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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스릴러 영화 <블랙 아이스>
김도훈 2009-04-22

synopsis 중년의 산부인과 의사 사라(우티 마엔파)는 건축가이자 교수인 남편 레오(마르티 수오살로)가 바람을 피운다는 사실을 눈치챈다. 분노로 똘똘 뭉친 사라는 ‘크리스타’라는 가명으로 외도의 상대인 건축학과 학생 툴리(리아 카타야)에게 접근한다. 유부남의 사랑을 독차지하지 못해 외로워하던 툴리는 사라에게 마음을 열고, 두 사람은 기묘한 단짝 친구가 된다. 그러나 사라가 툴리에게 모든 사실을 고백하면서부터 세 사람의 관계는 결국 파국으로 치닫는다.

블랙 아이스는 도로에 얇게 얼어 있는 살얼음을 뜻하는 단어다. 블랙 아이스는 마치 멀끔한 도로인 양 그 자리에 앉아서 방심한 운전자들을 기다린다. 블랙 아이스는 보이지 않는 함정이다. 영화 <블랙 아이스>의 세 주인공은 모두 블랙 아이스를 밟는다. 숨겨진 치정과 삼각관계라는 블랙 아이스다. 그런데 <블랙 아이스>는 단순한 치정극이 아니다. 사라는 곧바로 모든 사실을 까발리는 대신 가짜 아이덴티티를 만들어 남편의 정부인 툴리에게 접근한다. 외로운 두 여자는 진짜 같은 우정을 만들어나간다. 그래서 이 핀란드산 치정스릴러가 외로운 여자들의 연대극으로 마무리되느냐. 그것도 아니다. 세 사람의 아슬아슬한 불륜과 거짓우정은 불안한 스릴러영화의 결말로 치닫는다. 히치콕이 감독한 한국의 주말연속극들을 상상해보시라. 딱 그런 이야기다.

문제는 정리정돈의 부재다. 영화는 여러 가지 장르(불륜 드라마, 히치콕 스타일의 스릴러, 북구 예술영화, 유럽권 에로영화 등등)를 왔다갔다하지만 스타일과 이야기가 시퀀스별로 널뛰듯 달라지는 탓에 도무지 힘이 없다. 특히 비밀이 밝혀진 뒤 일어나는 이야기들은 사족에 가깝다. 감독 스스로도 영화를 어떤 식으로 마무리해야 할지 자신이 없었던 게 분명하다. 종종 이 거친 느낌이 북구 아트영화 특유의 기운이 아닐까, 환각에 사로잡히는 관객도 있을지 모르겠다. 하긴 지지고 볶고 싸우는 주인공들을 보면서 피식피식 헛웃음이 나는 건 아키 카우리스마키 영화 같기도 하다. 연기 또한 들쑥날쑥하지만 사라를 연기한 우티 마엔파는 좀 볼만하다. 카우리스마키의 <성냥공장 소녀>와 <과거가 없는 남자>로 예술영화 관객에게 익숙한 마엔파는 갈팡질팡한 캐릭터에 품위를 덧붙이려 애쓴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색, 계>의 베드신을 능가하는 파격적인 정사신이라는 홍보 문구에는 속지 않는 게 좋다. 도입부에서 주인공들이 털 깎은 흰토끼들처럼 헐레벌떡 벗고 등장하지만 누드에 별 부담을 느끼지 않는 그 동네 특징일 따름이다. 다들 너무나도 인간적인 몸매의 소유자라는 것도 미리 유념해두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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