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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50년대적 이야기로 남은 <지구가 멈추는 날>
김도훈 2008-12-31

키아누 리브스 연기 지수 ★ CG 스펙터클 지수 ★ 이쯤되면 자폭 지수 ★

로버트 와이즈의 <지구 최후의 날>은 더도 덜도 말고 딱 1950년대 영화였다. 은하계 어디선가 날아온 외계인들이 핵무기 개발을 멈추고 제발 좀 평화롭게 살라고 지구인에게 충고하는 이야기 아니던가 말이다. 요즘 지구 꼬맹이들이 그걸 다시 감상한다면 외계인 님들이나 잘하라며 코웃음을 칠 것이다. <지구 최후의 날>이 지금까지 클래식으로 살아남은 건 이야기가 아니라 로봇 고트와 반짝거리는 은색 비행접시처럼 장르팬들의 가슴을 만지는 고전 SF의 향취 덕분이다.

새로운 <지구가 멈추는 날>의 제작진은 오리지널에서 대충 몇 가지를 바꿨다. 외계인이 침공한 건 핵무기가 아니라 지구의 환경 탓이다. 여주인공은 (오바마 시대의 할리우드답게) 흑인 양아들을 키우는 백인 우주생물학자다. 비행접시는 신기하게 빛나는 거대한 지구 모양의 구체고, 로봇 고트는 나노 벌레로 변신해서 물체들을 바스라뜨리는 멸망의 무기다. 전작에서 영국풍 신사였던 외계인의 전도사는 키아누 리브스다. 그는 오리지널에서보다 두뇌 용량이 별로 발전하지 못한 미국 정부에 쫓기다가는, 우주생물학자 제니퍼 코넬리와 아들의 화해를 보며 인류에 대한 희망을 되찾는다. 여기까지 읽으면 무슨 소리인지 알 것이다. 대충 몇 가지를 바꾸긴 했으나 여전히 50년대적으로 고색창연한 이야기라는 걸 말이다.

이 복잡한 세상에 50년대적으로 나이브한 세계평화론을 주창하는 것이 그리 나쁘지 않을 수도 있겠다. 겨울 블록버스터답게 침공과 멸망의 스펙터클만 신경써서 보여주면 되니까 말이다. 놀랍게도 <지구가 멈추는 날>은 예고편 이상의 볼거리를 거의 보여주지 않는다. 최소한 수만명의 지구인이 나노 벌레에게 쫓기면서 달아나는 장면이라도 팬 서비스로 하나쯤 넣었으면 좋으련만. 그래도 위안거리가 있다면 키아누 리브스가 아무런 감정도 얼굴에 드러내지 못하는 외계인 역에 딱 어울린다는 거다. 하지만 클라이맥스에서는 그도 감동한 얼굴을 잠깐 드러내며 연기라는 걸 해야만 한다. 그 장면만 제외한다면 올해의 캐스팅이다.

TIP/ 리메이크를 처음으로 제안한 사람은 키아누 리브스의 매니저였단다. 자기 배우에게 최적의 역할을 찾아줄 줄 아는 베테랑 매니저답다. 리브스의 다음 역할은 뭘까. <금단의 행성> 리메이크작의 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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