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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 트뤼포 영화제
2001-12-07

누벨바그의 구심점, 프랑수아 트뤼포 영화 14편 상영, 12월7일부터

“나는 젊은 날의 내가 보고 싶었던 영화들을 만든다”고 말했던 프랑수아 트뤼포는 멀리서 보면 하나의 큰 물결이지만 다가가서 바라보면 수많은 개성의 소용돌이였던 프랑스 누벨바그에서 구심점 역할을 했던 감독이다. 작가적 소우주와 장르의 바다에서 번갈아 유영했던 그의 영화는 누벨바그와 대중 사이에 놓인 다리이기도 했다. 하이퍼텍 나다가 12월7일부터 25일까지 마련한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주간(주최 동숭아트센터 후원 주한 프랑스대사관)은 올 겨울 서울지역 관객에게 배달된 특별한 크리스마스 선물. 몇해 전 개봉됐던 <쥴 앤 짐>과 몇몇 비디오 출시작을 제외하면 접하기 힘들었던 프랑수아 트뤼포의 영화 한 꾸러미를 필름으로 감상할 수 있다. 영화 교과서들을 통해 익숙한 <피아니스트를 쏴라>와 같은 명성 높은 영화부터, 몇해 전 개봉을 시도했다 좌절됐던 이자벨 아자니 주연의 멜로드라마 <아델 H의 이야기>, 히치콕풍 스릴러 <상복입은 신부>, 영화에 관한 영화로 잘 알려진 <아메리카의 밤>, 단편 <개구쟁이들>까지 총 14편의 흥미진진한 문제작들이 스크린에 오른다. 전화예매 및 문의 02-766-3390(내선 293,294).

빔 벤더스의 <베를린 천사의 시>가 세명의 감독에게 헌정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벤더스는 그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오즈 야스지로, 프랑수아 트뤼포- 을 ‘전직 천사’라 불렀다. 여자 곡예사의 모습을 애타게 바라보던 천사 다미엘의 모습 위로 영화라는 매체의 ‘부드러운 살결’에 한없는 매력을 느끼고 사랑을 바쳤던 트뤼포의 영상이 겹쳐진다고 말하는 건 지나친 상상만은 아닐 것이다. 여기엔 영화광들의 은밀한 매력에 대한 공감이 있다. 천사 다미엘이 자기가 그저 응시하기만 하던 공간 속으로 뛰어드는 행위에는 이중의 뜻이 있다. 그건 현실로 뛰어드는 것이기도 하지만 거꾸로 더욱 깊숙하게 영화 속에 온전히 몸을 파묻는 행위기도 한 것이다. 우디 앨런의 <카이로의 자줏빛 장미>와 같은 영화에서와는 달리 현실과 영화는 정말이지 행복하게 만난다.

현실로 뛰어든 영화

트뤼포의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 우린 이처럼 현실과 영화간의 끝없는 순환을 전제해야 한다.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트뤼포는 결코 현실에서 벗어나본 적이 없다. 혹은 적어도 트뤼포는 그렇게 믿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현실이란 그 자신의 현재와 과거의 삶인 동시에 그를 매혹시켰던 영화들이기도 하다. 여기에 어떤 혼동은 존재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영화는 우리가 다룰 수 있는 하나의 질료로서의 현실이다. 따라서 그의 장르영화들, 이를테면 <피아니스트를 쏴라>나 <신나는 일요일> 같은 혼합장르는 물론이고 <부드러운 살결>이나 <상복입은 신부>처럼 고전장르에 속하는 것들조차 영화라는 현실에 대한 하나의 논평이 되는 것이다. 심지어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먼 곳에 동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야생의 아이> 같은 영화도 현실과 영화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의미심장한 성찰을 보여준다. 야생의 아이 빅토르는 이타르 박사(트뤼포 자신이 직접 연기했다)를 통해 ‘말과 문자, 소리, 그리고 이미지’에 대해 하나씩 깨우쳐간다. 빅토르의 교육은 처음에 거울 앞에서 혹은 거울을 통해 이루어진다.

흥미로운 것은 이상 언급한 특징들을 근거로 상호텍스트성, 자기반영성, 거울단계, 패러디와 패스티시 등등의 용어를 들이대는 순간 트뤼포 영화의 매력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린다는 점이다. 종종 그와 비교되곤 하는 고다르에게 있어서라면 이러한 용어들이 이해와 분석에 적절한 도움을 주는 게 사실이겠지만 트뤼포에게는 그렇지 않다. <야생의 아이>를 보면서 행동주의적 학습이론에 따른 정적/부적 강화와 벌, 정신분석학 및 기호학 등을 들먹이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 영화는 이타르 박사와 소년 빅토르가 각각 혹은 함께 경험하는 수많은 ‘특권적인 순간’들로 가득한 영화인 것이다. 트뤼포의 영화에서 과학이나 이론은 그저 핑계에 불과하다. 이건 히치콕의 영화에서 인물들이 읊조리는 정신분석학적 명제들이 그저 핑계에 다름 아닌 것과 동일한 것이다.

