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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고 살인’의 스릴러 <88분>
주성철 2008-05-28

알 파치노 ‘노가다’ 지수 ★★★★ 인명 경시 지수 ★★★ 살인게임 지능지수 ★★

존 애브넛 감독이라, 이름이 머릿속을 어른거릴 만하다. <레드 코너>(1997) 이후 제작에 열중하고 주로 TV무대에서 활동하다 무려 10년 만에 연출한 영화라 더 그렇다. <후라이드 그린 토마토>(1991)가 데뷔작이었다고 말하면 무릎을 탁 칠 것이다. 이후 케빈 코스트너 주연의 <작은 전쟁>(1994)과 로버트 레드퍼드, 미셸 파이퍼 주연의 <업 클로즈 앤 퍼스널>(1996)에 이르기까지 만장일치의 작가적 평가를 얻은 건 아니지만 가족·멜로 장르에서 제법 솜씨 좋은 장인의 모습을 보여준 감독이다. 그에 비하면 R등급 수준의 묘사가 제법 포함된 범죄스릴러 <88분>은 전혀 의외의 선택이다. 그의 변화를 가늠해줄 수 있는 전조는 그가 연출한 TV영화 중에도 없었다. 게다가 영화는 88분이라는 꽉 짜인 시간 안에서 펼쳐지는 ‘예고 살인’의 스릴러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영화의 러닝타임은 88분이 아니다. 88분 뒤 살인이 벌어질 것이라는 예고가 나온 뒤부터 실제 88분에 ‘가깝게’ 긴박하게 흘러간다.

저명한 범죄심리학자 잭 그램(알 파치노)은 FBI를 도와 연쇄살인범 존 폴스터(닐 맥도프)에게 사형집행이 내려지는 데 큰 공헌을 한다. 하지만 존 폴스터는 잭이 증인으로 하여금 위증하게 유도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다 잭은 마치 폴스터에게 사주를 받은 듯한 익명의 범인으로부터 88분 뒤 자신이 죽게 될 것이라 예고하는 전화를 받게 된다. 결국 잭의 학생 중 한명이 폴스터의 전형적인 수법으로 살해당한 채 발견된다. 그리고 계속 범죄 시간이 얼마 남았다는 전화를 받게 된다. 이제 잭은 평소 자신을 흠모해왔던 학생 킴(알리시아 위트), 살해된 학생과 가장 마지막까지 함께 있었던 로렌(리리 소비에스키) 등 자신의 수업을 듣는 학생들, 그리고 주변의 동료 경찰과 자신을 둘러싼 모든 사람을 용의선상에 올려 범인을 추적해나간다.

한겨울의 시애틀을 무대로 알 파치노는 88분 뒤 자신에게 닥칠 범죄를 막기 위해 시종일관 뛰어다닌다. 이처럼 <88분>은 최근 알 파치노의 출연작 중 그가 가장 고생한 영화로 당당히 등극할 수는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그의 필모그래피 전체를 두고 보자면 잘못된 출연 결정으로 꼽힐 만한 작품 중 하나다. 알 파치노의 전작들 중 가장 비슷한 이미지를 찾자면 해럴드 베커 감독의 <사랑의 파도>(1989)에 이혼을 괘념치 않는 홀아비 형사 프랭크로 출연했을 때다. 20여년 전에는 젊은 여성 용의자와 기습적으로 사랑에 빠지는 게 별로 어색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왠지 거리를 두고 보게 된다. 언제나 영화 전체를 지배하고야 마는 그의 카리스마는 여전하지만 문제는 관객과 밀고 당기기를 하는 스릴러의 구조다. ‘예고 살인’이라는 모티브 속에서 지나치게 많은 용의자들을 다 범인처럼 보이게 만들려는 노력이 지나치게 수고스럽다.

tip/존 애브넛 감독에게 범죄스릴러 장르에 대한 도전은 어쩌면 <88분>부터 시작이다. 올 가을 개봉예정인 차기작 <라이터스 킬>은 알 파치노와 로버트 드 니로가 함께 경찰로 출연해 모처럼 다시 조우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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