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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전이 빚어낸 비극 애도 <엘라의 계곡>
김용언 2009-12-09

synopsis 퇴역 군인 행크(토미 리 존스)는 이라크전에 참전한 아들 마이크(조너선 터커)가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접한다. 그는 명예로운 군인은커녕 탈영 위기에 처한 아들이 걱정되어 아내 조안(수잔 서랜던)도 떼어놓은 채 직접 군부대로 향한다. 단순한 마약 관련 사건으로 마이크의 실종을 처리하려는 군수사대를 의심한 행크는 지역 관할 형사 에밀리(샤를리즈 테론)와 함께 마이크의 실종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마이크와 함께했던 전우를 만나면서 참전 중에 이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조금씩 드러나고, 마침내 행크는 자신의 신념 전체가 무너지는 위기를 겪는다.

이라크전이 빚어낸 공적인 비극과 사적인 비극을 애도하는 영화, 그러나 <엘라의 계곡>은 그 애도의 과정 도중 감정을 놀랄 만큼 절제한다. 하다못해 “왜 우리를 그곳으로 보낸 거야?”라는 반문조차 등장하지 않는다. 자신들이 저지른 죗값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어린 군인들의 텅 빈 눈빛을 ‘보여줄’ 뿐이다. 그 앞에서 무너져내리는 보통 사람들의 절망도 차가울 만큼 묘사로만 일관한다. 그렇기 때문에 <엘라의 계곡> 마지막 장면의 강조점이 느닷없이 불쑥 튀어나온 꼭짓점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엘라의 계곡>의 중심은 역시 토미 리 존스가 연기하는 퇴역 군인 행크다. 토미 리 존스 자신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연기한 캐릭터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그랜 토리노> 주인공을 뒤섞은 것 같은 이 캐릭터는 흥미롭다. 그는 싸구려 모텔에서도 매일 밤 시트를 꼼꼼하게 정리하고, 낯선 사람 앞에 러닝셔츠 바람으로 있는 걸 견디지 못한다. 토플리스 차림의 웨이트리스에게 “부인”(ma’am)이라는 경어를 사용하며, 집과 가족에 관련된 일이라면 무엇이든 내 손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완고한 결벽증의 이 남자에게는 애국심과 가족애가 다르지 않다. 그는 개인으로서의 올바른 삶이 건전한 사회를 구축한다는 소박한 믿음을 견지한다.

그러나 아들 마이크의 실종 사건의 전모를 마주하고 난 뒤 그는 입을 다물어버린다. 영화의 클라이맥스, 관련자 모두가 한 테이블에 앉아 진실을 털어놓던 시퀀스에서 토미 리 존스가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고 푸들거리는 눈밑살과 볼 근육만으로 미칠 것 같은 심정을 표현하는 장면은 그악스러울 정도다. 그러니까 이라크전 이후의 미국에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었다’. 자신과 같은 사람을 찾아보려 해도 모두 은퇴했거나 죽었다. 아버지 행크는 혼자 남았다. <엘라의 계곡>은 21세기의 미국을 용납하지 못하는 완고한 도덕주의자의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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