여자문제로 괴로워하는 남자주인공들

유명한 인터뷰집 <히치콕과의 대화>에서 트뤼포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히치콕 영화 가운데 하나로 <이창>을 꼽았다. 우린 왜 그가 그런 선택을 했을까 하고 질문해볼 수 있다. 아마도 그는 여기서 (흔히 얘기되는 것과는 반대로) 사실은 영화가 그저 관음증적 속성을 지닌 매체만은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던 것 같다. 우리는 무언가를- 특히 여자들을- 훔쳐보는 주인공을 본다. 즉 우리는 그가 보는 대상을 봄과 동시에 그를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트뤼포는 이 주인공의 자리에 다분히 매력적이지만 종종 수줍음을 타고 소심한(동시에 집요한 관찰자이기도 한) 그의 남자주인공들을 데려다 놓는다. 그리고 그 인물의 문제와 부정적인 속성이 무엇인지를 솔직하게 드러낸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아마 앙트완 드와넬 연작- <앙트완과 콜레트> <훔친 키스> <부부의 처소>, 그리고 <사랑의 도피>를 말한다. 장 피에르 레오가 연기한 앙트완 드와넬이 주인공으로 를 제외하면 그의 여성편력을 담은 일종의 모험기로서 간주될 수 있다. 이 연작은 1959년부터 1978년까지 거의 20여년에 걸쳐 제작, 발표되었다- 일 것이다. 또 무력하게 지하실에 처박혀 ‘창문을 통해’ 지나가는 여자들의 다리만 훔쳐보고 있는 남자주인공과 그를 대신해 적극적으로 탐색을 벌이는 여성이 등장하는 <신나는 일요일>은 분명 <이창>의 제임스 스튜어트와 그레이스 켈리의 구도를 그대로 빌려온 것이다.

트뤼포의 남자 주인공들이 괴로워하는 건 대개가 동일한 이유에서다. 간단히 말해 여자문제다. 트뤼포는 스스로도 밝혔듯이 자신이 여자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척하려 들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을 ‘사랑하지만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이웃집 여인>)라고 말한다. 결국 일단 그들을 관찰한다. 강조하지만 훔쳐본다기보다는 관찰한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이건 대상의 비밀을 벗겨내고자 하는 성인 남성의 시선이 아니라 호기심을 가지고 자신을 매혹시킨 대상을 뒤쫓는 아이들의 시선이다. <개구쟁이들> 같은 단편에서 이는 명백하다. 그러나 성인이 된 앙트완 드와넬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것이다. 트뤼포의 인물들은 정말이지 마치 아이처럼 묻는다. “여자들이 신비롭다고 생각해요?”(<아메리카의 밤>) “짐은 계속 되뇌었다. 그런 여자는…. 그런데 그녀가 어떤 여자란 말인가?”(<쥴과 짐>) 또는 멋대로 생각한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지적이라면 이 침묵은 금이 되겠지. 침묵은 유혹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그런데 그녀는 말이 없군. 심각한 성격이야.”(<피아니스트를 쏴라>) 그들- 심지어 살인범이나 악당들조차도- 의 행위는 여성에 대한 매혹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여자들을 감상하고 스치고 호흡하는 게 좋았어요. 여자들은 신비로워요.”(<신나는 일요일>) “타바르 부인은 여성이 아니라 환영이에요.”(<훔친 키스>) “여자는 순수하고 섬세하고 깨질 것 같은 그 무엇…. 여자는 경이롭고 여자는 최상의 것이지.”(<피아니스트를 쏴라>) 여자들이 환영이 아니라는 것, 혹은 그녀들이 신비롭지 않으며 남자들 또한 그렇다는 걸 알고 있는 것은 언제나 여자들뿐이다.

분석적 지성의 결여, 트뤼포의 매력

트뤼포는 자신의 인물들을 제시하면서 우리 또한 그들의 시선을 공유하도록 유도하지는 않는다. 그는 그 시선까지도 적나라하게 제시한다. 이는 어느 정도 다시 히치콕에게 빚지고 있는 것이지만 무엇보다도 브뉘엘과 관련이 있다. 아마 에릭 로메르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로메는 히치콕이나 브뉘엘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창조한 인물들을 그다지 사랑한 것 같지는 않다. 적어도 ‘도덕 이야기’ 연작에 관한 한 분명히 그렇다. 반면 트뤼포는 자신의 주인공들이 지닌 약함과 속물근성 모두를 감싸안으며 그들에게 지나칠 만큼 애정을 쏟는다. 게다가 그의 카메라는 종종 관찰자적 거리두기와 분석가적인 밀착 사이에 놓여 있다. 객관적이고 분석적인 지성의 결여로 보이는 이러한 태도는 분명 트뤼포의 약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야말로 트뤼포의 영화가 우리에게 매력을 주는 주된 원천이기도 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는 그는 우디 앨런과 많이 닮았다. 우리가 그와 공감하는 순간 그의 모든 약점은 우리 것이 되고, 공감을 배제하고 접근하려 들면 우린 아무것도 경험할 수 없다. 이러한 딜레마는 오늘날의 평자들이 누벨바그의 일군의 감독들 가운데 선뜻 트뤼포를 선두에 올려놓길 주저하게 만드는 한 이유가 된다(게다가 그는 너무 일찍 죽었다).

