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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눈물이 앞을 가린다, 웃기고 슬퍼서
김혜리 2010-10-22

<불청객> 개봉관 풍경.

9월30일

사람과 그가 깃들어 사는 공간이 조개의 몸과 조가비의 관계처럼 보이는 순간이 있다. 말하나마나 건물은 유기체도 아니고 직접 살 자가 집을 짓는 경우도 드무니 맞을 리가 없는 비유다. 그런데도 누군가 자리잡고 한동안 살아온 방에 들어서면, 거기 사는 사람의 필요와 욕망이 보이지 않는 분비물처럼 조금씩 새어나와 굳어버린 껍데기로 느껴진다. 노래방, 독서실, 고시원처럼 집단이 사용하는 건물도 크게 다르진 않다. 김동주 감독은 <빗자루, 금붕어 되다>를 자막으로 시작한다. “서울 신림동에는 일명 ‘고시촌’(exam village)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여러 개의 작은 방으로 이뤄지며 6만명 이상이 고위 공무원 등이 되기 위해 공부하지만 합격해서 뜨는 사람은 극소수다.” 고시촌의 개념을 해설하는 이 자막은 마치 생태계의 특수 현상이라도 소개하는 투인데, 이어지는 영화와 썩 잘 어울린다. <빗자루, 금붕어 되다>는 50대 후반의 남자 장필의 신림동 고시촌 ‘서식기’다. 그가 고시에 낙방한 뒤 그럭저럭 눌러살았는지 형편에 밀려 고시원을 거처로 삼았는지는 알 수 없다. 하루치 생계를 지탱하기 위해 벽보를 붙이고 폐지를 줍고 쪽방을 반나절 빌려주는 근근한 일상에도 착취와 공생, 영역싸움의 신경전은 어김없이 존재한다.

자본주의 사회 먹이사슬의 아래쪽에 렌즈를 댄 이 영화의 촬영은, 공간을 사각(斜角)으로 위쪽에서 내려다보는 특정한 시야를 고집하고 있다. 말하자면, 삼각주의 한 꼭짓점에 카메라를 놓고 나머지 두변을 광각으로 바라보는 이 앵글에 의해, 좁다란 고시원 복도와 남루한 골목은 빠져나가기 힘든 해자(垓字)가 되고 상대적으로 트인 공간조차 웅덩이마냥 움푹해진다. 모든 공간이 반지하처럼 보인다면 비슷할까. 세상의 바닥이 온통 비스듬한 빗면이고 그 면들이 만나는 가장 낮은 점에 장필의 방이 놓여 있는 듯하다. 중력이 그를 멸시한다. 이 영화에서 카메라가 평화롭고 안정된, 야트막한 앵글로 내려앉는 거의 유일한 신은 장필이 손수 깎아 만든 목각상을 행인에게 5천원에 파는, 즉 동등한 위치에서 거래하는 장면이다.

굴욕과 합쳐진 외로움을 이해하기 전에는 인간의 진짜 외로움에 대해 안다고 말해선 안될 것 같다.

10월3일

<성균관 스캔들>을 보다. 충성도 높은 추종자들을 짧은 시간에 배출한 이 드라마의 ‘조선판 비틀스’-윤식/윤희(박민영), 선준(박유천), 재신(유아인), 용하(송중기) 가운데 재신과 선준이 시청자를 즐겁게 하는 이상적 연인의 모델이라면, 윤희와 용하는 스스로 즐기고 있는 인물이다. 남자로 위장하고 성균관에 입학한 총명한 윤희는 비단 정체를 숨기는데에 급급하고 닥치는 난관을 돌파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남자가 되어 급작스레 확장된 생활 세계를 능동적으로 즐기는 표정을 시시때때로 짓는다. 그 환한 찰나가 극을 경쾌하게 만든다. 계단 밑 다락방의 천덕꾸러기 소년 해리 포터가 호그와트 마법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잠재된 능력과 부모의 역사를 발견하고 활짝 웃는 희열과 해방감을 생각하면 된다. 그런가 하면 <성균관 스캔들>에서 사태의 복선과 친구들의 물밑 감정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단 한명의 전지자(全知者) 여림 구용하는 화면 안과 밖에 한발씩 담그고 경우에 따라 더 재미있는 편에 붙어 즐기고 있다. 악역인 성균관 장의에게 그가 “넌 지금 좀 지루해”라고 경고하는 장면을 보라. 여림은 관객과 더불어 추측하고 의심하고 흥겨워한다.

