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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현정의 '쪽' - 눈물 없인 못 듣는 음악

고현정_안녕하세요. (정중한 목례) 정말 뵙고 싶었어요.

타블로_(마주 정중한 목례) 저도 뵙고 싶었습니다.

고현정_전부터 타블로씨를 만나보라는 권유는 받았고 에픽하이 음반도 꼬박꼬박 들어왔지만 힙합이 제가 즐겨 듣는 장르는 아니다보니 이런 코너를 진행한다고 부러 만나는 인상을 줄까봐 망설였어요. 제가 타블로씨 음악에 좀더 감흥을 받고 방아쇠가 당겨질 때 만나야 좋지 않을까 했어요. 근데 우연히도 그 계기를 오늘 여기 온 조인성씨가 마련해줬어요. 어느 날 영화 얘기를 포함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면서 “어떻게 좋은 일만 있겠니, 나쁜 일도 있는 거지” 하고 있는데 인성이가 “누나, 그런데 요즘 제가 이 노래로 살아요” 하면서 들려준 음악이 ≪열꽃≫이었어요. 1번 트랙 <집>부터 흘러나오는데, 처음엔 대화에 집중하고 있던 제가 점점 (곁눈질 시늉) “야아, 이거 장난 아니다. 왜 이래 이 노래?” 하면서 급기야는 전곡을 초집중해서 두번인가 세번 연달아 들었어요. 그리고 인성씨에게 물은 거죠. 도대체 어떻게 하면 이분을 만날 수 있냐고.

조인성_그래서 제가 이튿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타블로 형님에게 연락을 넣었어요. 원래 임무를 받으면 바로바로 해결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 (좌중 웃음)

고현정_너무 내 스타일이야. 그래서 매번 결혼하자고 하는 거예요!

조인성_(짐짓 정색) 쉬운 여자는 안 좋아해서요. 얼마 전에도 누님 동생분 결혼식에 갔는데 “예식장도 빌렸겠다, 부모님도 와 계시겠다, 우리도 지금 바로 올라가서 결혼하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러시는 거예요. 그래서 “진작 말씀하시지, 저희 부모님도 오셔야 하는데 지금 연락드리면 연말이라 차가 막혀 늦으실 거예요”라고 난색을 표했어요. 그래도 제가 장남인데 집안의 첫 경사를 부모님 없이 치를 순 없잖아요. (모두 폭소) 타블로 형과는 원래 문자 몇번 오가고 군복무 중 공연에서 만나 잠시 인사드린 게 전부였는데요. 인터뷰라면 공적인 일이잖아요? 사람에게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건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일이라 전화 거는데 무지 떨렸어요. 날 이상하게 보면 어쩌나, 원래 이런 놈처럼 느껴지면 어쩌나, 뭐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이런 모습 또한 나니까 하면서 걸었어요. (웃음) 일단 현재 인터뷰할 컨디션인지 아니면 앨범 홍보가 끝나 공연만 하는지부터 여쭤보았죠. 전 본인의 상태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런데 흔쾌히 “예, 해요”라고 대답해주셨어요.

타블로_전화 받은 제가 훨씬 떨렸을걸요? 앨범이 나온 직후 조인성씨 스타일리스트가 혜정(아내 강혜정 배우)이 일도 함께하는 분이라 전달해드렸는데, 노래 좋다는 문자 주셔서 혜정이한테도 자랑했어요. 이번 앨범은 방송도 <이소라의 두번째 프로포즈>와 순위 프로그램 한번씩만 했어요. 방송 활동에 대한 근본적 입장이 바뀐 건 아니고 관심을 받는 것에 대한 고마움과 공포증이 공존해서 느리게 걷는 중이에요. 언젠가 다시 여기저기서 활짝 웃으며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싶은 마음은, 여전히 뜨거워요. 딱히 인터뷰를 하느냐 마느냐보다 두 배우를 제가 만나 뵙고 싶다는 생각이 컸어요. 제가 이 음악을 만들지 않았다면 없었을 기회니까요.