인물들이 사랑을 실천하는 방식 가운데 하나는 무언가를 수집하는 것이다. 여기엔 영화광으로서의 트뤼포의 자의식이 깊이 스며 있다. 때로 트뤼포 영화의 인물들은 이미지에 대한 매혹으로부터 출발해서 그 이미지의 원천이 되는 대상을 직접 찾아 나서곤 한다. 에서 아이들이 <모니카와의 여름>의 여주인공 해리엇 앤더슨의 사진을 훔치는 것이나, <아메리카의 밤>에서 어린 시절의 페랑이 <시민 케인>의 스틸을 훔치는 것은 아주 유명한 예이다. 그러나 그 외에 더 흥미로운 예들을 찾아볼 수 있다. <사랑의 도피>에서 앙트완 드와넬이 사빈과의 사랑을 시작하기로 결심한 것은 우연히 얻게 된 그녀의 사진을 보고 난 다음부터다. <피아니스트를 쏴라>의 레나는 전직 피아니스트 샬리의 포스터를 방안에 모아두고 있다. <쥴과 짐>의 두 남자들이 카트린에게 매력을 느끼게 된 것도 그녀의 미소가 그들이 슬라이드로 본 한 동상의 미소를 닮았기 때문이다. 사실 트뤼포 영화 자체가 흘러가는 순간들 가운데 어떤 특정한 이미지를 포착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가령, 트뤼포는 <쥴 앤 짐>에서 찡그리거나 환하게 웃고 있는 카트린의 모습을 갑작스레 프리즈 프레임으로 잡아 보여준다. 때로 그는 거울을 통해 프레이밍된 인물들의 모습을 오래도록 응시하기도 한다. <아메리카의 밤>의 극중 영화감독 페랑(역시 트뤼포 자신이 직접 연기했다)이 잠들어 있는 침대 위로 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당신은 왜 정치적인 영화는 만들지 않죠?”(이 말이 누구를 의식한 것인지는 너무나도 명백하다) 그가 어린 시절 <시민 케인>의 스틸을 훔치는 모습을 보여주는 꿈 장면은 그에 대한 대답처럼 여겨진다. 영화는 정치화하기엔 그에게 너무나 사적인 매혹을 불러일으키는 매체였던 것이다. 또 페랑은 한 무더기의 책을 주문해서는 이들을 책상 위에 하나씩 얹어놓는다. 거기엔 이런 이름들이 적혀 있다. 루이스 브뉘엘, 칼 드레이어, 에른스트 루비치, 잉마르 베리만, 장 뤽 고다르(!), 알프레드 히치콕, 로베르토 로셀리니 등등. <아메리카의 밤>은 고다르의 <경멸>처럼 영화제작과정을 담은 영화이지만, 매체의 생산과정을 드러냄으로써 관객이 좀더 능동적이고 비판적으로 접근하도록 하겠다는 계몽적인 의도는 담겨 있지 않다. 제임스 모나코의 지적대로 이 영화의 모토는 결국 ‘인생을 즐기고 영화를 즐겨라 carpe diem, carpe cinema’이다.

영화, ‘항상 곁에 있었지만 영원한 이웃’

트뤼포의 세계는 몇개의 닫혀진 원환을 통해 이해될 수 있다. 영화와 삶, 남성과 여성, 도피와 귀환, 장르와 작가 사이를 오가는 주기운동은 그의 영화들이 내뿜는 활력의 원천이다. 에서 회전원통을 타고 놀며 즐거워하던 앙트완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여기에서 트뤼포는 앙트완이 바라본 거의 점멸하듯 빠르게 지나가는 구경꾼들의 모습과, 구경꾼들이 바라본 회전원통의 모습을 교차시킨다. 동시에 앙트완과 함께 돌며 그의 환한 모습을 보여주는 카메라의 존재가 있다. 이 원환 속에는 자신이 창조한 인물과 함께하는 데서 오는 기쁨의 과시가 있는 것이다. 영화라는 매체의 부드러운 살결은 이 야생의 아이를 한없이 매혹시켰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 둘은 ‘항상 곁에 있었지만 영원한 이웃’(<이웃집 여인>)일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었다.유운성 akeldama@netian.com▶ 프랑수아 트뤼포 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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