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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태웅] 발화점까지 타오르다
정재혁 사진 오계옥 2009-02-20

<핸드폰>의 오승민, 엄태웅

엄태웅에겐 벽이 있었다. 영화 <실미도>로 이름을 알리기 전, 드라마 <부활>로 도약하기 전 스스로를 둘러싸고 있던 벽이다. 그는 연기자가 되겠다고 결심한 뒤 꽤 오랜 무명 시절을 보냈고, 시간보다는 작품의 빈도로 세월을 느꼈다. 몇개의 작은 역할과 또 다른 몇개의 작은 역할들. 느리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느림은 오히려 스스로 만들어낸 리듬이다. 거창한 의도가 섞이진 않았지만 엄태웅은 본인에게서 떨쳐낼 수 없는 어떤 망설임과 주저 속에서 작품을 골랐다. 절반은 불안, 두려움 때문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그냥 어찌할 수 없는 기질적인 망설임 탓이었다. 엄태웅은 그렇게 말한다. 끼로 통하는 연예계에서 다소 투박해 보이는 그의 기질은 일종의 벽이다. 그래서 엄태웅이 <부활>의 엄포스로 활짝 피었을 때 왠지 그는 벽을 하나 넘어온 것 같았다. 조금 과장하면 덜커덩 소리도 났다. 하지만 사실 그건 자기 주변을 꽤 오래 맴돌던 엄태웅이 스스로의 벽을 한 걸음 전진시킨 것이다.

<핸드폰>에서 엄태웅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이야기를 거의 혼자 끌고가는 이 영화에서 엄태웅의 역할은 핸드폰을 잃어버려 곤경에 처한 매니저 오승민이다. 그는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거의 빠짐없이 등장하고, 온도로 따지면 상온부터 발화점까지 얼굴을 붉히며 열연한다. “미니시리즈 드라마 촬영처럼 빡빡했던 현장”에 엄태웅이 자리를 비운 건 상대역 박용우 출연 분량을 찍는 4일간뿐이었다. 그는 이 영화에서 여느 때보다 바쁘고 뜨겁다. 핸드폰을 주운 정이규(박용우)가 오승민을 마음대로 조작하는 탓에 엄태웅은 오승민의 옷을 입고 폭력을 행사하고, 차도 부순다. <부활> <마왕>에서 돋보였던 즉각적인 느낌의 연기는 이 영화에서 극대화된다. “시나리오 읽고 파악한 오승민의 캐릭터가 있지만 사실 잘 몰라요. 오히려 현장에서 하다 보면 하나씩 떠오르는 게 있고요. 그런 걸 많이 믿는 편이에요.” 게다가 <핸드폰>의 첫 장면은 노래방에서 오승민이 굽실거리며 방송국 PD를 접대하는 모습이다. 엄태웅은 웃통을 벗었고, 노래와 춤을 했다. 지금까지의 엄태웅을 생각하면 꽤나 큰 탈선이다.

엄태웅의 벽은 연기 속에도 있다. 그의 연기를 보면 항상 어떤 망설임이 느껴진다. 그가 연기를 망설이며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는 100% 마초, 100% 악인을 그대로 놔두지 않는다. 그가 연기하는 인물들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어떤 사연을 한 움큼 안고 있는 것 같다. 천성적으로 뒤로 물러나는 그의 태도가 캐릭터에 홈을 파고, 거기서 좀더 인간적인 냄새를 낸다. 마음 좋고 털털하게 그려진 <가족의 탄생>의 형철도 시나리오상에선 “날이 선, 웃다가도 바로 화를 낼 것 같은” 남자였다. “(설)경구 형이나 송강호 선배처럼 날이 섰으면 할 때가 있죠. 그런데 전 뭘 해도 자기화(化)되는 거 같아요.” 돌이켜 생각해보면 <마왕>과 <부활>에서의 엄태웅도 그랬다. 그리고 이는 지금 브라운관과 스크린이 그를 계속해서 찾는 이유다. 2008년 코믹액션물 <차우>와 스릴러 <핸드폰>의 촬영을 마친 엄태웅은 올해 드라마 <선덕여왕>과 이준익 감독의 신작 촬영을 앞두고 있다. 여전히 새 작품을 마주하면 “주저하고, 물러나고 싶은 기분이 든다”는 그지만 동시에 “일단 부딪혀보겠다는 마음”으로 벽을 앞으로 밀어낸다. 원톱 주연으로는 첫 번째 영화인 <핸드폰> 그리고 엄태웅. 본인은 최근 부담과 설렘 때문에 악몽에 시달린다지만, 이미 그는 또 한번의 벽을 밀어낸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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