자를 택했다. 우리는 그때 무엇을 택했을까.

자신을 탄생시킨 사회와 종교를 심판하는 <추격자>의 지영민

<추격자>의 괴물은 연쇄살인마다. 다행스럽게 이 영화는 리얼리스틱한 재현의 층위를 벗어나지 않으며 이 살인자의 성격은 <괴물>의 괴물보다는 훨씬 단순할 것이다. 여기엔 좀 이상한 사정이 있다. 나홍진 감독은 살인자에 대해 이렇게 인상적으로 말했다. “이 살인자는 이해가 안 되고 알고 싶지도 않다. 오직 죄만 보였다.” 실제로 많은 평론들은 살인 동기의 부재, 살인자 캐릭터의 불투명성을 이 영화의 좋은 점으로 칭찬하고 있다. 감독까지 그렇게 말했는데도 나는 그 말이 잘 믿겨지지 않는다.

우리는 동기없는 실재의 집단살인자 혹은 연쇄살인자를 많이 알고 있다. 컬럼바인고등학교의 소년, 2005년 6월19일 경기도 연천의 한 병사, 그리고 류영철. 그런 인물을 그린 영화들도 꽤 있다. 대표적으로 <헨리: 연쇄살인범의 초상>, 그리고 <텍사스 전기톱 살인사건>을 비롯한 1970년대의 살인마 호러들, 최근의 <데쓰 프루프> 혹은 <폭력의 역사>의 초반부. 그러나 <추격자>의 살인자 지영민은 생각보다 많이 설명되고 있다. 그가 성불구라는 사실은 심야의 취조실 심문에서 추측되며(<익스트림 시네마>에 실린 인터뷰에서 나홍진 감독은 “후천적 영향으로 범행을 저질렀다는 주장 자체에 대한 비아냥거림의 의도로 연출한 장면”이라고 말했다) 나중에 중호가 찾아낸 콜걸의 증언으로 확인된다.

잘 지적되지 않는 그에 관한 사실 하나는 그가 하층민이라는 점이다. 중호가 찾아간 안산의 지영민 누나 집은 초라한 연립주택의 한간이며, 그는 여기서 빌붙어살다가 3년 전 어린 조카를 흉한 불구자로 만들고 나서 떠나버렸다. 그리고 석공소에서 잠시 일했으며, 망원동의 반지하 월셋방에서 산 적도 있다. 이는 모두 흘러가는 대사 속에서가 아니라 중호의 추적과정에서 물리적으로 확인되는 공간들이다.

지영민이 대단히 건장하고 심지어 관능적인 몸을 지녔지만 성불구에 가난뱅이라는 점은 영화 안에서 충분히 묘사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죽인 여자들보다 열등한, 최악의 경우에 팔 몸조차 없는 사내다. 돈이 남근을 대체하는 정도가 아니라 돈이 혹은 돈만이 남근을 강화할 수 있는 이 시대에 가난한 성불구자 남성은 최하층계급이다. 그의 계급적 성적 처지를 연쇄 살인의 유일한 동기로 내세우는 것만큼이나, 그것을 외면하고 그는 전혀 알 수 없는 인물이라고 말해버리는 것 역시 납득하기 힘든 일이다. 적어도 방류된 독극물이 거대 골뱅이 모양의 괴물을 만들어낼 확률보다는 경제적 성적 좌절이 연쇄살인범을 만들어낼 확률이 훨씬 높을 것이다. 그런데 봉준호는 인과 관계가 성립할 수 없는 두 가지 사건을 영화에서 태연하게 원인과 결과로 배열했고, 나홍진은 인과관계는 아니라도 연관된 두 가지 사실을 드러내고 나서도 영화 밖에서 둘 사이의 연관은 절대 없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우리는 “이야기꾼이 아니라 이야기를 믿어야 한다”(D. H. 로렌스). 나홍진 감독의 말대로 연쇄살인의 이해할 만한 동기라는 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추격자>에서의 성적 경제적 상황과 살인마의 관계는 <괴물>에서의 미군의 독극물과 괴물의 관계와 비슷한 점이 있다. 그것은 후자가 전자의 결과는 아니지만 전자의 질서 안에서 태어난 그것의 징후이며, 후자와 싸워 이겨도 전자는 전혀 손상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괴물>을 본 사람들이 괴물에는 정치성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추격자>를 본 사람들이 지영민을 미지의 존재로 남겨두려는 것에는 공통점이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정성일의 표현대로 자신이 보고 느낀 것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추격자>의 살인마가 누구인지를 물어야 한다.

