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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진위 10년을 말한다] 소통의 구심점, 길을 잃었나
이영진 사진 씨네21 사진팀 2009-06-18

영화계가 무엇을 원하는지 다시 한번 귀를 열어 꼼꼼히 따져봐야 할 때

“벌써 10년인가. 그걸 몰랐네.”

한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 직원은 무덤덤하게 되물었다. 올해 5월28일로 영진위는 창립 10돌을 맞았다. 이날 별다른 기념행사는 없었다. 해당 업무부서 관계자는 “그동안 영진위는 영화진흥공사(이하 영진공)가 만들어진 3월15일(1973년)에 맞춰 창립식을 치러왔다”면서 “예년처럼 이번에도 특별한 자리를 계획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영진위 직원은 이렇게 덧붙였다. “뭘 했더라도 그게 10주년 기념은 아니었을 거다. 1주년 취임 기념이라면 몰라도. 강한섭 위원장에게 이전의 9년은 부정의 대상이니까.”

취임 1주년을 맞아 영진위 강한섭 위원장은 한 언론과 인터뷰를 했다(<씨네21>은 강 위원장에게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그 자리에서 강 위원장은 “노조에 빼앗겼던 경영권을 부분적으로 회복했다”면서 “경영진 2명과 노조원 5명 등 7명으로 구성됐던 인사추천위원회를 경영진 3명과 노조위원장 1명 등 4명으로 구성키로 개정해 15개 팀장 중 14개 팀장을 교체” 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연말까지 조직을 더 추슬러서 건강한 영진위를 만들고 이를 영화인들에게 돌려주는 게 목표”라고 강조했다.

‘노조에게 휘둘리지 않는’ 영진위를 영화인들이 원했던 것일까. 어찌됐건, 강 위원장의 ‘의지’를 감안하면 현재 문화계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는 ‘좌파적출’의 광풍에 영진위가 휘말릴 것 같진 않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다음은 영진위, 그 다음은 부산국제영화제다.” MB시대에 몸값이 치솟은 문화미래포럼(뉴라이트 소속 문화계 인사들의 모임)의 ‘시나리오’에 따르면, 한예종 다음 타깃은 ‘빨간’ 영진위다. 하지만 그건 ‘과거’ 영진위다. 문화미래포럼이 펴낸 <새 정부의 문화예술정책>은 영진위를 ‘접수한’ 소수 좌파세력들이 지난 10년 동안 ‘이념과 선동의 레드카펫’ 위에서 ‘영화를 동원한 문화혁명’을 수행했다고 비난한다. 과연, 그런가.

혜택에서 배제된 이들의 뻔뻔한 아우성

영진위가 탄생한 건 1999년 5월28일이다.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김대중 정부의 포괄적 문화정책 아래서 영화진흥법 개정이 먼저 이뤄졌다. 제2차 개정 영화진흥법에 따라 영진위는 ‘영화계의 운명을 결정할 정도로’ 막강한 힘을 부여받았다. 개정 법안에 따르면, 영진위는 영화진흥기본계획의 수립, 위원회의 운영 관련 사항, 영상제작 관련 시설의 관리 및 운영, 영화진흥금고의 관리와 운용, 조사·연구·교육·연수, 한국영화 수출 및 국제교류, 스크린쿼터 시행 관련 업무 등을 맡았다. 영진위는 한해(2000년 기준) “1천억원대에 이르는” 큰돈을 굴리는 권한과 동시에 한국영화 진흥을 위한 청사진을 제시해야 하는 책임도 부여받았다.

영진위 이전에도 물론 한국영화 진흥기구가 있었다. 1973년 설립된 영화진흥공사가 있었고, 더 거슬러 영화진흥조합이 있었다. 하지만 ‘영화산업 종사자들의 자치적 협의기구’였던 영화진흥조합이나 ‘대작 국책영화 직접 제작’을 통해 정권의 나팔수 육성을 원했던 영화진흥공사는 애초부터 한계를 노정했다. (제작사 등록을 위한)예탁금 및 (외화수입을 위한)국산영화진흥자금으로 자금을 조성해야 했고, 관 주도의 ‘상명하달’식 기관 운영으로 말미암아 영화계와 정부는 끊임없이 반목했다. 대형 로비 스캔들은 끊임없이 터져나왔다. 진흥기구는 존재했으나 ‘돈’이 없었고 ‘계획’이 없었으며 ‘일꾼’도 없었다.

