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영화읽기 > 전영객잔
[전영객잔] 그 죽음에 대한 애도, 가능합니까? [1]

<시> <하녀> <하하하> 속의 죽음이 남긴 질문

5월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죽음이 있다. 마침 한국영화 세편이 거의 동시에 개봉했고, 세편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죽음을 말하고 있다. 물론 <> <하녀> <하하하>는 한 묶음으로 논할 수 있는 영화는 아니다. 이들이 여전히 애도되지 못한 죽음의 필연적인 영화적 귀환이라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우연이라고 해도 이 영화들 안으로 동시에 찾아온 죽음은 지난 1년간 남한사회의 구천을 떠돌았을 여러 비통한 죽음을 상기시키는 면이 있고, 그냥 지나치기는 어렵다. <> <하녀> <하하하> 각자의 죽음에 대해 말하지 않고서는 이 영화들과, 이 영화들의 5월을 떠나보내기가 힘들 것이다. 지난 전영객잔에 <하하하>에 대해 쓰면서 나는 죽음은 아무리 근사한 표현을 가져다 붙여도 삶보다 관념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씨네21> 753호). 실은 <하하하>에 드리운 죽음의 기운을 피하기 위해, 그걸 삶의 기운으로 읽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한꺼번에 찾아온 세편의 영화를 뒤늦게 함께 생각하면서 죽음에 대한 사유를 얼마간 끌어안을 필요를 느낀다.

<하하하>, 삶의 유쾌한 웃음과 죽음의 그림자

이미 그 결에 있어서 비평적으로 찬사를 받은 영화들을 무리하게 정리한 느낌이 들긴 하지만, 죽음에 관해서라면 세 작품은 이렇게 말해도 될 것이다. <>는 타자의 죽음 이후 죽음과 함께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묻는 영화고, <하녀>는 이 세계가 어떻게 타자를 죽음으로 떠미는지, 그때 죽음은 어떤 선택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영화다. <하하하>는 좀 다른 차원에 있기 때문에 같은 선상에서 논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이 영화의 죽음은 내용이 아닌 구조와 배열의 문제다. 이때의 죽음은 무언가의 원인이나 결과가 아니며, 사회적 차원에 있기보다는 차라리 영화적 차원에 있다. 혹은 도덕적 차원에 있기보다 윤리적 차원에 있다. 흑백의 스틸사진이 바라보는 과거의 충만한 생동감으로 보든 현재의 충만함이 예견하는 미래의 죽음으로 보든 혹은 동시에 뒤섞여 공존하는 무엇으로 보든 아무튼 어딘가에 죽음, 혹은 정지, 혹은 끝이 내재하는 건 맞다. 그러나 그 죽음이 삶을 말하기 위해서 영화에 머무른다는 걸 보는 게 중요하다. 삶을 말하기 위해서는 죽음을 말해야 한다는 상투적인 수사를 반복하는 게 아니라, 그 죽음이 행복에 대한 이해와 밀착된다는 걸 물질적으로 느끼는 게 중요하다. <하하하>가 홍상수 영화 중에서도 유독 삶의 유쾌한 웃음과 죽음의 그림자의 극단적 공존처럼 보이는 건, 그리고 우리가 그 사이에서 필사적으로 요동치는 무언가를 경험하는 건, 어쩌면 필연적인 결과다. 행복을 붙잡고자 하는 마음이 커질수록 소멸, 죽음에 대한 이해는 동시에 진행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하하하>의 죽음은 <> <하녀>의 죽음과는 기질적으로 다르다(<하하하>는 지난 몇주간 상대적으로 많이 다뤄졌고, 나 역시 한 차례 비평을 쓴 만큼 이 글은 나머지 두 영화의 죽음에 더 할애될 것이다).

<하하하>에 비해 <>와 <하녀>의 죽음은 사회라는 토대를 공유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단지 거기까지다. 이창동과 임상수는 다르다. 다만 두 영화 모두 죽음을 전면화하는 장면들이 영화적 결단인 것은 틀림없고, 거기에 영화의 쟁점이 숨어 있으며, 그걸 어떻게 읽어내는지에 따라 영화에 대한 판단이 달라진다. 미리 말하자면 <>에서 미자의 내레이션이 소녀의 목소리로 바뀌고 소녀가 고개를 돌려 스크린 밖으로 시선을 던지는 장면과 <하녀>에서 은이가 난간에서 뛰어내려 분신자살하는 장면은 많이 언급되었지만, 여전히 수많은 질문이 남는다. 그러므로 이 글은 영화 자체에 대한 본격적인 비평이기보다는 그 속의 죽음이 남긴 질문을 돌아보는 글로 읽히길 바란다.