고현정_얼마나 좋아요. 사람에 따라 미심쩍게 받아들일 수도 있잖아요. 일부러 누가 이런 구성으로 자리를 기획했다면 잘 안됐을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행복해야겠다고 생각하면 행복할 이유가 만 가지고 불행해야겠다고 생각하면 또 만 가지인 거예요. 오늘 전 무엇보다 ≪열꽃≫ 앨범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어요. 듣는 사람은 그냥 전체적으로 좋다고 할 수도 있지만 뮤지션 본인은 멜로디라든가 악기 구사라든가 관련해 이런 상태로 들어주면 좋겠다 싶은 바람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

타블로_개인적인 내용과 감정이 담겨 있어서 ≪열꽃≫을 제 인생 한 시기를 담고 있는 자서전으로 보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만약 가사 중에 “나만 섬인가봐” 혹은 “사는 건 누구에게나 화살세례지만 나만 왜 마음에 달라붙은 과녁이 클까” 같은 대목이 공감되신다면 듣는 분의 노래이길 바라요. 힘들거나 아플 때, 어느 영화나 책의 문구가 자기 이야기를 대신 해주는 것 같아 위로를 얻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렇게 마음의 실어증에 걸린 분들이 위로를 얻었으면 하는 소망이 있어요. 왠지 그런 분들의 마음을 저만큼 깊게 이해할 수 있는 싱어송라이터도 흔하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감히 들고…. (웃음)

고현정_(코를 팽 풀고) 에픽하이는 가사집을 읽다보면 “그래 맞아” 하고 끄덕이다가 음악으로 들으면 갑자기 발칙해져요. “장난 아닌데? 좀 까졌구먼?” 하는 느낌? 그런데 ≪열꽃≫은 거의 무슨 심수봉 선생님 트로트를 들었을 때처럼 후욱 건드려줘서 속이 후련한 게 있어요. <Airbag>도 그렇고 누가 들어도 강혜정씨한테 하는 이야기인 <밑바닥에서>도 그렇고. 눈물 없인 듣지 못하는 앨범을 만들었다는 거 아세요?

타블로_아! 실은 제가 <여자라서 웃어요>라고 심수봉 선생님의 트로트를 한번 쓴 적이 있는데 그렇게 표현하시니 재미있네요. 사실 끝곡 <유통기한>의 가사는 대중문화 일을 하시는 분들, 특히 배우나 가수들에게 선물해드리고 싶기도 했어요. 제가 어려서 꿈이 영화감독이었고 지금도 영화를 무척 좋아하는데 드라마를 보든 영화를 보든 연기 자체를 되게 즐기거든요. 스토리에 빨려들어간다기보다 그걸 연기하는 사람들에게 매료되는 쪽이에요. 연기 잘하는 분들을 보면 그렇게 신기하고 즐거울 수가 없죠. 고현정씨도 그런 분이고요. 제가 <무한도전>을 좋아하는데 그 프로그램에 배우가 게스트로 나오는 예가 꽤 있잖아요? 다들 즐겁게 열심히 하고 가시지만 전 팬으로서 <무한도전>이 게스트 없이 멤버끼리 가는 걸 더 좋아하거든요. 한데 조인성씨는 예외였어요. 심지어 영화배우인데도 무도 멤버들과 어울려 있는 모습이 게스트 없는 회보다 더 즐겁고 좋은 느낌이라 저분과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발이 좁은 편이라 제쪽에서 먼저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거든요.

고현정_발 치수가 몇 밀리미터인데요? (본인이 물어보려고 했다며 아쉬워하는 조인성) 저는 언제부터 타블로씨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을까요?

타블로_<모래시계>부터요. 방영 당시에도 봤지만 지난해 힘든 일을 겪으며 집에 계속 있는 동안 전편을 다시 봤어요. 오히려 지금 만들어졌다면 편성이 힘들었을 것 같은 작품이었어요. 영화에서도 다루기 힘든 이야기이고 연기 자체도 요즘 작품들에 비해 뭔가 농도가 짙다고 할까.

