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현장리스트 01. “돈에 중독돼서, 끊기가 무섭거든…”

임상수 감독의 <돈의 맛>

“이 작품이 5천만원이라네요.” 촬영장 한편에서 수군거림이 들린다. 폭포가 담긴 유화가 스탭들의 분주한 움직임 속에 방치돼 있는가 싶더니, 얼른 스탭 한명이 다가와 다칠세라 고이 그림을 모셔간다. <돈의 맛> 촬영이 한창인 파주 헤이리 세트장. 오늘 촬영장소는 영화 속에 묘사된 대한민국 상위 1%, ‘슈퍼 리치’ 백 회장 가문의 서재다. 대리석 바닥재와 1, 2층이 트인 높은 천장. 벽면 한쪽으론 잡지에 나온 서가에서 보았을 법한 전면 책장이 들어서 있다. 도대체 몇권이나 되는 건가 싶어 다가가 한권을 꺼내보니, 진짜 책 사이에 교묘하게 꽂힌 소품용 원서가 잡힌다. 책장을 배경으로 2층엔 윤회장(백윤식)이, 1층의 바에는 윤 회장의 아내 백금옥(윤여정)의 비서인 주영작(김강우)이, 그 앞엔 윤 회장의 딸 나미(김효진)가 자리를 잡고 서 있다. 이 넓은 서재에 삼각편대로 서 있는 셋의 대화를 도대체 어떻게 한 화면에 잡으려는 걸까? 크레인에 올라 공간을 지그재그로 담아내는 김우형 촬영감독의 움직임을 보니 곧 궁금증이 풀린다.

거대한 거실에서 2층에 있는 아버지를 보며 나미가 묻는다. “왜 엄마랑 결혼하셨어요?” “돈에 중독돼서, 끊기가 무섭거든…. 돈 펑펑 썼지 원없이. 근데 그게 그렇게 모욕적이더라고.” 아버지와 딸의 일상적인 대화라고 보기엔 심도가 깊다. 아니나 다를까, 임상수 감독이 “어쩌다보니 <돈의 맛>의 가장 핵심적인 장면을 보고 가시네요”라고 귀띔한다.

이날 촬영은 돈에 관한 사뭇 철학적인 반추를 보여주고 있지만, <돈의 맛>은 좀더 저속한 재벌가의 속내로 꽉꽉 들어찬 드라마다. 아버지 백 회장에게서 엄청난 유산을 받은 상속녀 백금옥, 돈을 좇아 살아온 삶을 후회하는 백금옥의 남편 윤 회장, 정략결혼의 실패로 이혼녀가 된 윤나미, 돈으로 속물이 되어가는 백금옥의 아들 철(온주완)이 탈 많은 윤 회장네 일가다. 백금옥의 비서이자 젊고 섹시한 주영작은 재벌과는 거리가 먼 샐러리맨. 하지만 이 집안의 치부를 드러내는 실질적 뇌관이기도 하다. 백금옥은 주영작의 젊은 육체를 탐하고, 나미는 엄마와 육체적 관계를 맺은 영작에게 추파를 던지며, 윤 회장은 필리핀 하녀 에바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고, 주영작은 이 추한 뒷거래를 모두 알고 있다.

<돈의 맛>은 돈과 권력, 섹스의 그물망으로 촘촘히 얽혀 있어 풀기 힘든 이들 군상의 적나라한 모습이다. <하녀>에서 구현했던 부유함을 기초로 하되 좀더 구체적인 부의 실체를 그려낼 예정이다. 이 ‘꿍꿍이셈’ 속에 엔터테인먼트적인 재미를 제공하는 게 목표라는 임상수 감독. 1월20일경 촬영을 마치면 올봄, 진짜 ‘돈의 맛’을 볼 수 있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빼곡히 들어찬 서적이 눈길을 끈다. 거대한 서재는 백금옥(윤여정) 집안의 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녀> 때부터 같이 작업하고 싶었던 배우다”라며 임상수(왼쪽) 감독이 김강우(오른쪽)에 대한 믿음을 드러낸다. 임상수 감독 영화 속 또 다른 ‘주영작’으로 자리한 김강우.

임상수 감독의 현장 연출은 절도있고 명확하고 깔끔하기로 정평이 자자하다. 현장 한켠에 마련된 감독의 사인보드.

백윤식은 <그때 그사람들> 이후 임상수 감독과 두 번째 작업이다. 첫 작업의 즐거운 기억 때문에 꼭 다시 함께 하고 싶었다는 임상수 감독과 백윤식. 이번 캐스팅의 경우, 초고가 나오고 나서 계속 스케줄을 맞추며 성사를 시켰을 정도로 가장 공을 들인 캐스팅. 그 결과 백윤식이 연기하는 윤 회장은 시나리오에서 가장 강렬한 캐릭터로 탄생하게 됐다.

“여배우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현장이 내 현장이라던데. (웃음)” 임상수 감독의 표현에 의하면 김효진은 당차게 그 두려움을 떨치고 나온 ‘좋은 배우’다. 결혼을 앞둔 선택, 신혼여행의 반납을 보더라도 이 작품에 임하는 배우로서 그녀의 포부는 크다.

같은 공간에 있지만, 서재의 스케일, 곧 부의 이미지를 재연한 공간에서 배우들이 모두 각자 독백하는 듯 연기를 펼치고 있다.

<바람난 가족> <그때 그사람들> <오래된 정원>에 이어 임상수 감독과 호흡을 맞추는 김우형(왼쪽) 촬영감독.