<>, 부서진 시를 대면하는 개인의 분열

<>는 앞에서 말했듯, 타자의 죽음 이후 그 죽음을 어떻게 대면하고, 산자가 죽음의 빈자리를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를 묻는 영화다. 그리고 시를 쓴다는 것은 그 질문을 반드시 경유해야만 하는 일이다. 시는 아름다움도 말할 수 있고, 죽음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이 영화에서 시는 타자의 죽음을 만나지 않고서는 쓰여질 수 없다. 공교롭게도 3년 전 임상수의 <오래된 정원>이 “서정시가 불가능한 시대의 연가”(이영진, 585호)였고 서정시를 부수는 시대의 분열이 고통스러웠다면, 이제 <>는 그 부서진 시를 대면하는 개인의 분열이 고통스러운 영화다. 지아장커가 예전 어느 인터뷰에서 했던 말을 좀 변용하자면, 이렇게밖에 살 수 없는 시대의 고통은 무엇인가에서 이런 시대에서도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통은 무엇인가로 시의 자리가 옮겨가고 있다고 말해도 될 것이다. 영화는 미자가 시 쓰는(못 쓰는) 과정을 통해 죽음이 만연한 시대의 슬픔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살아 있는 한 어떤 식으로든 타자의 죽음을 반복해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는 걸 보여주려고 한다. 그러나 미자는, 영화는 혹은 우리는 궁지에 빠진다. 어찌됐든 살아 있는 자들인 우리가 어떻게 타자의 죽음을 반복할 수 있을 것인가. 미자가 소녀의 시체가 떠내려가던 강변에서 비를 맞으며 멍하게 앉아 있을 때, 그녀의 텅 빈 노트 위로 마치 누군가의 눈물처럼 빗방울이 떨어질 때, 타자의 죽음을 반복한다는 것은 가능하기는 한가, 절망적으로 묻게 된다. 결국 <>는 애도의 문제에 당도한다. 하지만 이창동은 타자의 상실을 완전히 받아들이는 것, 즉 죽은 자에 대한 충분한 애도를 통해 자아를 회복하는 프로이트의 그 과정을 지향하고 있는가. 오히려 타자의 완전한 상실, 달리 말하면 타자에 대한 완전한 애도를 받아들여도 되는가, 반문하는 영화에 가깝고 타자의 죽음에 마주한 주체의 그런 곤경을 사회적으로든 문학적으로든 쉽게 처리해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렇기에 더욱이 <>가 도달한 마지막 장면은 좀 이상하다. 전반부에 비해 뭔가 끝까지 밀고 나가지 못했거나 스스로의 사유를 철회한 느낌이 있다.

영화의 도입부에 소녀의 주검이 아무런 설명없이 강을 따라 떠내려올 때, 우리는 소녀의 육체적 죽음은 무언가 충분히 말해질 때까지 영화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니게 될 것을 예감한다. 영화가 이 이미지를 단순히 소모하기 위해 배치한 것이 아니라면, 이 가련하고 억울한 죽음의 익명성은 어떤 식으로든 상징적인 의미를 획득하기 위해 영화 속 누군가의 삶으로 돌아올 것이다. 일단 미자에게 있어서 끝내 잡히지 않는 시상, 시를 쓸 수 없게 만드는 지속적인 고통은 바로 유령이 되어 자신의 죽음을 상징화하려는 소녀의 고통이 영화적으로 현현한 순간이라고 말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 둘이 서로의 고통을 마주하는 팽팽한 긴장의 순간, 물론 우리에게는 한쪽(미자)의 고통만 가시화되지만, 그 순간이야말로 이 영화에서 타자의 죽음이 반복되는 순간일 것이다. 중요한 건 미자의 시가 실패하고 소녀의 상징화가 실패한다는 점, 그걸 한 테두리 안에서 읽는 것이며, 그렇다면 실패할 수밖에 없는 데서 오는 고통에 어떠한 태도로 임해야 하는가이다. 그런데 후반부를 보고 난 뒤, 다시 돌이켜볼 때, 영화의 방향이 좀 달리 읽힌다.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다. 영화는 둘의 고통을 이렇게 마주하게 만드는 과정에서 결국 타자(소녀)의 죽음이 충분히 상징화될 수 있다고 믿는가? 어떻게든 말해져야 한다고 믿는가? 그것의 성공을 보여주는 것이 궁극의 실패를 보여주는 것보다 낫다고 믿는가? 그 실패의 과정보다 마침내 완성한 시의 의미가, 소녀의 얼굴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가? 논쟁의 여지가 있겠지만, 결국 그런 것 같다.

관련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