조인성_전 <모래시계>를 현정 누나와 <봄날>을 찍은 뒤에 일본에 머무는 동안 봤어요. 바깥에 나가지도 않고 1회부터 끝까지 통으로 봤죠. 그때 제가 스물다섯에서 여섯으로 넘어가는 시기였으니 <모래시계> 속 누나와 비슷한 또래였어요. 현재의 누나와 저를 비교한다면 누나가 훨씬 위인 건 당연하지만 과거의 제 나이 무렵 누나랑 연기를 비교할 때는 비슷하게 잘하고 싶은 욕심은 있게 마련이잖아요. 그런데 보면서 “상대가 안되겠구나” 하는 순간이 있었어요. 할 수도 있겠다가 아니라, 안되겠다 싶어 무릎이 훅 꺾이는 거죠.

고현정_막상 그땐 한참 연애하느라 작품에 완전히 집중도 못했는데. (웃음)

조인성_누나의 그 말씀을 듣고 아, 뭔가 의도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노리면 엇나가는구나. 군대에서도 경험이 있었지만 사람들을 만났을 때 잘해줘야지 하는 순간에 내 의도와 다르게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결과적으로는 제가 다른 방향으로 행동하고 있더라고요. 생각을 덜어내고 툭툭 움직였을 때 훨씬 피드백도 리액션도 좋다는 걸 알았어요.

나한테 집중하고, 나와 관련된 모든 것을 사랑하고

고현정_음반을 만들고 곡을 쓸 때도 이번 앨범은 이런 느낌으로 채우고 싶다고 작심하면 더 잘 안되지 않나요? 스스로 그득 차서 넘칠 때가 아니라, 명분이나 계기가 채 무르익지 않았는데 이번 작품은 이렇게 가자는 욕심이 앞설 때 말이에요.

타블로_예전에는 정말 슬픈 노래를 만들어서 다 울려야지, 이 곡은 정말 신나게 해봐야지 하는 각오를 갖고 작업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열꽃≫은 전혀 그런 욕심이 없었어요.

고현정_앨범을 듣고 ‘이건 정말 아름다운 음반이야. 의도한 게 하나도 없어. 다 사실이잖아?’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면서도 곡 하나에도 기승전결, 클라이맥스가 있고 앨범 역시도 그러해요. 세련된 거죠. 또 하나. 저는 ≪열꽃≫의 가사집을 책 형태로 다시 펴내도 좋을 거라는 상상을 했어요. 앨범 아트워크도 타셈 싱 감독(<더 셀> <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 영화와 비슷한 느낌이 들면서 좋았고요.

타블로_아, 정말 그런 생각도 있긴 해요. 앨범 나온 뒤 “너의 가사들을 묶어 작은 책으로 갖고 있으면 들고 다니다가 힘들 때 펼쳐 볼 수 있고 좋겠다”라는 식의 말을 주변 사람들이 자주 해서 상상만 해봤는데 용기가 안 나요. “네가 뭐 대단한 걸 썼다고 또 책을 내?”라는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계속 들려서. (웃음) 말씀 들으니 좀더 힘이 나네요. 많은 사람들이 원하고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해야죠. 여러분, 원하시면 제 트위터로 멘션 날려주십시오. (웃음)

고현정_아무래도 에픽하이보다는 타블로의 이름으로 나온 이 앨범이 제 나이나 감성과는 맞는 것 같아요. 에픽하이 음악도 좋은 가사를 담았지만 ≪열꽃≫은 들으면서 가사를 필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타블로_의도가 없어서 더 그랬을지도 몰라요. 이번 앨범은 영화로 치면 액션이랑 컷을 외쳐주는 사람이 없었거든요. 데드라인도 없고, 꼭 만들어야 되는 작품이 아니고, 어쩌면 영영 음악 안 해도 되는 상황이었으니까. 제 음악을 기다리는 분도 있었겠지만 전 거기에 별로 귀기울이고 있지 않았고. 굳이 누가 이 음악을 필요로 할까라는 의문조차 가질 필요가 없으니 작업하다 스스로 어느 순간 컷하면 끝이었거든요. 앞으로도 그런 식으로 음악 만들긴 힘들겠지만, 허공에 붕 떠서 작업해보니 장점도 있었어요. 내게 걸린 기대의 내용을 모르니까 그저 생활하듯 음악을 하게 되더라고요.