<성균관 스캔들>은 정조와 사도세자까지 포함해 여러 쌍의 부자(父子)관계에 관한 드라마다. 부자관계는 유서 깊은 소재다. 단, 여기에는 주요한 두 가지 변주가 있다. 첫째, 영화나 드라마에서 명예는 일반적으로 남자들의 일로 여겨지며 여성 캐릭터에게 미덕이 있어도 그것이 명예율과 관련된 일은 흔치 않다. 오히려 여성은 주로 명예욕의 부정적 측면을 드러내는 역할을 수행한다. <선덕여왕>의 미실 정도가 근자의 예외다. <성균관 스캔들>의 윤희도 극 초반에는 선준의 이상주의를 배부른 소리로 (온당히) 비판한다. 그런 그녀가 김윤식으로서 성균관에 입학한 이후 아버지의 이름을 점점 중차대한 과제로 받아들인다. “제가 정말 아비를 닮았습니까?”라고 주상에게 윤희가 되묻는 장면은 여성 시청자에게 기이한 보상의 느낌을 준다. 둘째, <성균관 스캔들>에선 은연중에 부자간의 역학이 뒤집혀 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인정받으려는 욕구보다 아들에게 정통의 아버지로 인정받으려는 아버지의 욕망이 더 절박하다. 노론의 수장 좌의정(김갑수)이 “넌 한번도 내 눈밖에 난 적이 없지. 앞으로도 그러리란 걸 이 아비는 한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다”라고 힘주어 말할 때 그것은 나쁜 아버지의 강압이라기보다 아들의 존경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불안의 징조이기에 애틋한 바 있다. 재신이 형의 목숨을 내주고도 노론에 투항한 아버지를 경멸할 때 “나는 그 힘으로 널 지켜낼 것이다”라고 말하는 대사헌은 어떠한가. 선택권은 아들들에게 있고 정조는 그 틈바구니에 끼어들어 양부의 위치를 탐낸다. <성균관 스캔들>의 아들과 딸들은 기숙사라는 가족이 배제된 극적 공간에서 동세대와 유대를 맺음으로써 아버지를 따르거나 혹은 반항하길 양자택일하기보다 자기들끼리 이상을 수립할 기회를 얻는 셈이다. <성균관 스캔들>이 30대 이상 시청자에게 발휘하는 호소력의 일부는 아버지 세대와 무관하게 삶을 기획해나갈 수 있으리라 믿었던, 이상이 삶과 도통 무관한 명제가 아니라 삶을 가능하게 하는 동력임을 의심치 않았던 학창 시절을 상기시키는 데에 있을 것이다.

각설하고, 벙어리 냉가슴 앓는 <성균관 스캔들>의 유생들을 보고 있자니 어물쩍 떠오르는 궁금증. 질투의 감정을 하나의 숏, 두개의 숏으로, 그리고 세개의 숏으로 표현하는 방법은 각각 몇 가지나 있을까.

10월4일

“은하계를 가로지르는 허튼 소리”라는 카피를 내걸고 디시인사이드에 경건히 헌정된 SF 독립영화 <불청객>의 단독 개봉관을 찾다. 뱅뱅 도는 좁은 나선형 계단을 내려가 극장 로비에 들어서자 갱지에 깨알 같은 손글씨로 인쇄된 <불청객>의 팸플릿이 꽂혀 있다. 액션용 슈가글래스 비용을 감당 못해 자체제작 공정부터 연구개발했으며 삼파장 스탠드를 조명으로 동원했다는 제작기가 간략히 소개돼 있다. 흐르는 눈물을 훔치지 않을 수 없었다. 웃겨서. 맞은편에는 영화에 쓰인 미니어처와 영화 속 악당인 포인트맨 모형이 세워진 성대한 포토존이 마련돼 있다. 모두 자체제작이다. 때아닌 개나리와 진달래 꽃꽂이까지 곁들여져 운치마저 감돈다. 극장 불이 꺼지자 감독이 직접 주연한 예고편이 관객을 맞는다. 길거리에서 포인트맨을 목격한 이응일 감독이 영화가 상영되는 이 극장까지 쫓아 들어오는 추격전이 곧장 본편으로 이어진다. 조 단테의 <마티니>에서 영감을 받았을 성싶다. 그런데 스탭 크레딧 중 슈퍼바이저의 철자법을 내놓고 틀리더니, 주인공에게 걸려온 전화 속 어머니 목소리가 대놓고 남자다. 다시금 소매로 눈물을 닦을 수밖에.

<불청객>은 그러나 이벤트성 농담이 목표인 영화는 아니다. 솔직하며, 스스로를 진지하게 취급해서 재밌는 영화다. 이응일 감독은 요새 젊은이들이 자기를 일컬을 때 쓰는 시쳇말 ‘잉여’에 내포된 슬픔과 분노를 명확히 전한다. <불청객> 속 대사처럼, 주류 편입에 실패한 젊은이들은 내게 허락된 건 생물학적 수명뿐이고 이 사회가 내게 요구하는 것이라곤 아예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여기 처박혀 숨만 쉬어라”가 아닌가 의심하는 것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4차원 삼각형은, 밤낮없이 계단을 올라가는데도 제자리걸음인 삶의 엠블렘이다. 집 밖으로 나가면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으니 좁은 자취방은 점점 우주선처럼 느껴지고, 비슷한 다른 방에 웅크리고 있는 ‘동지’들과 연대하기란 더욱 어렵다. 그러니까 극악한 악당 포인트맨이 나타나 ‘잉여’들을 솎아내 우주로 날려보내기 전까지는 말이다. 중력에서 풀려나서야 비로소 그들은 서로에게 손을 흔들고 인사를 보내고 힘을 합쳐 싸워볼 염을 낸다. <불청객>은 ‘잉여 해방전선’의 프로파간다 필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