“돈의 맛은 권력의 맛이자 결국 섹스의 맛”

임상수 감독 인터뷰

임상수 감독

“치고 나오는 게 예술가다.” 임상수 감독은 직설적인 자신의 화법이 성격적 결함에서 오는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에두르지 않는 발화 방법이 결국 자신의 작품을 이어온 동력이었다고 말한다. <돈의 맛>은 <하녀>에 이은 또 한번의 돈과 권력, 섹스의 복합관계에 대한 탐구다. 스토리와 플롯의 강화, 서스펜스적인 요소의 심화로 대중에게 다가서기 위해 더 많은 양념이 가미된 <돈의 맛>에 대해 들어보았다.

-자본주의 사회의 ‘부’에 유독 관심을 두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녀> 때는 관객이 ‘나는 하녀가 아니야’라고 하면서 감정이입이 안돼 결과적으로 패착을 둔 것 같다. 그래서 이번엔 중심인물에 대한 설정을 아예 샐러리맨으로 갔다. 부잣집이 배경이지만 젊은 샐러리맨의 이야기로 본다면 이건 보통의 우리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재벌은 워낙 다양하게 소비되어온 소재다. 기존의 개념과는 다른 관점이 존재할 것 같은데. =재벌은 거의 모든 드라마에 등장한다. 그만큼 한국사회에서 관심과 위치가 크단 말이다. 한국에서 지적인 척하는 사람이라면 재벌에 대개 비판적 자세를 취한다. 부자는 항상 사악한 존재로만 그려지는데, 뻔한 관점이고 그야말로 피상적인 해석이다. 실제 그 안에 들어가서 본다면 그 사회에서도 여러 부류의 사람이 있다. 재벌 본인들은 자신들이 한국 경제를 주도하고 있다는 실질적 자부심과 문화적으로 선도적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안고 있다. 그들 내부에서 그들의 진짜 문제가 뭔지 볼 수 있게 하고 싶다.

-<하녀>보다 부의 규모가 커졌는데, 어떻게 부를 구현할 것인가. =<하녀>가 상업적으로 약점이 있었던 건 극이 쉴 틈 없이 짜여져 있고, 그 결과 유머가 부족해서라고 본다. 우리 영화를 자본주의에 대한 접근이라고들 말하지만 내 접근은 ‘돈의 맛’이다. 신분상승이라고 하지만 인물들은 ‘언제 섹스할까’를 고민한다. 더 구체적으로 나아가는 거다. 우리 영화에 사랑에 대한 판타지적 요소는 없다. 처음부터 둘간의 성적 긴장감을 묘사한다. 신분상승을 위한 판타지가 아니라 실질적 섹스가 이루어지는 거다.

-돈의 흐름이 곧 섹스장면을 통해 구체화한다. 어떤 식의 섹스를 연출하려고 했나. =돈의 맛은 권력의 맛이자 결국 섹스의 맛이다. 여러 형태의 섹스, 여러 형태의 벗은 몸이 보여지는데, 이게 곧 돈의 맛에서 비롯된 황음의 세계다. 어차피 섹스는 똑같다. 부자의 음탕한 섹스나 가난한 사람의 아름다운 섹스나 결과적으로 섹스는 똑같을 수밖에 없다. 결국 본질적으로 어떤 섹스가 아름다운지 관객이 판단하게 하고 싶었다.

-<하녀>에서 보여준 실내극의 모범이 이번에도 통용될 것 같다. 돈을 시각화한다는 점에서, 미술 프로덕션의 구현 역시 주목된다. =세트가 50%에 달한다. 그렇지만 세트는 세트일 뿐이다. 난 세트가 주는 상징보다는 관객에게 볼거리를 주고 싶다. 세트보다 관심을 둔 건 벽을 벽대로 놔둘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진품 미술품을 많이 사용했다. 고가의 작품을 집에 걸어놓고 매일 보는 건 어떤 걸까에 대한 문제다. 예술작품은 내가 결핍을 느끼거나 영혼이 깨끗해지기를 원해서 보는 거다. 그렇다고 그들이 모두 아름답게 살지는 않는다. 더 나아가 영화를 본 관객이 이 작품들을 보면 영혼이 좋아질까라는 질문까지 하게 되는 거다.

-어느 하나의 이야기가 주가 된다기보다 다양한 군상, 다양한 시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한다. =촬영이 쉽지 않았다. <하녀>는 두세 사람에게 초점을 두었지만, 이번 경우엔 등장인물의 관계, 선이 복잡하게 왔다갔다해야 했다. 그게 만만치가 않더라. 겉으로 보이는 여러 사람들의 모습, 뒤로 섹스하려는 꿍꿍이 속을 모두 보여주어야 했다. 그게 이 영화의 도전이었고, 결과적으로 그런 점들이 이 영화의 재미가 될 것 같다.

-기존 작품들과 달라진 지점이 있다면. =<바람난 가족>은 플롯과 스토리를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콜라주식으로 갔다면, <하녀>에서부터 시나리오와 플롯을 좀더 강화해서 관객을 서스펜스하게 몰아가는 방식을 시도했다. 이번에는 <하녀>보다 그런 부분이 더 강화될 것 같다. 관객을 염두에 둔 거다. 영화는 좀 길지만, 음탕하고 명랑하고 유머러스한 볼거리 덕에 영화가 언제 끝난지 모르게 하는 게 목표다. 남들 생각은 어떤지 몰라도 난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하는 게 목적이다.

관련영화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