고현정_의도가 없었지만 듣는 이들이 타블로씨 본인의 이야기로만 읽을지 모른다는 점이 혹시 부담스러운가요?

타블로_지금 와서 돌아보면 그 시기 사람들이 제게 바란 음악은 뭔가 분노가 강한 음악이었던 거 같아요. 굉장히 억울하고 화나 있는, 그런 내용을 원했던 것 같은데 제가 느낀 감정이 막상 그게 아니었거든요. 그래서 신경 쓰지 않았고 역으로 그런 기대에 맞는 음반은 만들고 싶지 않았어요. 그것 역시 누군가에게 맞춰주는 거니까.

고현정_나한테 집중하고, 나와 관련된 모든 것을 사랑하고,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수치를 정확히 알고 주변을 잘 정리하는 게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것들이 제대로 안된 상태에서, 어쩌다보니 한 직업을 갖고 나이 먹고 “대충 리서치해보니 지금쯤 이런 걸 해야 하나보다” 어림잡아 맞춰가고 그러면 결국 다 무너져요. 그거야말로 자만이고 내가 멋대로 기대치를 추정해버린 대중에게도 실례예요. 그분들에게 일일이 물어본 적 없잖아요? (웃음) 인성씨한테도 가끔 말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지금 자기 상태예요. 글쓰는 사람은 글로, 음악 만드는 사람은 음악으로 현재 상태를 스스로 노출할 수 있는 용기와 결단이 있어야 수용자들도 서서히 걸러지면서 나중에 든든한 보루가 되는 것 같아요. 일일이 상대의 기준에 맞춰 흔들리다보면 나는 나대로 소모돼 만신창이가 되고 사람들은 사람들대로 “그래, 얘는 원래 하라는 대로 하는 애니까”라고 의식해요. 포지션이 괴상하게 역전되는 거죠.

조인성_정확해요. 제가 <권법>(박광현 감독의 신작)의 촬영이 늦춰지는 상황이 무척 아쉬운 이유도 똑같아요. 내가 필요한 타이밍에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작품을 딱 붙들었는데 바로 못 가고 있으니까 그 상황에서 다른 작품을 선택하기가 쉽지 않은 거예요. 그런데 직접 작업하는 입장이 아닌 주변이나 회사에서는 이해 못하고 조바심을 내죠. “이것도 괜찮잖아?” 하면서. 적당히 하면 “괜찮긴” 해도 구경거리 이상은 안될 그림이, 직접 하는 사람의 눈에는 뻔히 보이는데 표현이 잘 안되는 게 괴로워요. 음악인이 부러운 점은 누나 말씀대로 현재 상태를 스스로 폭로하는 작업이 바로 가능하다는 거예요. 배우는 일단 뭔가 만들어져 있어야 하고 그중에 골라야 하니 수동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는 조건이 갑갑한 경우가 많거든요.

타블로_혜정이와 비슷한 대화를 하는데 거꾸로 저는 배우의 수동성이 부럽기도 해요. 전 작업할 때 망망우주에 떠 있는 기분이거든요. 일을 하려면 제가 다 만들어야 하니까요. 특히 이번 앨범은 소속사도 없는 상황이었고 1, 2년간 거의 무직 상태였죠. 누가 가이드라인 아니면 ‘시나리오’ 같은 밑그림을 주면 좋겠다 생각하기도 했죠. 배우인 혜정인 저를 부러워하고요.

고현정_그러니까 다들 결핍은 좀 있는 게 좋아. 어떤 사람이든 꽉 채워지면, 그만 살아도 되죠. (좌중 웃음) 이따금 TV에 나온 신인배우, 신인가수를 보면 굉장히 안정적인 친구들이 있어요. 안전하고 딱히 흠잡을 데도 없는데, 궁금하지도 않거든요. 반면 불안정함이 확 느껴지는데 아 저 사람은 연예인이, 스타가 될 수 있겠다 싶은 경우가 있죠. 안정적인 유형이라면 차라리 탄성이 나올 만큼 치밀하게, 고상하게 가는 쪽이 맞는 것 같아요. 이도저도 아니면 기획회의의 결과물 수준을 결코 넘지 못하는 예가 많다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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