영진위는 ‘3무(無)’에 허덕이던 이전 진흥기구와 근본적으로 달랐다. 이동연 한예종 교수가 지적하듯이, 김대중 정부의 문화정책은 “과거에 비해 대단히 실용적이면서도 구체적”이었다. 김대중 정부는 출범 초기에 2003년까지 문화산업 전반에 2조2900억원을 투입하겠다고 발표했으며, 실제 이 마스터 플랜에 따라 5천억원 규모의 영화진흥기금 및 문화산업진흥기금이 조성된다. 민간 주도의 진흥기구 설립 또한 1988년 할리우드 직배사의 한국 상륙 이후 끊임없이 제기됐으며, 한국영화제작가협회와 한국영화연구소가 1998년에 내놓았던 ‘영화정책 건의’는 2000년 3월20일 영진위가 발표한 ‘한국영화 진흥 종합계획’의 뼈대가 됐다.

한편, “15시간씩 밤샘 회의를 개최하며” 영진위가 세운 원칙 아래서 구태(舊態)는 비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1기 영진위는 첫 사업이었던 ‘2000년 영화단체 사업 지원’ 접수 결과를 공개했는데, 이중에는 ‘선진국 극장업계 시찰 및 연수지원’(2500만원), ‘전국 극장 우수종업원 포상’(1천만원), ‘우리영화 발전 조찬간담회’(1280만원), ‘운영관리비’(5500만원)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눈 가리고 아옹하며’ 이때껏 국고를 축냈던 단체들에 지원금이 돌아갈 리 없었다. 지난 영진위를 향해 “이념적 스펙트럼에 따라… 각종 지원사업은 전리품처럼 배분되었다”는 비난은 대부분 영진공 시절 맘껏 누렸으나 영진위 탄생 뒤 각종 지원 혜택에서 배제된 이들의 뻔뻔한 아우성이다.

1기 제작 활성화에서 3기 환경 안정화까지

1기 영진위의 가장 큰 실적은 ‘한국영화 제작 활성화’다. 영진위가 출범했던 1999년은 <쉬리> 신드롬으로 한국영화의 폭발에 고무됐던 해였지만, IMF 한파로 대기업들이 충무로 철수를 거듭했으며, 일신창투를 비롯한 금융자본들도 불확실한 가능성 앞에서 여전히 서성거리던 때였다. 영진위가 2000년부터 시행한 투자조합 사업은 그런 상황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였다. 49편(1999년 기준)에 불과했던 한국영화 제작편수를 110편(2006년 기준)으로 끌어올렸다는 양적 결과보다 중요한 건 ‘간접지원으로 재원 소진을 최소화’하면서 현재까지도 지속 중인 안정적인 형태의 투자-제작 시스템을 일궈냈다는 점이다.

영화진흥공사의 지원이 “독재정권의 시녀 노릇을 하고 반대급부로 받던 리베이트”였던 것에 비해 1기 영진위의 제작 활성화 사업은 “한국영화의 자생성”을 북돋우기 위한 유효한 조치였다. 1기 영진위가 위원회 구성을 둘러싼 파행과 내홍으로 임기의 절반 가까이를 ‘까먹었’음에도 짧은 시일 동안 기대 이상의 지원책을 내놓을 수 있었던 데는 정책연구를 전문적으로 담당할 부서가 존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2000년부터 영진위 정책연구실은 월별 영화산업 통계 발표, 영화 관객성향 조사, 상시적인 포럼 개최를 통한 제도 개선, 해외 통신원을 활용한 세계영화산업의 동향 파악 등을 통해 갖가지 진흥책들을 쏟아냈다.

2기 영진위가 큰 관심을 보인 건 ‘다양성 증진’이었다. 1기 영진위가 산업적인 활력을 도모했다면, 2기 영진위는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 디지털 장편영화 등에 대한 직접 제작 지원 및 이 영화들의 유통배급망 확충을 위해 아트플러스 시네마 네트워크 지원, 시네마테크 사업 지원” 등에 힘썼다. 참고로 1999년 영화문화다양성증진 사업 예산은 5억원이 채 되지 않았으나, 2기 위원회가 예산을 짠 2005년에는 120억원 수준으로 대폭 늘어났다. 조영각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은 “더욱 적극적이었으면 하는 아쉬움은 남지만 독립영화, 예술영화를 공적 지원의 대상으로 포함시켜 지원한 것은 지난 영진위의 실적”이라고 말한다.