내가 읽어본 평 중에는 김영진만이 지영민을 들여다보았다. “(지영민은) 죽여야 할 놈이면서도 어떤 처연한 기운이 있다. 누구의 관심도 받지 않았을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놈이라는 느낌, 피붙이인 누이의 자식을 해코지할 만큼 악질인 이 인간에게서 버려진 늑대와 같은 처연함….”(<필름 2.0> 3월26일자) 그는 반영웅 일반의 매력을 지영민에게서도 발견했던 것 같다. 그런데 지영민은 <괴물>의 괴물처럼 먹고 배설하는 것이 전부인 동물이 아닌 인간이다. 그는 연쇄살인을 통해 무언가 이루려 하고 있다. 그가 자신의 입으로 직접 말하지 않았지만 영화는 그가 이루려는 것을 징후적으로 드러낸다.

<추격자>에 대한 평들이 지영민을 들여다보지 않는 태도를 취하려 하면서 애써 외면한 또 다른 사실은 그가 예술가라는 점이다. 그것도 종교예술가라는 점이다. 지영민의 거처를 알려주는 단서로 그가 살던 지하 자취방의 벽에 그가 그린 목탄 십자가상 그림(이 그림은 부분 클로즈업으로만 보여져서 그림 전체는 알 수 없다)과 그가 조각했다는 교회의 십자가상이 차례로 등장한다. 그리고 그는 지금 박동원 집사의 고급 주택에 살고 있다. 십자가, 성화, 교회 같은 종교적 기표들의 반복적 등장에 대해 나홍진 감독은 “모든 범죄는 십자가 아래서 벌어진다”는 멋진 말로 대답했다.

하지만 지영민이 ‘십자가에도 불구하고’, ‘혹은 십자가의 이름으로’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게 아니라 ‘십자가를 향해’ 범죄를 저지른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는 교회 집사 가족을 살해해 그의 집을 살인의 거처로 삼았고, 그곳에서 창녀들의 머리에 정을 박아 죽였다. 그는 지금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행위를 흉내내고 있다. 그의 종교성은 반종교성이다. 그는 변태적인 방식으로나마 성서의 계율을 따른 <쎄븐>의 존 도우(케빈 스페이시)와 달리, 기독교를 심판하는 사탄의 자리에 서 있다.

두 괴물이 승리할 수밖에 없는 신자유주의의 잔인한 풍경

문제의 구멍가게 시퀀스를 말할 차례가 되었다. <괴물>의 우연들은 무능력한 강두 가족을 위해 마련되었고 그 우연들에 힘입어 그들은 괴물을 천신만고 끝에 죽였다. 물론 현서는 죽은 뒤였다. 반면 <추격자>의 우연과 작위들은 지영민을 위해, 그러니까 괴물의 시간을 위해 마련된다. 잊을 수 없는 장면이 있다. 지영민은 납득할 수 없는 우연과 작위에 힘입어 미진을 살해한 뒤, 그러니까 이 게임에서 이미 승리한 뒤에, 그녀의 머리와 손을 어항에 넣고 감상한다. 이야기 전개상 불필요한 이 장면은 살인 자체가 아니라 살인의 수사화 혹은 (반)종교적 미학화가 지영민의 목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악마적 수사학 혹은 괴물의 승리의 자축연이라고 부를 만한 이 장면은 지영민의 예술적 완성의 순간이기도 하다. 그 많은 우연과 작위들은 이 순간을 위해 봉사한다. 이제 우연과 작위는 더이상 서사상의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한 사람의 관객으로서 이 순간을 승인하느냐 거부하느냐의 문제다. 물론 많은 평자들과 관객은 그것을 승인했다.

마지막으로 미진이 이 게임의 제물로 선택된 이유를 물어야 할 차례다. 내 생각에 대답은 단순하다. 그것은 그녀의 계급이다. <괴물>에서 매일 한강변 노점으로 와야 하는 현서는, 한강에 괴물이 나타났을 때 가장 잡아먹히기 쉬운 하층민에 속해 있었다. <추격자>에서 미진은 성적, 경제적 무능력자가 살인마로 돌변했을 때 가장 쉽게 제물로 선택될 대상인 창녀다. 지하방에서 홀로 딸을 키우는 가난한 여인이 온갖 위험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병이 들어도 ‘부름’을 거절할 방법은 없을 것이다.

미진이 죽고 나서 무엇이 남았는가. 중호는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미진의 딸을 어두운 얼굴로 바라본다. 그가 정말 그 아이의 양부가 될지, 아니면 고아원에 보낼 지는 알 수 없다. 그가 포주 노릇을 계속할 지 여부도 물론 알 수 없다. 중호의 뒤로 밤의 도시, 네온사인과 불빛들로 장식된 고층건물들이 보인다. 그는 헛발질을 했고,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저 거대도시를 지탱하는 질서는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 질서 안에서 다시 괴물이 등장하고 살인마가 등장해도 또 다른 현서와 미진을 보호할 방법은 없다.

강두도 중호도 실패했다. 현서와 미진의 죽음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반면 두 괴물은 승리했다. 가난하고 무력한 부성이냐 강하고 잔혹한 힘이냐. <괴물>과 <추격자>는 두 가지 선택밖에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전자를 지지하지만 후자에 매혹된다. 이것은 약육강식, 승자독식의 논리가 전면화한 신자유주의의 잔인한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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