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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의 숨막히는 순간들 <살인의 강>
김용언 2010-09-29

1985년 시골 마을 여중생 살인사건에서 시작하여 1998년 동두천 미군부대 윤락녀 살인사건으로 이어지는 이 영화는 한국 현대사의 숨막히는 공적 순간들이 거주자들의 사적 삶에 어떤 그림자를 드리우고 어떤 식으로 방향을 틀어버리는지를 진중하게 관찰한다. 1985년, 같은 학교 여학생 명희를 짝사랑했던 두 소년 승호(이다윗)와 동식(정세인)은 비밀스런 내기를 벌인다. 그날 밤 명희는 강가 갈대밭에서 처참한 시체로 발견되고, 동식의 형 경식이 범인으로 지목된다. 충격받은 동식은 자퇴하고 마을을 떠난다. 1991년 법대생 승호(김다현)는 학생운동으로 쫓겨다니던 중 구로공단 술집에서 동식의 누나 진희(황인영)와, 수감된 감옥에서는 경식과 마주친다. 원양어선을 타고 떠돌던 동식(신성록)은 점차 승호에게 의혹을 품게 된다.

시대별로 뚝뚝 끊어지는 에피소드의 연결이라는 전체 구성상, 내러티브 진행은 다소 불친절하거나 혹은 우연에 지나치게 기대어 연속성을 억지로 만들어내는 편이다. 특히 영화의 주요한 기둥을 다루는 세번의 죽음이 개인의 비극 차원을 넘어 유기적으로 집결되어 어떤 컨텍스트를 구성하는 데까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순정을 간직한 소년에서 세속에 자연스럽게 편입하는 야심만만한 성인으로 변하는 승호 캐릭터에 대해서도 다소 개연성이 부족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카메라가 멀찍이 떨어져 관조적으로 세계를 바라보거나, 혹은 인물의 고통스런 내면으로 침잠하려 시도하는 찰나의 힘은 꽤 강렬한 편이다. 무엇보다 가장 빛나는 순간들은 1980년대를 묘사하는 부분이다. 두 소년 사이의 미묘한 경쟁심리를 묘사할 때, 전두환 대통령의 사진 앞에서 학생들을 죽 세워놓고 살인 현장에서 발견된 음모와 똑같은 길이의 음모를 찾겠노라 털을 뽑아내게 하는 순간의 희극적인 폭력성을 묘사할 때, 괴괴한 강변의 갈대밭을 헤치며 단서를 찾아 헤맬 때의 갑갑증 등은 기존 한국영화가 80년대를 다루는 시선과 사뭇 다르다. 아름답기만 한 노스탤지어나 특정 색채를 제거한 웃음의 코드를 사용하지 않은 채 정공법으로 다루려는 노력이 잘 보인다. 고통스런 운명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동식 역의 신성록이 기존의 부드러운 꽃미남 이미지와 전혀 다른 상처받은 짐승 같은 연기를 선보여 눈길을 잡아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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