3기 위원회의 숙제는 1기, 2기 위원회의 공을 더욱 끌어올리되 과를 최소화하는 것이었다. 산업의 영역에서 3기 위원회는 메이저 투자·배급사들의 독점적 횡포를 막기 위한 환경을 조성해야 했고, 문화 영역에서는 다양성 영화들이 제 힘으로 설 만한 지렛대를 마련해야 했다. 중대형 규모의 투자조합 결성을 계획하고 공정경쟁환경조성특별위원회 운영을 통해 산업의 균형을 꾀했다면, 독립영화 전용관을 설립하고 마케팅, 개봉지원 사업 등을 펼친 것은 문화의 영역을 더욱 넓히려는 노력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2007년부터 영화 노사 단체협약이 시행됨에 따라 근로환경 개선을 위한 제작환경 합리화 사업의 기초를 다지기도 했다.

“미온적 태도” “백화점식 사업” 비난도

특정 사업자들의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공공 영역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는 점에서 영진위의 지난 10년은 비교적 합격점을 받을 만하다. 아쉬움도 분명 존재한다. 영화인회의 영상산업정책연구소 김도학 박사는 “메이저 투자·배급사들의 독과점 문제가 불거졌을 때 영진위가 분명하게 발언했다면 공정경쟁위원회의 판단 또한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한다. “영진위가 제도적 개선을 추진할 권한이 없지만 피해자인 제작 주체들을 대신해 불공정한 유통 상황들을 지적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주장이다.

사안마다 발빠르게 움직였음에도 실제 정책 집행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는 지적도 있다. 한국영화프로듀서연합의 안영진 프로듀서는 “2001년 스탭들이 처우개선 문제를 제기했지만 영진위가 이에 적극적으로 대응한 것은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이 만들어진 2005년 이후였다”고 말한다. ‘백화점식 사업’의 비효율성에 대한 비판도 있다. 사운드, 현상 등 후반작업을 중심으로 한 기술사업의 경우, “2001년까지만 하더라도 인프라, 인력 확보 등에서 영진위가 우위를 점했지만 그 이후에는 민간부문에 뒤처지기 시작했다”. 사업부 정리는 민감한 사안이지만, 어떤 식으로든지 ‘변화’가 불가피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영진위를 향한 ‘쓴소리’가 영진위의 성과와 존재를 부정하는 데까지 나아가선 곤란하다. 산업 영역에서 조정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했는가, 문화 영역에서 든든한 지원군의 책임을 다했는가, 라는 질문에 앞서 정부가 영진위의 자율성을 보장했는지를 다시 물어야 한다. 세대간의 갈등을 최소화한다는 이유로 정부는 영진위 구성에서 전문성 대신 세대간 보혁간 인사의 안배에만 몰두했던 것이 사실이다. 영화계의 반발에도 영진위의 예산승인권을 문화관광부(현재는 기획재정부에 있다)에 둔 것 등도 현장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을 지체하게끔 만들었다. 금고의 소진을 염려한 탓에 실제 연간 예산 또한 150억원 정도에 머물렀던 원인도 있다.

영진위는 너무 늦게 만들어지기도 했다. 영진위가 1999년이 아닌 1989년에 탄생했다면 어땠을까. 1984년 제작 자유화 조치 이후 한국영화가 할리우드 직배 상륙에도 조금씩 꿈틀거리기 시작했을 때 영진위가 만들어졌다면 시행착오는 상당부분 줄었을 것이다. 산적했던 영화계 내부의 다양한 이해들은 1999년을 기점으로 한꺼번에 터져나왔고, 백화점식 사업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던 측면이 있다. 2008년 발간된 <제3기 영화진흥위원회 정책백서> 첫머리에 이현승 당시 영진위 위원장 직무대행이 “영진위가 이제 지원기관이 아닌 정책기관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주문했던 것 또한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4기 때의 토론회는 ‘이벤트’였다?

급변하는 산업환경의 파고 앞에서 영진위가 적절하게 대처했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존재한다. 다만 잊어서는 안될 것이 하나 있다. 지난 10년 동안 영진위가 숱한 오해와 핀잔에도 한국영화 진흥을 위한 소통의 구심점 노릇을 톡톡히 했다는 점이다. 소위원회 제도 등을 통해 현장의 요구와 고민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으려고 했다는 점만큼은 인정해야 한다. 1천만 관객 시대를 열었으나 마이너스 수익률로 신음하는 한국영화의 지난 10년은 영진위만의 책임이 아닌 영화계 전체의 숙제라는 뜻이다.

1기, 2기 영진위 위원을 역임했던 김홍준 감독은 과거 “영진위의 위상과 성격은 완결된 것이 아니라 진행형”이라고 말한 적 있다. “영진위가 무엇을 해야 하고,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끊임없는 자문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출범 1주년을 맞은 4기 영진위 또한 마찬가지다.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4기 영진위는 일을 하지 않는다. 일을 하지 않는 건 소통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토론회를 몇 차례 열었지만 그건 소통이 아니라 이벤트였다. 4기 영진위는 ‘3D 사업’의 경우 디지털 다운로드와 DVD 시장을 동시에 창출한다고 발표했는데, 대체시장을 동시에 육성하겠다는 건 모순이다. 이런 사업들이 아무렇지 않게 나오는 건 소통이 전혀 안되고 있다는 증거다.” 영화인회의 영상산업정책연구소 김도학 박사의 말이다.

강한섭 위원장은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이른바 진보를 자처하며 과거와는 분절된 채 오지도 않은 미래만을 그리며 현재를 내팽개친” “얼치기 진보주의자, 가짜 자유주의자”들이 ‘이너서클’을 만들어 영진위를 망쳤다고 비난해 물의를 빚은 바 있다. 1년이 지난 지금, 그러나 강 위원장의 독설은 자신을 향한 부메랑이 되고 있다. 내부 직원조차 모르는 밀실에서 만들어진 한국영화 정책이 한국영화를 위기의 수렁에서 건질 수 있을까. 의문이다. 지금이라도 영화계가 무엇을 원하는지, 4기 영진위는 소통의 귀를 열어 꼼꼼하게 따져봐야 한다. ‘건강한’ 영진위를 영화인들에게 돌려주고 싶다는 소망이 진심이라면 말이다.

한국영화 진흥기구의 발전사

1973. 4. 3 영화진흥공사 창립

1984. 3. 12 한국영화아카데미 창립

1997. 10. 11 영화진흥금고 설치

1997. 11. 5 종합촬영소 준공

1998 11. 김대중 대통령 후보 ‘영화진흥위원회’ 구성을 선거공약으로 제시 *영상전문투자조합에 대한 공공재원 출자 근거 마련

1998. 12. 19 김대중 제15대 대통령 선출

1999. 2. 8 영화진흥법 개정

1999. 5. 28 영화진흥위원회 출범(위원장 신세길·부위원장 문성근·위원 김우광, 김지미, 안정숙, 임권택, 윤일봉, 정지영, 조희문, 채윤경)

1999. 9. 6 1기 2차 위원회 출범(위원장 박종국·부위원장 조희문·위원 문성근, 김우광, 김지미, 안정숙, 임권택, 윤일봉, 정지영, 채윤경)

1999. 10. 5 정지영, 안정숙, 문성근 위원직 사퇴

2000. 1. 27 1기 3차 위원회 출범(위원장 유길촌·부위원장 조희문·위원 김승범, 김홍준, 이연호, 이용관, 이용배, 이은, 강대성)

2000. 5. 10 이용관 부위원장 선출

2001. 1. 영상전문투자조합 출자 개시(영화전문투자펀드 결성 지원)

2002. 5. 9 영상미디어센터 미디액트 개관

2002. 5. 28 제2기 영화진흥위원회 출범(위원장 이충직·부위원장 장미희·위원 김병헌, 김창유, 김홍준, 민병록, 변재란, 유지나, 이민용)

2004. 1. 1 문예진흥기금 폐지

2004. 5.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시행

2005. 6. 24 영진위 부산 이전 확정

2005. 9. 중소기업청 모태펀드와 영상전문투자조합 공동 출자

2005. 5. 28 제3기 영회진흥위원회 출범(위원장 안정숙·부위원장 이현승·위원 김동원, 김영재, 심재명, 송종길, 임호천, 장미희, 정남헌)

2006. 1. 26 문화관광부, 스크린쿼터 축소 발표

2006. 12. 22 영화발전기금 운영

2007. 7. 1 영화발전기금 조성을 위한 영화상영관입장료 부과금 모금

2008. 5. 28 제4기 영화진흥위원회 출범 강한섭 위원장 취임

2008. 6. 30 제4기 위원회 위원 선출(부위원장 심상민·위원 김세훈, 민병천, 박경필, 오정완, 이미연, 정수완, 조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